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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봉산면 와우리(臥牛)·유산리(柳山)·제월리(齊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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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2  15: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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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우도농악 설장구 기능보유자 김동언 명인
   
▲ 봉산면 제월리 면앙정(전남도 기념물 제6호)
   
▲ 봉산면 유산리 마을 보호수
   
▲ 봉산면 신평마을 회관
   
▲ 봉산면 와우리 마을 전경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와우1리 와우(臥牛)마을
와우마을은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종 23년(1528) 서씨가 개척했다고 하는데 고증할 수 없다. 선조 15년(1582) 능성구씨 삼희가 능주에서 이주해 왔고, 1621년에 밀양박씨 인득이 광주를 거쳐 입촌하였다. 이후 광산김씨, 진주강씨, 삭녕최씨 등이 각각 이주하여 현재에 이른다. 1621년 경에는 마을 이름을 효치(孝峙)라 부르다가 지형이 와우명당일처(臥牛明堂一妻)임을 알고 ‘삼우치(三牛峙)라고 한데서 연유하여 와우리라 개칭하였다. 마을에 느티나무가 네그루 있는데, 한그루는 수명이 약 500년 되었고, 세 그루는 약 200년이 되었다. 대표적인 민속으로 농악놀이가 있는데 해방 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마을 전 주민이 참여하여 풍물놀이를 보름간씩 하였으나 산업화와 딸기 농사로 인해 점점 뜸해 졌다. 현재 우도농악(右道農樂) 설장구 (기능보유자 김동언)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2)와우2리 신평(新坪)마을
신평마을은 예부터 마을 앞 왕버늘나무 근처에 화방연이 있어 꽃같이 아름다운 동네라 하였다. 조선 성종 16년(1485)에 합천 송씨 집안이 입향하여 100여 호 정도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방화동(芳花洞)이라 불러 오다가 1682년경에는 택리(宅里)라 불렀고, 1802년경에는 효자리로 불렀는데 송시흥의 효행이 지극한데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개칭하기도 하였다. 그 후 남평문씨 집안이 약 50여호 자작일촌 하며 살았으나 자손들이 무정면과 서울 등지로 나가버리고 지금은 흔적이 없다. 그 후 현종 6년(1840) 평산신씨가 입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와우리에 편입되어 신평마을로 등재되었다. 신평마을은 고종 14년(1877)부터 신평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신평마을은 임란 때 없어져 버린 것을 마을회관 앞에 화방연을 복원하였다.

3)와우3리 봉학(鳳鶴)마을
봉학마을은 조선 숙종 16년(1690) 담양전씨가 입촌하여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 후 현풍곽씨, 전주추씨, 남평문씨가 입향하였고, 순조 15년(1815)에 김해김씨가 광주에서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부업리(扶業里)로 불렀는데 그 뒤 마을 뒷산이 봉학(鳳鶴) 모양으로 되어 있어 봉학마을로 개칭하였다. 봉학마을은 봉학의 서식에 알맞게 하기 위해 주변에 대나무 밭을 가꾸고 앞산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한다. 물 좋고 들이 좋아 농사짓기 편하니 예부터 부자 마을로 자타가 인정하는 마을이며, 살기가 편하니 자연 장수마을이 되었다. 천석골이라는 들 이름이 있을 만큼 수확이 좋아 들만 바라보면 만사태평으로 걱정할 것이 없는 마을이다. 마을의 대표적인 문화 유적인 관과정(觀科亭)에서 보면 담양 평야의 8할이 보인다. 수북, 봉산, 장성 진원면까지 보이지만 북쪽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과수원 쪽에서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고, 굴도 많이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새터 쪽은 불이 나서 모두 떠나 버리고 지금은 대밭이 되어 버렸다.

