일본에서의 둘째 날은 도쿄 외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스미다區 빗물이용박물관 실무자와의 인터뷰가 오전 9시로 예정돼 있어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가이드 역시 이곳 빗물박물관 안내는 처음인지라 네비게이션은 필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예정시간 보다 우리가 약간 일찍 도착한 탓인지 실무자인 '마카토 무라세' 박사는 아직 자리에 없었다.
아침 일찍 참석한 구청 세미나가 길어져 무라세 박사가 조금 늦는다는 전갈이 왔고 직원 안내로 우선 빗물이용에 관한 영상홍보물을 시청하면서 박사를 기다렸다. 잠시 후 빗물세미나 관계로 한국의 TV에서 한 두 번 본적이 있는 무라세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 빗물박물관
"No more Tanks for war, Tanks for peace ! 전쟁용 탱크 대신 평화를 위한 빗물탱크를 ! "
20년 넘게 빗물 이용을 연구하고 실천해 온 세계적 빗물 박사로 통하는 일본 빗물이용박물관 '마카토 무라세' 박사가 제창한 名句이다.
뜻을 살피자면, 21세기는 '물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물 때문에 탱크(전차)가 필요한 게 아니라 물탱크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무라세 박사는 "빗물이 지구를 구원한다"는 믿음과 신념으로 지난 1994년 이래 세계 빗물 이용 연구를 주도하고 있으며 도시와 건물, 주택과 실생활에 빗물을 이용한 다양한 친환경시설을 제안하고 설치하면서 아이디어도 개발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찾은 빗물박물관은 5년전 폐교된 초등학교를 환경부 지원을 받아 빗물이용센터로 개관, 환경·에너지 및 자원 리사이클 전문시설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1년에 세계 각국 50여개 관련단체가 견학 오는 곳이 되어 빗물이용에 관한 한 이곳은 반드시 방문해야할 메카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한 뒤 무라세 박사는 대뜸 "빗물이 없으면 생물은 자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식물을 재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귀중한 빗물을 너무 소홀이 하고 있지는 않나요?" 묻고는
"빗물은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용한 자원입니다. 당신도 빗물을 저장하여 이용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제 비가 기다려질 것입니다" 며 빗물 얘기를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의 모든 도시들은 물이 부족하면 상류에 댐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 왔으나 거대한 댐의 개발은 많은 산림이나 농지를 훼손하여 수많은 인근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고 상류에 댐을 건설하는 것보다 도심에 여러개의 미니댐(빗물 저장탱크)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빗물 이용의 시작이었는데 이는 도시에 필요로 하는 물의 양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며 빗물 이용의 역사를 설명했다.
동경의 예를들면, 동경 도심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포장해 빗물 침투를 철저히 봉쇄한 결과 폭염에 찌는 도시, 갈증나는 도시, 홍수의 도시가 되고 말았는데 빗물의 자연순환을 되찾아 후세들에게 빗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로 만들고자 지붕이나 대지에 내린 빗물을 탱크에 모으고 지하로 침투시키자 도시홍수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모아진 빗물을 자연수원으로 버리는 물이나 방화수로 활용하고 또 빗물의 지하침투는 도시의 열오염이나 건조화를 방지해서 도시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었고, 지하수가 풍부해지자 음용수로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빗물이용이 도시 수자원 문제와 환경 문제의 종합적인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적인 도시 도쿄와 인근 자치區 대부분의 공공기관, 건물 등에 빗물이용 친환경시설이 1,000여개 가량 설치돼 있다고 한다.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 도쿄는 건물면적이 1만㎡ 이상이면 빗물이용 시설을 의무화 했고, 최근에 자치단체들도 조례를 제정, 대지 면적 500㎡ 이상의 건물이나 맨션, 아파트 등은 빗물이용 시설을 의무화 하고 있다고 한다.
무라세 박사를 비롯 스미다區시민들로 구성된 '빗물을 연구하는 모임'의 제안으로 '스미다 區廳'과 일본 전통씨름으로 유명한 '스모경기장', '동경박물관' 도 지붕에 빗물이용시설을 설치, 조경관리水는 물론 청소용水 등 다양하게 사용하고 또 유사시엔 방화水로 활용키 위해 빗물을 저장하고 있다.
스미다 區廳의 경우, 100㎥ 강우시 500㎥ 빗물 저장이 가능한데 이중 50%는 홍수방지, 50%는 재활용 목적으로 빗물을 저장하고 있으며 1년에 약 200만엔 정도 수도요금까지 절감하고 있다.
일본은 지속성 강우지역 이어서 굳이 빗물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낄 수 없었지만 물의 소중함과 재해예방 때문에 왠만한 건물과 주택엔 거의 모두 물탱크를 설치해 빗물을 생활 곳곳에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거리 곳곳 주택과 건물마다 '天水尊' 이라 쓰여진 물탱크가 설치돼 있는데 이는 "'天水' 즉,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尊' 존중한다"는 뜻이라 했다. 일본인들이 흔하디 흔한 빗물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활용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무라세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빗물이용시설은 간단한 구조일뿐더러 설치비도 아주 적게 든다. 지붕에서 집수된 빗물은 운반-필터-저장 과정을 거쳐 급수시설에 활용된다. 이렇게 모아진 빗물은 펌프를 이용, 청소용수·조경용수 등으로 사용되고 비상시 또는 가뭄시에는 저장된 빗물을 식수도 사용할 수도 있고 홍수방지 기능까지 가능하다.
