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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근세 호남의 대표 선승 해안선사“화두일념(話頭一念)에 들면 누구나 7일만에 깨달을 수 있다”
김관석 기자  |  wdy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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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7  15: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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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변산 내소사
   
▲ 해안선사 추모제(부안 내소사)
   
▲ 해안선사 비(碑)
   
▲ 해안선사 진영

근현대 호남 불교 큰 어르신...재가자들의 수행과 교육 여건 마련에 일생 헌신
무유정법(無有定法) 설파 몸소 실천...일생을 소박하고 무욕청빈한 생활로 일관
좋고 나쁜 것, 시비에 상관하지 않고 때와 연에 맞춰 대중의 근기에 따라 제접해

근·현대 호남 불교의 큰 어르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해안선사(海眼禪師)는 경봉스님과 함께 ‘東 경봉 西 해안’으로 불리며 선풍을 떨쳤던 선승(禪僧)이다.

스님은 1901년 음력 3월 7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아버지 김해 김씨 치권공과 어머니 은율 송씨의 3남으로 출생했다.

이름은 성봉(成鳳)이라 했으며, 커서는 봉수(鳳秀)라 불렸고 당호는 해안(海眼)이다.
10세를 전후하여 가까운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언행이 방정하고 두뇌가 총명했다. 14세 되던 해 변산 내소사에서 덕이 높은 한학자가 맹자(孟子) 천 독(讀)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필상(筆商)을 따라 한학자 고찬 선생을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내소사 중흥주였던 만허 선사에게 출가하고 불연을 맺게 되었다.

스님은 17세가 되자 호남의 대본찰인 백양사에서 두발을 깎고 송만암 대종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그해 백양사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오년 스님의 나이 18세가 되는 해 12월, 납월 팔일 성도절(成道節: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음력 12월 8일)을 앞두고 선원에서는 연례행사로 7일간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다. 스님은 학명 조실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생사의 간두에 서서 화두 일념에 자타를 몰록,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鐸鳴鐘落又竹?)
봉새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네(鳳飛銀山鐵壁外)
누군가 나에게 기쁜 소식 묻는다면(若人問我喜消息)
회승당 안에 만발 공양이라 하리라(會僧堂裡滿鉢供)

이것은 그때 당시 스님의 경계를 읊은 송(頌:깨달음을 묘사한 선시)이다. 여기서 봉이라 함은 스님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이때 7일간 용맹정진이야말로 생명을 걸어 놓고 벌인 한판 싸움이었으며, 스님은 마침내 승리자가 된 것이다.

스님은 1920년, 백양사 지방학림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돌아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하여 2년간의 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해 7월에 백양사에서 대선법계를 품수하였다. 이제 스님께서는 내외전(內外典:불교경전과 일반서책)을 두루 섭렵하였고 이미 심전개오(心田開悟:마음자리에 대해 깨달음)한 바도 있었으나, 정진의 고삐를 늦추려 하지 않고 더욱 갈고 닦기 위하여 1922년 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을 지나 중국으로 구도의 고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광할한 중국 천지에 널리 선지식을 참문하여 친견하고 탁마하는 한편 북경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연수하며 견문을 넓혔다.

1935년 스님의 나이 35세 되던 해 백양사 본말사 순회 포교사의 직책을 맡게 되자 이때부터 스님께서는 본격적인 화화중생의 보살도에 나서게 되었다.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밝은 선지에서 나오는 설법으로 때와 인연을 따라 청중의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하시니 스님이 가시는 법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후학들을 가르침에 있어 스님은 명쾌한 논리로 핵심을 설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러 해 수행을 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물건을 따라가기 때문(迷己逐物)이라며, 꾀꼬리가 울면 자기를 잊어버린 채 꾀꼬리 소리를 따라가고, 장구 소리와 노랫가락이 들려오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좇아가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스님께서는 일생을 소박하고 무욕청빈한 생활로 일관하였거니와 복색도 간편하게 입으셨다. 상의는 고름을 달지 않고 매듭 단추를 달아서 즐겨 입었으며 바지는 약간 짧게 해서 대님을 매지 않은 채로 입고 다니셨다.

스님께서는 언제나 무유정법(無有定法:진리하고 할 수 있는 정해진 법이 없다)을 설하셨고 몸소 실천하셨다.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 시비에 상관하지 않았으며 때와 연에 맞추고 정한 법 없이 대중의 근기에 따라 제접하였다. 어느 때는 엄하고 무섭기가 서릿발 같은가 하면 어느새 갈(喝:고함지르기)을 하기도 하고 선정에 드셨는가 싶으면 북 광쇠를 쿵쿵 치며 염불삼매에 취하기도 하셨다. 달이 밝으면 시를 짓기도 하고 다정한 도반을 만나면 밤을 새워 곡차를 마시기도 하셨다. 타고난 선풍도골이어서 70이 훨씬 넘어서도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이 맑고 고왔다.