4)유산 1리 유산(柳山)마을
유산마을은 조선 광해군 12년(1620) 삭녕최씨 최준립이 전북 남원에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새로 이루었다고 전한다. 최씨의 아들들이 한 그루씩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지금도 마을 뒤편 정자 옆에 있는데, 수령이 300년 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이 이룩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영조 26년(1750)에 안동김씨가, 영조 46년(1770)에 초계정씨가 각각 이주해 왔다고 전한다. 유산마을에 삭녕최씨가 입향하면서 처음 부른 이름은 양산촌(陽山村)이었다. 그 후 마을 뒷산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이라는 갈마음수형(葛馬飮水形)이고, 당산 위에서 본 한쪽 산 모양을 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꾀꼬리집 모양이라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이라 하여 1810년대에 유산리로 개칭하였다. 버드나무가 마을 입구에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래 마을은 지금보다 더 위쪽에 있었는데, 도둑이 많이 들어 아래쪽으로 내려 온 것이다. 원래의 마을 터는 도둑이 많아 도둑골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수정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5)유산2리 마산(馬山)마을
마산마을은 조선 숙종 36년(1710)에 고령신씨가 전북 순창에서 이주해 와 처음 터를 잡았다. 그 후 영조 22년(1746)에 전주이씨가 마을이 양택으로 좋은 곳이라 후세가 복을 누리고 부귀할 것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입향하였고, 정조 24년(1800)에 광산김씨가 대덕면에서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산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의 모형이 말이 뛰어 가고 있는 형국이라 이곳에 터를 잡으면 자손이 번성하고 대대로 복과 부귀를 누린다고 했다 한다. 그리고 이 마을은 머리 부위에 해당하여 마을이름을 마산이라 칭하였다. 전주이씨 회안대군의 12세 손이 약 400년 전에 이 근방에 와서 보니 이곳이 제일 높고 환히 트여 안착하였다. 지형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수음형의 명당이라 일컬어 진다. 마을 앞 남쪽과 북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남쪽 바위를 여석, 북쪽 바위를 남석이라 칭하며 그 사이를 산림으로 조성하여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으나 백오심여 년 전에 자취를 잃고 말았다. 당산목이 팽나무는 식수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백 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크기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령이 많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6)제월1리 제월(齊月)마을
제월마을은 조선 헌종 15년(1849) 전주이씨 이태효가 일가 아홉가구와 함께 이주해 와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타성은 별로 없고 이씨가 일촌을 이루고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부친상을 당한 이태효가 3년간의 시묘살이를 끝내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산산이 나타나 이태효의 효심과 정성이 지극하여 이 터를 알려준 것이라 했다. 이 터는 운기상생의 터로 거기로 옮겨 가면 자손이 번영하고 부귀를 누린다 하였다 한다. 제월마을은 마을 옆산이 거북이 형국인데 그 꼬리 부위에 자리하고 있음에 연유하여 처음엔 구미동(龜尾洞)으로 불렀다. 그 후 1912년 호적부가 개편되면서 쓰기 쉽게 하기 위하여 지명 유래를 무시하고 자음만 따서 구미동(九尾洞)으로 하였다가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거북이 산의 상대편에 있는 제월봉의 산 이름을 따서 제월리로 개명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7)제월2리 서봉(棲鳳)마을
서봉마을은 백제 말로 추정되는 산 속 무덤에서 출토된 검과 철등자(鐵登子)로 보아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백제시대로 보이나 문헌이 없어 고증할 수는 없다. 조선 효종 원년(1650) 영암군에서 전주최씨 최예제가 입향한 후 순조 20년(1820)에 다시 김해김씨 김흥만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봉황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서봉이라 불렀다. 원형인 마을의 동산이 산맥으로 둘러 흐르고 그 너머로 넓은 평야를 지나 수북면에 위치한 투구봉이 보인다. 또한 지석묘가 서봉마을과 면앙정 사이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논밭에 묻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언제 나무가 심어 진지 알 수 없으나 마을이 있기 전부터 마을 앞에 느티나무 2그루가 서 있어 여름철에 햇볕을 가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2012년 볼라벤 태풍에 쓰러지고 말았다.

8)제월3리 마항(馬項)마을
마항마을은 면앙정 부근에서 선사시대로 추된된 지석묘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등이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조선 중종 39년(1544)에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지금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 후 평산신씨가 인조 8년(1630)에 처가인 이씨를 따라 이주해 왔고, 밀양박씨 역시 숙종 46년(1720) 처가인 이씨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고르게 살고 있다. 마을 뒤쪽의 산맥이 주봉산에서 연이어 마을 앞으로 뻗어 내려 왔는데 마을 앞산이 말의 목(項)에 해당된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마항이라 불렀다. 이러한 형국은 격물치지로, 이 마을 어딘가에 거부가 되는 양택지지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그 위치는 찾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는 당산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1982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당산나무의 수령은 약 270년 정도로 추정되며, 큰 것은 둘레가 약 6m이고 높이는 약 20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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