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 어귀 능파각 아래로 몇 구비인지조차 가늠못할 힘찬 물줄기가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영기서린 가람을 휘감고 돈다. 경찰충혼탑이 서있는 충의문을 비껴오르면 3층석탑을 가운데로 연못이 둘러있다. 이 연못 윗편에 동리산 태안사라는 현액이 큰 글씨로 걸려있는 일주문이 보이고 이곳이 태안사의 시작이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 (742년)에 신승 3인에 의해 중창되었다. 이후 문성왕 9년 (847년) 혜철 국사에 의해 선종사찰로 거듭 개산되어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뒤에 고려 태조 때 혜철대사가 머물면서 132칸의 건물을 짓고 대규모 절을 이룩하여 동리산파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가 모두 이 절의 말사였다. 1925년에 최남선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평했다. 6.25 때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15동의 건물이 불탔다. 그 뒤 다시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혜철국사 사리탑(보물 273호), 광자선사탑(보물 274호) 등 보물 5점이 있으며 동리산 계곡 절묘한 자리에 세워진 능파각(지방유형문화재 제 82호)도 볼만하다.
가사문학의 본류(本流)를 찾아 나선 취재진은 태산풍류의 현장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불교개혁의 본산 남도산문(南道山門)으로 향한다. 신라 1000년을 뒤엎고 고려를 건국케 한 동력인 선종산문(禪宗山門)의 개혁성향은 본디 가사의 원류인 풍류의 일맥으로 고려를 넘어 조선조까지 이어지면서 활발한 사림문화를 꽃피웠던 사림정신을 태동시키기에 이른다. 취재진은 통일신라 말엽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했던 선종(禪宗)의 교세확장이 가장 앞섰던 전남지역에 개창된 3개山門(가지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을 찾아 불교개혁의 현장을 둘러보고 禪宗山門의 成立배경과 思想 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3. 禪宗山門의 成立과 思想
신라 하대에는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불교계 또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곧 선종(禪宗)의 전래가 그것이다. 신라에 禪 思想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9세기 전반부터였다. 서당 지장(書堂 智藏)의 심법(心法)을 전해 받은 도의(道義)가 821년에 귀국했는데, 이는 선종을 신라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교종의 심한 비판에 직면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도의보다 5년 뒤인 826년에 귀국한 홍척(洪陟)은 흥덕왕 등 중앙의 왕실세력의 후원을 얻어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풍(禪風)을 진작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禪사상은 신라의 지방사회에 급격하게 전파되어 9세기말 10세기 초반 경에는 화엄종을 능가할 만큼 그 세력이 팽창되기에 이르렀다.
전남지방은 선종의 교세확장이 가장 앞선 지역으로 선종의 3개 산문이 개창되었던 곳이다. 신라말 이 지역에서 유명한 선종사찰로 장흥 보림사, 강진 무위사,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 광양 옥룡사, 구례 연곡사를 손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보림사와 무위사는 가지산문, 태안사와 옥룡사는 동리산문, 쌍봉사는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이었다. 선종 9산문 가운데 3개 산문이 이 지역에 중심도량을 마련한 것은 전남지역이 선종의 요람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지산문은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체징(體澄)에 의해 개창됐으며 체징은 신라에 남종선을 처음 전한 도의와 그의 제자인 염거의 선풍을 계승했다. 도의의 선종사상은 초기에 조사선을 성립시키면서 교학불교, 특히 화엄사상을 비판하는 경향을 지녔다. 의상계의 화엄사상이 유행한 지역인 설악산의 진전사를 중심으로 한 도의의 선풍은 화엄의 논리를 극복하기위해 오히려 의상계 화엄종을 크게 의식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것과의 교섭문제를 생각게 하였던 것이다. 체징은 이러한 도의의 선사상을 계승했다. 그가 859년(헌안왕 3년) 왕의 요청으로 화엄종 사찰이었던 보림사에 주석하게 되면서 선종사찰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861년(경문왕 1년)에 이를 더욱 확장하여 가지산문을 융성케 했다.
가지산문은 조사선의 수립이나 교종불교를 비판하는 측면에서 일정부분 한계를 지녔지만, 그 후 우리나라 불교사상이 전개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지산문의 후원세력은 헌안왕과 많은 재물을 희사하여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주 장사현, 부수 김언경, 망수댁, 이남댁의 금입댁(金入宅)이었다. 체징의 문하에는 영혜, 청환, 의차 등 8백여 명이 있었다. 당에 들어가 조동종을 전해온 형미(864～917)도 그의 제자였다. 형미는 당에서 귀국할 때 서남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한 왕건의 도움에 힘입어 왕건과 연결됐다. 왕건은 무위사에 주석하고 있던 형미를 데리고 태봉의 수도로 돌아왔으나 형미는 왕건이 즉위하기 직전인 917년 궁예에게 피살되고 만다. 친왕건파였던 형미가 궁예의 무도함을 비난한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형미의 피살은 선종산문과 지방호족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주었다. 형미의 비문에 그의 죽음을 “개울과 연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인과 속인이 모두 울음을 삼켰고 사람과 하늘이 그 빛을 변하였다”라고 한 것은 그 당시의 정경을 잘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으로 결국 궁예는 민심을 크게 잃었으며 반대로 왕건의 추대를 재촉한 결과가 되었던 것 같다.
