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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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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7.13  11: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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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위치한 한국가사문학관. 이곳에는 담양권 가사 발취 18편을 비롯해 가사문학 관련 유물 5,590점이 소장되어 있다.)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도 부른다.
본지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실시되는 기획취재 일환으로 도립 남도대학 최한선 교수(문학박사)의 자문을 얻어 가사문학의 산실이자 호남 가단의 무대인 담양의 가사문학을 재조명하고 가사문학의 뿌리와 몸체 그리고 가지를 찾아보고자 한다.(편집자)


1. 연재에 들어가며


조선왕조가 건국의 터전을 다질 무렵인 15세기는 사대부들의 활동이 눈부시게 드러났고 자연을 즐기며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기풍이 사회전반을 휩쓸었다. 그래서 성종1년(1470)에 나온 賞春曲이나 성종6년(1475)에 이인형이 지은 ‘梅窓月歌’는 시골에서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는 사대부의 풍류생활을 노래한 것들이었다.

이렇듯 성종 때까지만 해도 聖王偉業의 은덕에 힘입어 문물이 크게 일어나고 사대부들은 과거에 급제한 다음에는 벼슬길에 나아가 나랏일에 직접 참여했고 평생토록 임금을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러다가 늙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 책, 술과 벗들 속에서 태평세월을 노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연산군6년(1500)부터 선조32년(1599)까지 한세기 동안에 국내정세는 급격한 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연산군 때 비롯된 정치적 갈등은 여러 차례의 士禍로 번지면서 마침내 조선사회의 암적 존재로 일컬어지는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에 사대부들은 승부의 세계에 부심하여 집권당이 되는 경우에는 온갖 권세를 누릴 수 있었지만 집권에 실패하게 되면 권좌에서 쫒겨나는 것은 물론 謫所에서 유배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뜻있는 선비들은 환해풍파에 휩쓸리는 것을 꺼려해 山水 좋은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자연을 즐기며 隱逸生活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歌辭가 대부분 隱逸과 流配歌辭로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流配歌辭는 조선조 당쟁의 산물로써 사대부들의 가장 쓰라린 생활감정의 표출이었다. 그 내용은 유배지에서 겪게 되는 온갖 고초와 고독감 속에서도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은 불변하여 한결같이 忠臣戀主之詞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流配歌辭들에는 작자의 패배의식과 좌절감이 전편에 넘쳐있기 때문에 泣訴, 哀怨, 傷心 등이 그 주조를 이루지만 한편으로는 체념이나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임금에게 나아가려는 의지력이 여운으로 남는 것이 특징이다.

流配歌辭의 첫 작품으로는 연산군의 戊午士禍 때 順天配所에서 조위(曺偉)가 지은 ‘萬憤歌(만분가)’를 들 수 있다. 이 가사는 이가원(李家源)의 연구를 거쳐 비로소 알려졌다. 만분가는 1503년에 지어놓은 작품인데 그후 많은 유배생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중에서도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뒤 김춘택(金春澤)의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으로 이어지고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과 안조원(安肇源)의 만언사(萬言詞) 등에 그 영향이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이서(李緖)의 낙지가(樂志歌)에도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낙지가의 저자 이서는 태조의 6세손이었으나 역모혐의로 일가가 화를 입게 되어 담양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중종18년에 낙지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철의 사미인곡은 선조18년에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척을 받고 경기도 고양을 거쳐 전남 창평에 물러나 있은지 3년만인 선조21년(1588)에 지은 작품으로 한 여인이 낭군을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처지에 기탁하여 자신의 소회를 읊은 忠臣戀主之詞로써 유교윤리의 발원이라 할 수 있다.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을 지은 뒤를 이어 아직도 미진한 심정을 다시 노래한 것인데 문답체 형식의 가사로써는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이었다.

정철의 이 두 작품은 만분가의 영향을 받아 유배문학의 계통을 잇는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러한 유배가사의 내용이 풍부한 문학성을 발휘하게 된 원동력에 대해 학자들은 타향에서의 기약없는 생활과 그로인한 이국적 정서와 회향의 정으로 보고 있으며 이같은 외적 조건이 적객(謫客)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심리상태에 가미되어 유배문학이 생기게 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본지는 歌辭의 曉示 賞春曲을 탄생시킨 칠보문풍의 본거지이자 남도풍류의 일번지로 불리우는 태산풍류의 현장인 정읍 칠보면을 시작으로 무등산 원효사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산풍류와 적벽풍류, 시단풍류, 강호한정의 풍류 등을 호흡하고 정읍권, 담양권, 장흥권에 이르는 가사풍류의 외연과 내연을 살펴본 뒤 가사풍류의 전통과 미래를 고찰하는 3개월의 여정을 시작한다.

아울러 본지는 기사의 정확도를 높이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사문학 분야의 전문가인 도립 남도대학 최한선 교수(문학박사)를 자문위원으로 위촉, 자문과 검증을 받기로 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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