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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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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7.20  11: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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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 '상춘곡'의 저자 불우헌 정극인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3월 선생이 기거했던 원촌마을에 동상을 세웠다. 동상 뒤쪽에는 1984년 당시 송하철 정읍 군수가 세운 상춘곡 가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도 부른다.
본지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실시되는 기획취재 일환으로 도립 남도대학 최한선 교수(문학박사)의 자문을 얻어 가사문학의 산실이자 호남 가단의 무대인 담양의 가사문학을 재조명하고 가사문학의 뿌리와 몸체 그리고 가지를 찾아보고자 한다.(편집자)


2. 남도풍류의 일번지 태산풍류


'유상곡수연의 현장 유상대'


장맛비가 쏟아 붓는 가운데 남도풍류의 일번지라 불리우는 태산풍류의 현장을 찾아 길을 나섰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현장 유상대(流觴臺)와 가사의 효시라 일컫는 상춘곡의 탄생지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정읍시청에서 15분 남짓 차를 달려 칠보면 시산리 577번지 유상대 터에 다다랐다. 지금은 아무 흔적 없이 여염집 마당인양 덤덤히 자리하고 있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인의 관심과 기대속에 발굴작업이 한창이었다. 무심한 세월 탓에 아쉽게도 유상곡수연의 현장을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인근에 자리한 유상대유지비나 발굴작업을 위해 해체된 감운정 등이 이곳이 유상대 터임을 입보하고 있다. 감운정(感雲亭)은 100여년 전에 고운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여 그가 즐기며 놀았다는 유상대 터에 지은 정자다.

당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고 귀국, 태산(泰山/현재의 칠보)에서 8년동안 군수로 재임한 고운 최치원 선생(857~?)이 검단대사와 유상곡수를 즐긴 곳으로 전해지는 유상대는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사적 제1호 포석정(鮑石亭)과 비교된다.
포석정은 신라시대의 왕족과 귀족들이 돌홈에 물을 흐르게 하고 잔을 띄워 유상곡수연을 하던 정원유적으로 신라 천년의 찬란했던 영화가 경애왕의 타락한 향연으로 종말을 고한 역사적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9세기 최치원에 의해 만들어진 유상대는 포석정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됐지만 그 규모는 훨씬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돌홈을 파서 만든 포석정이 인공적 성격이 짙은데 반해 산자수명한 칠보천(동진강 상류 반곡천)가에 세운 유상대는 동진강물을 끌어들이는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칠보8경에 꼽힐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가 당시 태수로 있던 칠보면소재지, 치소가 있던 무성리의 유상대 터는 칠보천과 그 지류인 고운천이 양쪽으로 끼고 흐르는 솔밭 사이에 물길만 잡아 돌렸으면 곡수거(曲水渠)를 차리기에는 충분한 지형이다. 출신성분도 그렇고, 6두품의 해외파로서 권력의 핵심부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변방의 주요 관직을 섭렵했으므로 상영(觴詠)의 재미를 누구보다 만끽했을 터이다.

유상곡수의 기원은 서기 353년 중국 동진(東晋)시대 절강성(浙江省)에서 명필 왕희지 등 당대의 학자들이 난정(蘭亭)이라 불리는 곡수(曲水)를 만들고 회동한 것에서 비롯된다. 당연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대가(大家)는 왕희지(307-365)로 치는데 그는 진나라 묵객으로 붓과 청담과 채약(採藥)을 즐기며 산수간에 놀았다. 그의 대표작인 ‘난정서(蘭亭序)’는 41인의 명류들과 회계난정에서 유상곡수연을 하면서 남긴 것이다.

왕희지는 46세 되던 353년 절강성의 비경인 회계 난정에서 상영(觴詠)했다. 이 난정과 유상곡수거는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나라(奈良)에도 그 터가 있음을 보아 동양삼국에선 보편화된 청유(淸遊)인 듯하다.

칠보산은 노령산 끝자락에 걸려있는 명산으로 이 안골은 명당 터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삼봉 정도전의 세장산이 있는가 하면 여산 송(宋)씨의 문맥과 무맥, 승맥이 창창함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한다. 단종비 송씨의 탯자리도 이곳이다. 피향정(披香亭)이 있는 구 태인에서 8km, 칠보산 자락 밑의 안마당이 바로 무성서원이 있는 무성리다. 칠보면 소재지인 시기리,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이 있는 원촌(院村), 태인향약(古顯鄕約)이 완성된 ‘고현동각’이 있는 삼리, 여산 송씨 집성촌인 송산리가 유상대를 중심으로 환촌(環村)을 이루고 겹수로 휘둘러 나가는 물위로 무성교, 송산교, 유상대교 등이 걸려있다. 칠보가 호남 3대 명촌 중의 하나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무성서원과 유상대 사이를 끼고 흐르는 반곡천은 동진강의 최상류로 지금은 칠보댐의 도수로가 섬진강을 가로막고 있고 도수로 터널을 뚫어 그 물줄기가 칠보, 정읍, 배들, 백산 평야로 흘러들고 있다.