중국에서도 강우량이 적어(한해 300㎥ 강우에 증발 2000㎥) 황무지 였던 황화 상류 산간지역에 콘크리트 빗물탱크를 수백개 설치, 빗물을 모아 농경에 활용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게되고 농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는 사례도 들려주었다.
또 방글라데시는 현재 인구 4천만명이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어 각종 전염병, 암 등에 시달리고 있는데 빗물이용 식수 활용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점차 개선되고 있고, 워낙 가난한 나라여서 정부가 나서지 못한 관계로 빗물이용협회 등에서 후원금을 모금해 빗물탱크를 설치해 주고 있다는 설명도 했다.
무라세 박사의 안내로 빗물박물관에 전시된 여러 가지 빗물이용 시설과 빗물하우스 등을 견학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다양한 빗물이용 도구는 물론 최근에 개발한 수십종의 특허시설까지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었고, 직접 빗물을 받아 건물과 가정에서 이용하는 과정까지 전과정을 시연할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은 독일에서 개발, 사용중인 일반 가정용 빗물이용 시설이었다. 설치비가 80만엔으로 다소 부담은 되지만 14년 후엔 수돗물 대비 제로가 된다는 설명이었고 일본에선 10년전부터 신도시 위주로 10%가량 설치되고 있다고 했다. 일본 제품으론 화장실 변기가 최근 개발돼 시판하고 있는데 약 30만엔으로 빗물과 수돗물을 자동 전환 할 수 있다고 했다.
무라세 박사는 "지금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빗물을 소중하게 모아 재활용 하는데 있어서 빗물이용 시민단체의 활동이 아주 중요하다"며 "앞으로 홍수방지나 물 재활용 차원에서 지붕이 넓은 관공서나 학교, 빌딩부터 우선적으로 빗물이용 시설을 설치해야 하고 일반 가정에서도 식수를 제외한 모든 물 사용에 있어서는 경제성을 따져 반드시 설치하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한국은 일본과 달리 국지성 호우가 잦은 지역이므로 빗물 활용방법을 달리할 필요성이 있으며 한국에서 빗물이용에 관한 요청이 있을시 언제든지 아이디어를 제공하겠다"는 제안도 했다.
우리나라도 봄에는 가뭄으로, 여름에는 홍수로 이중의 물난리를 거의 매년 겪고 있다. 홍수시에는 많은 피해를 주어 빗물은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도시에 내린 빗물이 지붕이나 도로의 오물과 섞여 하수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노상 빗물이란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폐기물' 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물 사용량은 늘어나는 반면, 물을 모아둘 댐의 용량은 한정되어 한꺼번에 내린 아까운 빗물을 그대로 흘러 보낸 다음에는 또 그 물이 모자라 항상 고생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물에 대한 인식을 "한번 쓰고 버리는 것"에서 "아껴서 써야하는 것" 이라는 관점으로 바꾸어야 할 때이다.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귀찮은 존재가 아닌 하늘이 내려준 소중한 자원의 혜택으로 생각하고 풍요로운 도시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경기도 의왕시 갈뫼중학교에 우리나라 최초로 빗물이용시설이 설치돼 빗물의 소중함과 물 절약에 관한 교육과 연구의 중심센터가 되고 있으며 아직 미약하지만 '빗물모으기운동본부'도 결성돼 활동중이다.
끝으로 "일본과 한국 사이에 '빗물이용'에 대한 정보 교환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나아가 '비의 문화' 차원의 교류가 번성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한 무라세 박사는 일본은 물론이고 유엔과 함께 전세계를 찾아 다니며 25년째 빗물이용 프로젝트를 진행중에 있다.
세계 빗물이용협회 부회장, 일본 우수이용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으며 대학에서 강연도 하고 있다. 한국엔 10여 차례 방문, 서울대에서 빗물관련 세미나를 수차례 가진 바 있고, 한무연 교수(서울대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와는 빗물이 인연이 돼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받아 취재하였습니다) / 글 장광호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 빗물이용 주택 사례
키요시 사토氏의 집
사토씨의 집은 빗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집으로 널리 알려진 단독주택이다. 1987년에 건축한 이래 본격적인 빗물이용을 선구적으로 해오고 있고 수많은 잡지와 신문에 소개되었다.
이 주택에는 지하에 약 40㎥의 빗물탱크가 있어 빗물을 지붕으로부터 모아서 주로 화장실 용수, 정원용수 등으로 사용하고 물이 충분한 경우에는 세탁용수로도 사용한다.
이 집은 황천의 지류인 싱가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어 비가 많이 내리면 홍수가 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홍수 방지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고 신축할 때 대형 빗물 저장탱크를 만들어 빗물을 모아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빗물이용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는 많은 시설들이 이 집에는 설치 되어있다.
예를 들어 1층의 천정에는 빗물이 통과하는 파이프를 설치해 실험적으로 복사냉방을 하고 있다. 관을 통해 빗물을 보내면 실내온도가 3도 정도 저하된다. 선풍기가 있다면 에어콘 없이도 여름을 그럭저럭 지낼 수도 있다.
모은 빗물을 지붕면에 뿌려 건물을 냉각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빗물을 깨끗이 모으기 위해 집수관에 망을 설치해 흙을 걸러 빗물을 여과하는 설비도 갖추고 있다. 사토씨의 집은 3층 단독주택으로 건물면적은 130㎡ 지붕 64㎡ 저수탱크 40㎥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