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담양지명 천년 기획/㊳창평면 용수(龍水)·유곡(維谷)·유천(柳川)·의항(薏項)리
담양인신문  |  webmaster@wdy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7.25  15:07:0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 창평면 의항리 보평마을회관
   
▲ 창평면 유천리 마을 전경
   
▲ 창평면 유곡리 선인문
   
▲ 창평면 용수리 상월정(전남 문화재자료 제17호)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용수1리 월동(月洞)마을

월동마을은 입향 연대나 입향조는 자료나 고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월동이라 이름하게 된 것은 상월정에서 내려오다 보면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제일 가깝게 볼 수 있다 하여 달이 있는 골짜기, 달동네라고 부르다가 월동마을로 명명했다고 전한다. 창평지에는 창평현 동면 입점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점리에서는 평량자, 즉 패랭이 갓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라자는 국내의 다른 곳에서는 생산품이 없고 오로지 창평의 입점리에서만 생산되는 소중한 제품이다. 30여년 전만 하여도 평량자를 생산하였는데 이제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또 이 마을에는 유명한 샘이 있어 모든 병이 치료된다 하여 원근의 남녀들이 약수를 찾아 왔다 한다. 명산 월봉산 아래에 자리한 월동마을은 창평현의 옛 중심지였을 만한 풍수적으로 좋은 명당이라고 볼 수 있다. 명당의 기운을 받은 창평의 인물들 중 이 마을 출신들도 빠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월동마을 최씨 집안의 삼형제가 육사, 해사, 공군사관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2)용수2리 수곡(水谷)마을

수곡마을은 약 400년전 장흥고씨가 이곳으로 이주해 와 자작일촌하였다. 처음 마을 이름은 목숨 수(壽)자를 쓴 수곡(壽谷)이라 했는데 그 후 물 수(水)자를 쓴 수곡(水谷)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 풍경이 중국의 이구산과 닮아 굉장히 수려하다. 이렇게 지령과 인물이 서로 부합되어 문화와 교육이 앞선 마을이다. 월봉산 필봉의 정기를 받아 글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났는데 특히 상월정에서 공부하여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 후손들 중에도 국회의원 고재필과 서울대 부총장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 또 이 마을 사람들은 국가관이 투철하여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들도 며칠 견디지 못하고 창평을 떠났다 한다.

 

3)용수2리 용운(龍雲)마을

용운마을은 지금부터 약 300여년전 금성나씨인 위규가 현재의 창평리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며, 그 후 장흥고씨, 강화최씨, 파평윤씨가 입주하였다. 월봉산의 한 맥이 내려오다가 구봉산이 주봉이 되어 그 아래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앞으로는 용운천이 흐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이 ‘비룡사우(飛龍瀉雨)’형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용운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건들이 있는데 고지대로서 한해가 심하였다. 그러나 1943년 용운제가 축조되어 평야가 수리안전답으로 변하였다. 이 마을에는 ‘상월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김병로, 송진우, 김성수 등이 공부하였다. 그 후로도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공부하여 고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현재에도 몇 명의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동북간 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옆으로는 소곡천이 흐르고 있으며 부곡제가 있다.

 

4)유곡1리 절산(節山)마을

절산마을은 조선 중종19년(1524)에 함양박씨 이홍이 홍문정자 경연 전경이라는 두 벼슬을 역임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창평 용수리 월봉산에 월영정을 짓고 피신하여 왔을 때, 그의 형인 이관이 담양부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이관은 절산마을 뒤의 산에 삼봉이 있으므로 지세가 매우 좋다하여 동생을 이곳에 살도록 권유하였는데, 마침 이홍은 어머니가 형의 관사로 들어가길 싫어하니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절산으로 입향하게 되었다. 동쪽의 구봉산맥이 내려오다가 마을 뒤에 왕자산맥을 이루어 주봉이 되었다. 앞에는 서석산이 마주보이며, 동쪽에는 천마산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심방산이 아담한 터로 이루어졌다. 절산마을은 배의 형국이라 샘을 함부로 파지 못해서 항상 식수가 부족했다. 배에 구멍이 뚫리면 침몰할 우려가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다. 마을 동쪽 골짜기에 쇠바위가 있는데, 마을 앞은 한바다(大海)이므로 쇠바위에 배를 매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절산인 것은 함양박씨의 절산사(節山祠)가 세워져서 절산이라 부르다가 마을의 주봉이 마디마디로 기복되어 뫼산(山)자를 이루므로 절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예전에 이 마을은 면화 생산이 해마다 수만 근에 이르러 군내에서 제일 많은 면화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5)유곡2리 연화촌(蓮花村)마을

연화촌마을은 약 300년전 평택임씨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하나 현재 평택임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고, 1716년 전주이씨 이단, 이균 형제가 전북 무장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입주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때와등’이라 부르다가 연화촌으로 개칭하였다. 그 이유는 마을 앞 화성산의 화(火)자가 화재와 재앙을 가져 올 것이니 수성산(水城山)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하여 개칭하고, 또 풍수지리설에 의해 마을의 지형이 연꽃 모양과 같다 하여 연화촌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그 후 홍주송씨, 남원양씨, 함평이씨, 전주이씨가 들어와 성촌을 이루었다.