이 곳에서 정통가문과 문중을 형성한 송씨 인맥만 보더라도 덕숭문중(수덕사)의 경허, 만공 만암 등 승맥(僧脈)과 27명의 장성을 배출한 무맥(武脈), 정극인, 송세림 같은 문맥(文脈)들이 이 선풍의 물줄기에서 솟았다. 특히 정극인, 송세림 등의 문풍이 유맥(儒脈)을 추슬러 칠보문풍으로 깔끔하게 정제되어 ‘태인향약’ 등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이 칠보문풍이 다름아닌 태산풍류(泰山風流)다. 태산풍류는 다시 남도의 무등산 계곡으로 뻗쳐 계산풍류(溪山風流) 즉 원효문풍과 적벽풍류(赤壁風流)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곡수거(曲水渠)의 상영(觴詠)은 최치원의 유상곡수연에서 태인향약의 정극인(丁克仁)을 거쳐 남도의 자연원림(自然園林)으로 그 장소가 바뀐다. 이는 16세기 사림문화(士林文化)가 본격 등장하면서 면앙정가단의 송순(宋純)과 정철(鄭澈)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남도풍류는 최치원의 태산풍류에서 칠보문풍을 타고 계산풍류인 원효문풍과 적벽풍류로 굳혀졌다 할 것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민족신화의 근원인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원림이 그 기원이며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고신도(古神道)가 대모신앙체계를 형성하며 선불유도로 습합, 민족선풍으로 그 기상을 드높인 것이다. 때로는 미륵정토의 선풍으로 청유선풍(淸儒仙風)으로 바람을 타고 일어남과 같다. 이른바 이것이 국토에서 마지막 살아남은 섬진강에서 칠보산을 타고 넘어 섬진강 상류로 불어내리는 산바람, 강바람이며, 통일신라 때부터 완전한 교육제도로 정착된 풍류황권(風流黃券)이다.

남도의 지세, 남도의 역사, 남도적인 삶은 그 자체가 산바람 강바람이며 그것이 풍류황권(風流黃券)이라는 단어가 된다. 여기에다 화조월석을 포개면 다시 ‘風流黃券 花朝月夕’이 된다. 풍류의 원조 최치원이 말하는 현묘한 도리란 태백삼위의 고신도에서 국가체제가 구성되는 풍류황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정신을 통합한 이 대목이 핵을 이루는게 아니었을까? 또 화조월석(花朝月夕)이란 말은 남도의 신흥종교 연구자들이 곧 잘 쓰는 말이기도 하다. 수반(水盤)위에 천도복숭아를 굴리고 노는 이 즉흥성과 구강성은 동시에 소모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으로 분출된다. 그래서 멋을 아는 선객(仙客)들은 하나씩의 큰 상징체계를 갖는다.

옥녀봉에 금가락지(일원상)를 씌우면 원불교요, 미륵님의 배꼽(금산사 미륵 장육존상)에 선(仙)을 내세워 금가락지를 걸면 배꼽철학이 되는 증산도의 이치와 같다. 청학동의 갱정유도(更正儒道), 벌교읍의 나철(羅喆)이 주도한 대종교 등도 다 그렇다. 이는 남도 산수정신에서 솟아난 화조월석(花朝月夕)이다.

아닌게 아니라 남도의 종교는 계룡산계의 정감록에 찌든 왕동설보다는 화조월석 그대로인 바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달이 뜬다. 선풍을 타는 가락이 있고 활달하고 생명의 희열이 끓어 넘친다. ‘날씨가 좋으니 그냥 집에는 못 있겠다’ 그래서 미친 끼는 발동하고 미륵선풍, 유도강산, 화조월석에 때맞추어 문밖을 나서고 극에 달하면 산 위에 정자를 짓고 발을 씻는 것이 아닐까?

칠보천과 고운천(반곡천)이 합수되는 지점의 유상대를 따라 내려가면 그 하류 지점 배들평야에는 고부 혁명의 발원지인 만석보(萬石洑)의 비가 서 있다. 이 또한 태산 풍류가 마지막 꺾인 자리이기도 하다. 동시에 호남 현대정신으로 요약되는 농민정신이 무참히 꺾인 자리며,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면 동인과 서인의 패권주의로 정여립이 희생되면서 호남 주기좌파이론이 참패한 무등산 원효계곡인 그 계산풍류의 오점을 이곳에서도 또 한번 읽는다.