1974년 음력 3월 7일 일흔 네 번째 맞이하는 스님의 생신임과 동시에 전등회가 창립된지 다섯 돌을 맞는 날 이틀 후인 9일 새벽, 아침 예불이 끝난 후 스님은 조실방에서 대중을 쭉 둘러보시고 열반을 암시하는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나는 오늘 갈란다. 내가 떠난 뒤에도 공부 열심히 하고 전등회를 잘 키워야 할 것이야.”
대중의 울음과 긴 침묵이 흐른 뒤 한 제자가 여쭈었다.
“스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다 하시지요.”
“생일날 가고 싶었는데 번거러울 듯 싶어 오늘 간다. 사리가 나오거든 물에 띄워 보내라. 행여 비(碑) 같은 것은 세울 생각 말아라.”
“큰 스님, 제자의 도리가 있는데 비는 세워야지요.” “굳이 세우려거든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 해라.”
이어 스님은 열반송이라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애타는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해 게송을 읊었다.

생사 없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으니
때묻은 옷이 떨어져 다하면 바로 이 달 밝은 때이니라
(生死不到處 別有一世界 垢衣方落盡 正是月明時)
내소사 단풍나무 숲길 왼편 정갈하게 단장된 부도밭에 해안선사 부도비가 있다.
부도비 뒷면에는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 없다(生死於是 是無生死)’라 적혀있다.

■ 해안 선사가 “7일만에 깨칠 수 있다”한 까닭은?
“7일 안에 깨우치라”며 단기출가와 용맹정진을 강조했던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은 일찍부터 재가자들의 수행과 교육 여건 마련에 헌신했다. 그러나 “7일만에 깨칠 수 있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믿기 어려운 말로 비쳐지기도 한다. 해안 스님이 굳이 7일을 강조한 뜻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정진을 오래 해야만 깨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견성은 단시일을 두고 결정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아무리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7일이면 도를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7일안에 깨치지 못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공부하는 사람의 정신자세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기간이 짧아서 깨치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해안집)

해안 스님은 자나 깨나 화두가 성성적적한 일여(一如)의 경지가 되면 1주일안에도 화두가 타파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스님은 생전에 “수행자는 오직 화두 일념에 사로잡혀 옆에서 뇌성벽력이 쳐도 듣지 못해야 하고, 찬 바람이 뼈속에 스며들어도 추운 것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러나 생명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그리하지 못한다”며 ‘크게 한번 죽는(大死一番)’ 용맹심을 절대적으로 강조했다./자료발굴·정리=김관석 기자


해안선사 낙도가(樂道歌)
 
이내살림 가난타고 사람들아 웃지마소
손에가진 주장자로 이리저리 활보하니
간곳마다 온곳마다 맑은바람 함께한다
크고작은 천지간에 넓고좁고 내집이라
 
집속에든 갖은보물 많고적고 내것이고
가다가다 자고자고 자다가는 가고가고
푸른산도 좋을씨구 바닷물도 좋을씨구
수풀속도 좋을씨구 거리중도 좋을씨구
 
웃음소리 좋을씨구 우는눈물 좋을씨구
극락세계 좋을씨구 지옥연화 좋을씨구
부처되어 좋을씨구 중생되어 좋을씨구
알고보니 좋을씨구 모르는놈 좋을씨구
 
영리하여 좋을씨구 미련하여 좋을씨구
고운놈이 좋을씨구 미운놈이 좋을씨구
깨끗하여 좋을씨구 더러워서 좋을씨구
밝고밝아 좋을씨구 어두워서 좋을씨구
 
곧고곧아 좋을씨구 구불구불 좋을씨구
크고커서 좋을씨구 작고작아 좋을씨구
모났다고 좋을씨구 둥글둥글 좋을씨구
위아래로 비어있고 좌로우로 막힘없네
 
옛과이제 한때이고 너와내가 한몸이라
가지마라 못붙잡고 오지마라 못막으리
나만아는 이경계를 웃어볼까 울어볼까
구름잡아 병풍이요 해와달로 촛불이라
 
솔바람은 거문고요 대수풀은 젓대로다
간수물은 흘러흘러 무정곡을 불러주고
뭇새들은 곡조맞춰 무생가로 화답하네
이리좋은 자연경관 친구에게 못주도다
 
산에올라 나물캐고 바다나가 고기잡기
들로가면 김을메고 사거리에 장사하기
물에들어 발씻으니 달그림자 흔들리고
짝손으로 소리치니 메아리가 답을하네
 
베고프면 밥을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피곤하면 누워자고 봄이오면 괭이들기
겨울오면 도끼들기 이렇듯이 가고가고
이렇듯이 자고자고 이렇듯이 살고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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