 

6)유곡3리 기동(基洞)마을

기동마을은 약 300년 전 숙종 때 김해김씨가 처음 터를 잡고 정착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고, 이선한 씨가 무정면 덕곡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처가의 연고로 이곳에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 터를 잡은 골짜기라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텃골’로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부터 ‘기동’으로 개칭하였다. 등잔걸산이 주봉이며 앞에는 광덕천이 흘러내리고 담양 창평선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난다. 1968년 유곡제가 축조되어 수리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옛날에 이 동네는 아가씨들이 많았으나 다 타지로 나가고 외지에서 여자들이 많이 시집왔는데 아들을 많이 낳았고, 출산율이 좋았다. 그래서 한때 이 마을은 5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3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7)유천1리 유천(柳川)마을

유천마을은 1400년 전 신라 56대 경순왕 때부터 언양김씨가 조선 세조 때까지 거주하였다고 한다. 유천마을은 당시 강원감사 김흥교의 토지였는데 사위 이경에게 양도하고, 이경이 임진왜란 때의 충신인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를 사위로 맞아 양도해준 후 장흥고씨가 주축을 이루어 살아 왔다. 마을의 지형이 수양버들 가지가 드리워진 것과 같아 마을이름을 유천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8)유천2리 하소천(下素川)마을

하소천마을은 1400년 전 고려 초기 때 만들어 졌다고 한다. 또한 선조 23년(1590) 강화최씨에 의해 개척되어 하소천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원래 하소천은 강이었는데 강을 메워 터를 잡았기에 하소천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전주 이씨 외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을 소천이라 한 것은 마을 앞 냇물이 결백하고 조촐함을 의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마을의 하천 아래에 있어 하소천이라 하였다. 옛집은 하나도 없으며 복개 후 다시 마을이 생성된 셈이다. 이 마을에는 한약방(바랑산 한약제) 이상석 어른이 있었는데, 당시 이 근방 논은 모두 그 사람 것이라 할 만큼 최고 부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에 큰 한옥이 있었으나 통째로 옮겨가 다른 곳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9)의항1리 죽항(竹項)·보평(普坪)마을

죽항마을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해김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개척할 때, 북으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들이 있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고 후손들이 번창할 것이라 생각하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처음 이 마을의 산세가 뱀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 형태이므로 ‘대목이’라 칭하여 오다가 이곳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대독’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 후 조선조 중엽에 작성한 추성지에 죽항리로 기록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싸리제품을 많이 만들었다. 보평마을은 개척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유래는 천년 이상 되었다고 전한다. 함양박씨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는 ‘밭등’이라 불렸고 성촌되면서 보평으로 개칭되었다. 그후에 최씨가 입주하였다. 보평마을은 창평지에도 지명이 없으며 정조 17년(1793)에 창평읍을 이주한 후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마을 앞에는 담양~광주 간 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여 창평고등학교 등 교육문화가 발달하였고, 채반을 많이 만들어 채반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10)의항2리 신기(新基)·의암(義岩)마을

신기마을은 철종1년(1850) 남원양씨가 장성에 거주하다가 새로운 터를 찾아 배회하던 중 이곳에 와서 주변 산천을 둘러보고 운암천과 삼지천이 합류하여 농사짓는데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정착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창평현의 서쪽에 위치하고, 마을 명칭은 인근 마을주민들로부터 새로운 터라는 뜻인 ‘새터’라 불려 오다가 일제 때부터 신기라고 칭하였다. 의암마을은 장수황씨에 의해 처음 개척되었으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그 후 뒷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사계절 맑은 물이 흘러 배산임수가 되므로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송달성이라는 사람이 입향하여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 의암마을은 원래 담양에 속했는데 조선 중엽에 개척된 것으로, 당시에는 뒤편 바위 형태가 귀를 닮았다 하여 귀이(耳)자와 바위암(岩)자의 음을 따서 이암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구한말 어느 날 백발 도사가 시주를 나왔다가 뒤편의 바위를 보고 말하기를 ‘바위가 의로운 기상을 띠고 있으니 마을이름을 의암(義岩)이라고 고치면 자손이 번창하고 부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의암이라 고쳐 불렀다.

 

담양인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기자코너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담양군 담양읍 미리산길 28 별해리A 상가동 3층  |  대표전화 : 061)383-2772  |  팩스 : 061)383-9945  |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전남 다 174호(2002.10.25)
대표이사·발행인 : 김동섭  |  편집인 부사장 : 김광찬  |  편집국장 : 정용택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용택
Copyright © 2013 담양인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