'정극인(丁克仁)과 상춘곡(賞春曲)'


원촌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며 형형색색의 꽃들이 어우러진 자그마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정극인 선생의 동상과 함께 상춘곡 가사비가 자리잡고 있다. 그 뽀짝 옆에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취재진에게 안내를 자청한 안성열 관장은 “길 건너에 보이는 유상대와 주변의 정자만 보더라도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짐작할 만 하지 않느냐”며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이 불우헌으로 하여금 불후의 명작 상춘곡을 만들어냈다”고 전한다.

정극인은 유상대에서 청유(淸遊)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남도풍류의 맥을 검약과 절제의 선풍으로 이끌어 ‘태인향약’을 만들었으며 가사문학에서 상춘곡(賞春曲)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다. 상춘곡은 원효문풍의 면앙정 가단에 많은 영향을 끼쳐 면앙정가(송순)와 성산별곡(정철) 등을 잉태시켰다. 그는 상춘곡에서 풍류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미칠가. 천지간 남자 몸에 날만한이 하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말할건가. 수간모옥을 벽계수에 두고 송죽을 울리어 풍월주인(風月主人)되어셔라. 엊그제 겨울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세우중(細雨中)에 푸르도다.)

그는 ‘요승 행오소’로 귀양살이를 하다 풀려난뒤 문과에 급제해 잠시 관직에 머물다가 단종이 폐위되자 고향인 경기도 광주 두모포(현 성동구 옥수동)로 가지 않고 처가인 태인(현 칠보면)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불우헌’이라 택호하고 집앞에 흐르는 물을 필수(必水)라 명명했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향리의 30여 호 자제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으니 이것이 태인향약의 시초다.

원촌 윗마을인 고현동각(古顯洞閣)에서 성종 6년 을미 10월에 이루어진 태인향약은 우리나라 민간 향약의 효시일 뿐 아니라 호남 4대 명촌 향약인 구림, 광산, 나주향약보다 먼저이고 퇴계의 고향인 예안(禮安)향약에는 81년이나 앞섰다. 그는 풍교(風敎)에 힘쓰다 81세로 생을 마감한 후 무성서원에 고운 선생과 함께 배향됐다.

生祠堂으로도 불리우는 무성서원은 다른 사당과는 달리 생존해 있는 최치원 선생을 배향한 사당으로 최치원 선생을 주벽으로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등 6명의 유림을 배향했다. 숙종 22년(1695)에 사액되어 대원군 철폐령 때도 전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담장 앞엔 고을 명현들의 송덕비가 즐비하다.

무성서원을 지나 성황산 자락에 자리한 정극인 묘소로 가는 길목에 송세림(宋世林)이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밭 가운데 서 있는데 이 석탑 밑에서 송세림의 일기가 나왔다고 한다. 이 석탑을 뒤로 잠시 올라가니 정극인 선생을 비롯한 압해정씨 조상을 모신 영모제(永慕齊)가 보이고 그 윗편에 정극인 선생 묘소와 부인 구고 임씨(林氏)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불순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취재진을 안내하던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안성열 관장이 “경기도 광주 태생인 정극인 선생이 이곳 칠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정극인 선생의 백부 정 인이 태인현감으로 재직 중 이 마을에 살던 林씨 문중의 참한 처자를 발견하고 조카인 극인과 혼인하도록 주선하였다”고 귀뜸해준다.

옥룡자(도선)가 유산록에서 말한 ‘요호가 회포(回抱)하며 안산(案山)이 세겹으로 겹쳤으니 문벌, 재벌, 왕태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나도록 성황산 자락은 그 눈부신 정자들을 한 탯자리에 휘감고 있다. 한 개의 군(郡)도 아니고 고작해야 원촌리라는 한 마을 안에 산 겹겹 물 겹겹, 이처럼 많은 정자골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성황산 자락에 자리잡은 열두개 정자 중 동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송정(松亭)은 7광(七狂) 10현(十賢)이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던 곳이라 한다. 광해군의 폭정이 극도에 이르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상소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모여 자적(自適)의 세월을 보내니 세상에서 이들을 가리켜 칠광, 십현이라 불렀다. 칠광은 김대림, 김응찬, 김감, 안치중, 송민고, 이상향, 이탁이며 10현은 김응찬, 김감, 안치중, 송민고, 이탁, 김관, 김렴, 김급, 김우직, 양몽우 등이다. 또한 한말의 대유학자 최익현이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와 이곳에 와 격문을 발하고 의병을 모았던 흔적도 덤으로 얻어왔다.(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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