동리산문은 개산조 혜철(785～861)이 814년(헌덕왕 6년) 입당하여 서당 지장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839년(문성왕 1년)에 귀국하여 문성왕의 후원 아래 개창되었다. 혜철의 문하에는 여(如)와 그의 제자인 윤다(允多 : 864～945)가 계속 곡성 태안사에 주석하였다. 혜철의 제자로 동리산문의 방계인 도선(827～898)과 그의 제자인 경보(869～947)는 광양의 옥룡사에 주석하였다. 도선은 속성이 김씨이며 전남 영암지방에서 출생하여, 화엄학을 배운 뒤 선승(禪僧)이 되어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전남지방을 무대로 하여 살았다. 광양의 옥룡사는 37세 때부터 입적할 때까지 35년 간이나 주석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 옥룡산문을 개창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특히 경보는 후백제의 견훤과 연결되었다. 견훤이 경보가 중국에서 귀국하자 전주에 머무르게 하면서 “우리 스승을 만나기는 비록 늦었으나 제자되는 것을 어찌 늦추겠는가”할 정도로 적극적인 연결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동리산문의 선사상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가졌는데, 하나는 유식사상의 포용이요, 다른 하나는 풍수지리 사상의 수용이었다. 사자산문은 도윤(798～868)이 남전보원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년)에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선풍을 드날림으로써 비롯되었다. 쌍봉사에 세워진 철감선사 도윤의 부도탑은 신라 선종미술의 극치를 이룬 예술 조각품으로 오늘날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제자 절중(折中 : 826～900)은 강원도 영월 사자산에 옮겨가 흥령선원에 주석하면서 사자산문을 개창하였다.
또한, 선종산문(禪宗山門)은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가지산문은 헌안왕 대에 그 후원자인 김언경이 사재로 철 2,500근을 내어 비로자나불상을 주조하여 대적광전에 봉안하였고, 망수댁, 이남댁으로부터 금 160푼과 조 2,000곡을 공출하여 그것을 장식했다. 또 경문왕대에는 보림사쌍탑을 김언경이 조성하기도 했다. 동리산문은 872년(경문왕 12년)에 세워진 동리산의 혜철대사비문에 의하면, 당시 태안사에는 2,939석 4두 2승 5합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전답이 494결 39부였고, 좌지가 3결, 하원대가 4결 72부, 시지가 143결, 염분이 43결이며, 그 밖에 노가 10인, 비가 13인, 복전이 40인이었다. 이와 같이 선종산문은 후원세력의 지원 아래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장원을 형성하여 사원경제의 기반을 확립했다.
이와 같이 전남지역은 선종 발흥의 요람지가 되었는데, 그 까닭은 주로 남중국에 들어가서 유학하던 선승들이 무주 일대의 서남해안으로 귀국했기 때문이다. 903년 왕건이 나주를 정벌함으로써 서남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자 선승들은 왕건의 도움 없이는 귀국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선승들은 왕건의 보호를 받으며 서남해안으로 귀국함으로써 자연히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된다. 왕건은 선승들이 호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는 교화력이 적지 않음을 간파하고 선종세력과 연결된 호족세력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고려로의 통일을 도모했던 것이다.
선승들은 대게 육두품 이하 출신으로 진성여왕 이전에는 왕실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었으나 점차 지방호족과 연결되어 가는 추세였다. 선종사찰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경영에 지방호족이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후삼국시대의 선정 승려들은 대부분 왕건과 연결을 맺고 그에게 정치이념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호족을 그에게 연결시키는 매개 역할을 담당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주장, 교종의 논리를 초월해 불성을 자기 마음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가졌다. 선종은 교종의 전통적인 귄위를 부정하면서 불성을 누구에게나 내재된 것이라 함으로써 자기 마음속의 불성을 깨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승들은 경전에 의하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여 좌선을 행했다.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 내재적 불성을 발견하려는 선종사상은 곧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것은 중앙정부의 거추장스러운 간섭을 벗어나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취항과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신라 하대의 선종 승려들은 대개 교종 특히 화엄종의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한계를 비판했지만, 그러면서도 화엄학을 겸수했던 선승 또한 적지 않았다. 이는 선종에 귀의하기 이전에 화엄학을 익혔던 선승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선종 수용 초기보다 신라말에 이르러서 화엄학을 익혔던 선승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화엄학과 선사상이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종 수용 초기보다 신라말에 이르러서 화엄학을 겸학한 선종 승려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선종과 함께 교종이 병립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선사상의 전래 및 수용은 기존의 불교계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지만, 이 시기에는 화엄사상과 선사상이 공존하면서 갈등이 있었고 또 상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당시의 불교계의 흐름은 기존 교종의 한계, 즉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벗어나 더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 선종에 의해 이루어졌고, 또한 이에 자극 받아 화엄종도 새롭게 변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세력관계에는 약간의 우열이 있고 갈등도 있었지만 선종과 화엄종이 공존했던 것이다. 특히 신라 선종사찰에서는 중국과 달리 불전(佛殿)을 세우고 주존불(主尊佛)로 화엄종의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다. 이것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신라 선종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불교의 신라적 전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0세기 초에 이르면 선종은 화엄종을 능가해서 크게 확대되어 간다. 9세기 중반 이후 국사(國師)에 책봉된 승려는 모두 선종 승려였다. 이와 같이 선종이 크게 확대된 배경은 어디에 기인했을까? 이것은 불교의 내적문제와 외적인 문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외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지방호족뿐만 아니라 왕실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급격히 성장했다는 것을 들 수 있겠고 내적 요인은 중국 불교의 영향과 신라 화엄종의 문제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회창연간(會昌年間 : 814～846)에 일어난 폐불사건에도 선종은 타격이 적었는데 이것은 신라 입당승(入唐僧)들이 선종에 경도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불교 내부의 자체 문제와 관련지어 보면 이론에 치우치고 관념적인 경향에 흐르던 신라 하대 화엄종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선종이 유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글 한명석 기자 /사진 서영준 기자 / 자문 최한선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