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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조선 왕조 속에 빛나는 여인 ‘숙빈 최씨’담양 용흥사 영조대왕 탄생 설화 간직
김관석 기자  |  wdy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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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07  15: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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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북면 궁산리 중전사 옛 절터에 남아 있는 마애불
   
▲ 숙빈 최씨 고향으로 알려진 대전면 갑향면(옛 창평현) 소두마을 전경
   
▲ 담양 월산면 소재 용흥사

‘대전면 소두마을·수북면 중전터’ 남아 있어

궁궐에서 궂은 일을 하던 무수리에서 영조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천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기를 기회로 만든 강인한 여성이다.

어릴 적 이름이 복순으로 알려진 숙빈 최씨의 고향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담양군 월산면 용구산 용흥사에 내려오는 이야기다.

10여년 전 큰 인기를 얻은 MBC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동이’에 관한 전설이 바로 이곳이다.

숙빈 최씨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영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용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백제 때 인도승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지며 본래는 용구사(龍龜寺)라 불렸다.

영조는 장희빈이 낳은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자, 1724년 왕위에 올라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영조는 즉위 이듬해에 어머니 숙빈 최씨가 용구산 산신령의 덕화(德化)를 잊지 못함을 알고, 소녀시절 최숙빈이 지냈던 사찰을 중창하고 용흥사로 개칭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었다.

이후부터 용구산은 산신령이 숙종으로 하여금 영조를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꿈을 꾸게 한 영험한 산이라 하여 몽성산(夢聖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용흥사에는 최복순과 관련된 전설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용흥사동종(보물 1555)이 있다.

이 보물은 ‘조선시대 용흥사 스님 한 분이 효성이 지극한 소녀가 용흥사 절에 딸린 암자에 들어와 산신령의 인도로 고관대작을 만나 입궐한 후 왕을 낳을 것이라 예견하고 후세에 길이 남을 성군을 기리기 위해 용 네 마리로 장식된 범종을 제작해 부처님께 바쳤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와함께 최복순은 담양 창평현의 가난한 농부 최 사령(使令)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은 현재의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 소두 마을이다.

창평과 가까운 금성면 봉서리 와룡촌에는 해주최씨의 최충(崔沖)과 최천범 등을 모신 삼현영당이 있는 해주최씨 집성촌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복순은 가난한 집안 형편에 가족이 전염병(장티푸스)에 걸려 동네에서 쫓겨나 수북면 궁산리 ‘중전’이라 불리는 절터(혹은 용구산 암자)에 기거했다.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선몽하길 쪽재를 넘어 용흥사라는 절에 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용흥사는 용구산 중턱인 중전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그녀는 곧바로 쪽재를 넘어 용흥사로 갔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전라목사로 부임해 오는 민목사 일행을 만나게 되고 이후 인현왕후와 인연을 맺었고 궁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숙종 때 입궐 전 숙빈 최씨가 기거했다고 알려진 수북면 궁산리 중전사 절터에는 마애불이 2기가 있는데 하나는 풍마에 훼손되어 그 형상를 찾을 길 없고 하나는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실 지금도 이곳 궁산리 마을에서는 ‘중전사’라 부르지 않고 ‘중전’이라고 부르고 있어 이름 자체부터 특이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영조의 탄생과 관련해 또 다른 기록은 이문정(1656~1726)이 쓴 수문록에 나와 있다.

이 책에는 최숙빈과 장희빈의 악연이 담겨져 있는데 이야기는 숙종 임금의 낮잠으로부터 시작된다.

선대왕(숙종)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신룡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다 가까스로 머리 뿔을 드러내고는 울며 선대왕에게 말하기를 “전하!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놀란 숙종은 얼른 눈을 뜨고 자신의 아이를 누군가 임신했으며 그 아이가 태중에서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한다.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른 이가 장희빈이었다.

궁금증이 생긴 숙종은 중궁전으로 급히 달려갔지만 임신의 기미를 느낄 수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담장 밑에 독이 하나 있는데 거꾸로 엎어진 상태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독을 세워보라고 지시하니 독안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얼마 전 동침을 한 최숙빈이었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첩보를 빨리 입수한 장희빈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최숙빈은 1701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노라는 증언을 하면서 사약을 받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숙종은 처첩을 활용하여 탕평정책을 펼쳐나갔기 때문에 최숙빈에게도 많은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한 세력이 커지면 곧 바로 견제를 했던 숙종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어떻든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왕명을 내렸고 이로 인해 최숙빈은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왕후의 칭호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효심이 강한 영조는 그의 어머니 사후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숙빈 최씨의 소령묘를 소령릉으로 고치려 하였지만 이 또한 신료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소령원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역사에서 숙빈 최씨의 이름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장희빈, 인현 왕후, 숙종에 대한 기록이 많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역사 속에 드러난 숙빈 최씨의 기록은 거의 없지만, 숙빈 최씨의 삶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바는 매우 많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서는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임금과 천한 무수리의 사랑, 인현 왕후를 향한 변함없는 의리와 심성, 처절한 당파 싸움 속에서도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훌륭히 키워 낸 점 등이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조선의 21대 임금이다.

그가 어진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영향이 크다.

영조의 검소한 생활이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무수리였던 어머니의 경험과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조선의 핏줄을 잇게 한 숙빈 최씨는 지혜와 사랑, 헌신적인 삶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으니, 어지러운 세상에서 더욱 빛나는 아름다움이다.

부디 길이 이어가고 본받을 우리들의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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