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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지명 천년 기획㉝용면 용치(龍峙)·월계(月桂)·추성(秋城)·통천(桶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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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4  09: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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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면 통천마을 전경
     
▲ 용면 통천마을 전경
   
▲ 용면 용치마을 곶감 농가
   
▲ 용면 담양호 용마루길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용치1리 용치(龍峙)마을

용치마을은 전북과 도계를 이루고 순창에서 담양으로, 순창읍에서 정읍으로 이은 삼거리의 교차점에 자리한 마을이다. 1700년경 밀양박씨 종재가 돌림병으로 인하여 경북 대구지방을 떠나 전북 부안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았다. 그 뒤 인동장씨 수만이 들어온 것으로 전하여진다. 그러나 마을 주변의 지석묘와 구석기시대의 돌보습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는 삼거리라 부르지만 일제강점기 전에는 교통의 요충지라 하여 네거리로 불렀다. 전북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한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을 용치라 칭하였다. 그리고 1961년 10월 1일 1일부터 용치 1구로 행정 운영되고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한지제조 집단지로 서울 등지에 내다 팔았으나 지금은 만들지 않는다. 순창군 복흥면으로 넘어가는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지금의 도로 밑 계곡으로 통행하였다고 하는데, 이 계곡에 ‘장자울’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6.25때 전소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2)용치2리 천치(天峙)마을

천치마을은 순창군 복흥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 중턱에 위치한 담양군에서 제일 작은 마을이다. 천치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인근 추월산으로 피신한 밀양박씨와 양천허씨, 인동장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산천이 수려하고 농토가 비옥하여 자손이 흥할 곳이라 하여 각지에서 이주해 들어왔다. 조선 말 고종 때만 해도 100여 가구가 거주하는 용면 제일의 부촌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를 사고 팔려면 꼭 이 마을에 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담양-순창-정읍 간의 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 원래 마을 지형이 제비집 형국인데 새로 난 산업도로가 구렁이 형국이라, 큰 구렁이가 제비집을 넘나보는 형국으로 변하며 재앙이 끊이지 않아 점차 마을이 쇠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예부터 천신제를 모셨다 하여 천치(天峙-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치리로 되었으며 1961년 10월 1일부터 용치리 2구로 행정 운영되고 있다.

 

3)월계리 월계(月桂)마을

월계마을은 추월산 줄기로 둘러싸여 형성된 마을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신안송씨 일가가 터를 잡고 살았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무하여, 1800년 경 경주최씨가 추월산 보리암에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이곳의 산세를 보고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장성군 북하면에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산세가 달 속의 계수나무와 같다고 하여 월계라 했다고 한다. 월계리는 담양호 축조 전에는 월계, 복리암, 구복, 황등, 진수동 5개의 마을이었으나 구복과 황등, 진수동은 호수에 잠기고 말았다. 추월산 중턱에 있는 ‘보리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1984년 2월 29일 전남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보리사’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신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

 

4)추성1리 추성(秋城)마을

추성마을은 추월산 아래 동쪽에는 정각산, 서쪽에는 오장산을 끼고 무등산을 바라보며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전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636년 밀양박씨 박덕만이 장흥군에서 살다가 지금의 마을 북쪽 청양계곡에서 살다가 도둑이 심하여 박곡마을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마을의 농지와 너무 멀고 불편하여 현재의 마을로 이주하여 터를 일구었다. 마을 이름은 통일신라시대에 추성군에 속하였다 하여 추성리라 명하였다고 전해지며, 60여년 전만해도 마을 앞에 노거수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숲거리 또는 숲징이라고 하였다. 추성리는 배형국이라 재산을 많이 모으면 가라앉는다는 설이 있어서 들어오면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되면 추성리를 떠나야 한다는 설이 있다.

 

5)추성2리 와산(臥山)마을

추월산 아래 동쪽으로는 정각산, 서쪽으로는 오장산을 끼고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는 추성리에는 추성마을, 와산마을, 신흥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의령남씨가 정각산 기슭 위턱에다 처음 터를 잡았는데 그 후 경주김씨 김현욱이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서 분가하여 지금의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후 1796년 광산노씨가 광주 임곡에서, 1800년경 전주이씨가 담양읍 남산리에서 이주해 와 정착하여 살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담양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정각산의 산세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산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추성리에 편입되면서 추성리로 행정리가 되었으며 1961년 10월 1일부터 추성리 2구 와산마을로 행정 운영되고 있다. 와산마을 정각산 중턱에

‘각시샘’이 있는데, 이 샘은 옛날에 명주실 한 꾸리가 들어갈 정도의 깊이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이 샘에서 목욕을 하면 잔병을 앓지 않고 피부병이 없어진다고 한다.

6)추성3리 신흥(新興)마을

신흥마을은 1979년 담양호의 건설로 도림리의 수몰된 마을 주민들이 이주해 와 형성된 마을이다. 1980년에 추성리에서 분구하였고, 1986년에 마을 땅을 개인적으로 분할해 주어 숲 부분이 잘리면서 지금의 마을이 되었다. 처음 이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추월산에 올라 가서 보면 배가 들어오는 항구 형국이라 항림이라 하려 했으나 젊은 사람들 다수가 새롭게 일어나라는 뜻의 신흥을 원하였다. 그래서 마을 원로들은 젊은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신흥마을로 명하였다. 추성마을 안동네는 숙종대왕 때 밀양박씨가 처음 입항하였다고 한다.

 

7)통천1리 박곡(泊谷)마을

박곡마을의 처음 입향자는 청주한씨 18세손 한록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3남 휴종과 왜전에 참여하여 금산전 등에 종군하였으나 전세가 여의치 않자 이순신 장군진으로 후퇴를 하려고 내려오다가 현 박곡리에 이르러 군사요새지임을 판단학고 주둔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전란이 끝나자 패전의 통한을 참지 못하고 왜적의 족적을 두 번 다시 밟고 갈 수 없다 하여 이곳에서 은둔생활 10여년을 한 게 입향의 계기였다. 이곳에서 79세로 생을 마쳤으나 그의 유업은 아들 휴종이 경기도 성남 선영에 이장하고, 본인은 선친의 요새지에 자기의 자인 휴(休)자와 같은 뜻의 박(泊)자를 써서 박곡이라 이름하고, 경기지방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청주한씨들이 자작일촌하고 살아 오고 있다. 혹은 처음 마을이름은 박씨가 사는 마을이다 하여 박실(泊實)이라 부르다가 마을이 번창하면서 인심이 좋은 곳이라 나그네들이 쉬어 간다 하여 박곡이라 불렀다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깥 족 마을’의 뜻인 ‘밖실’이 변한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국도변에 있는 ‘종방’은 1912년 미산정웅이라는 일본인이 수백 두락의 뽕나무밭을 조성하여 생사를 생산하는 종업원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15호의 농가가 살고 있다.

 

8)통천2리 매월(梅月)마을

매월마을은 매화낙지형 명당으로 오장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1686년 옥천조씨 한진이 승주군 주암면 구산리에서 살았으나 형이 일찍 운명하자 새터를 잡기 위하여 찾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오장산이 힘차게 솟아 있고, 매화꽃이 만발하여 있으며, 소나무 가지마다 백로들이 배꽃처럼 서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학유정이라 부르며 살았다 한다. 그 뒤 달성서씨가 이사를 오고 또 장성에서 진원박씨가 복정리를 거쳐 피난을 와 살았다. 이 3성씨가 오순도순 마을을 일구어 왔는데 본래는 마을을 서당골이라 하였다. 서당을 지어 글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810년 한학자인 서씨가 매화꽃이 만발하여 달빛에 반사된 경치가 아름답다 하여 매월이라 고쳐 불렀다. 또한 마을 앞동산에 매화가 많이 피어 화정산 혹은 꽃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 마을에는 매화나무 한그루도 남아 있지 않다.

 

9)통천3리 통천(桶泉)마을

통천마을의 입향조 이씨부인은 남편 박이남과 전북 김제에서 살다가 남편이 임란 때 출병하여 왜구들의 총탄에 전사하자 유복자만이라도 안정된 곳에서 양육하여 박씨의 대를 잇겠다는 마음으로 헤매다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오장산 기슭 양당골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100미터쯤에 바위배기 산이 병장하여 주위 풍치가 후손들의 만세영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통천마을이 이루어지기 전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속칭 안골이 있었다. 이곳에는 손씨 등이 살던 관설리란 마을이 있었는데, 기와집이 불야성시를 이룩한 부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전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때 이 마을사람들은 현 통천리마을로 이거하였다 한다. 그 후 광해군 때 나주임씨가, 인조 때에는 전주이씨가 들어 왔고, 기타 여러 성씨들이 들어왔다. 통천마을에서 장찬으로 가는 넓은 농토를 가리켜 강변들이라 부르는 것은 옛 어느 때인가 마을 근처에 강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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