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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12)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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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0.09  15: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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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는 그의 전 생애 중 북상문제를 포함한 여러 사정으로 20여년 귀양살이를 했고 19년간 은거 생할을 했다고 한다. 고산이 51세 때 평생을 은신하고자 결심하고 탐라로 남하하던 중 보길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배에서 내려 1.5Km쯤 가면 孤山이 보길도에 정착해 조영한 당대 최고의 원림인 세연정에 이른다. (사진= 보길도 세연정 전경.)





12. 歌辭文學과 詩歌文化





詩歌文化란 詩와 歌辭 등 조선 중·후기의 문학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시가문화권이란 당대(조선 중기와 후기)의 詩와 歌辭문학이 창작된 공간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탄생지, 성장지 및 활동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문화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공간은 우리 문학사에서 무등산을 중심으로 특히 발달된 모습을 보이는데 중앙에서 멀리 비켜 선 변방지역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융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시를 비롯하여 가사에 능했던 인물들의 생활공간인 누정이나 원림이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 당대인들의 사상과 생활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음은 실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시가문학 관련 유적은 면앙정을 비롯해 식영정, 송강정, 환벽당 몽한각, 무등산 남쪽의 적벽, 원효계곡 등으로 특히 무등산은 시와 가사문학 창작의 큰 배경이 된다.



광주호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무등산의 아름다운 자태와 계절마다 색다르게 변모하는 모습, 그곳에서 시작하여 담양의 뜨락을 적시는 원효계곡의 물줄기는 당시의 선비들에게 詩心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흥을 한시와 가사로 풀어내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무등산 자락은 시와 가사문학의 창작지이자 창작자들의 주요 활동 공간으로서 위치를 지니기 때문에 그동안 歌辭文學에 국한해 歌辭文學圈으로 불러왔던 지역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폭을 넓혀 詩歌文化圈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 근거로 당시대의 선비들의 삶이 시와 문장을 통해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승계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출사했던 방식 속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지만 특이한 점은 그들의 시와 문장이 단지 출사만을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학문을 이루고 의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와 가사 등의 문학이 태동되었다는 점이다. 밀접된 한 지역에 단일한 시와 가사가 한꺼번에 숲을 이루는 경우는 사실 전국적으로도 특이한 경우에 해당되고 아울러 이 지역 선비들의 사상적 표현형태를 보았을 때 詩와 歌辭를 통해 그들의 삶이 표출되었고 이와 연관된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가사문학이라는 한 장르에 국한시키지 말고 보다 폭을 넓혀 이 지역을 詩歌文化圈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시가문화권은 강릉이나 충청도의 화양동, 경북 안동, 완도 보길도 등 곳곳에 위치해 지역간 변별력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문화권을 사람에 중심을 둔 '사림문화권'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그들의 의식 저변에 깔린 의로운 행동에 초점을 두고 '의향문화권'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건축과 조경에 중심을 둔 '원림문화권 혹은 정자문화권'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주장들이 각각 상충하여 존재하고 있는 상태다.



이 지역의 대표적 詩人은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이며 장성의 하서 김인후, 장흥의 기봉 백광홍, 옥봉 백광훈 등을 거쳐 17세기 自然詩歌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해남의 윤선도로 이어진다.



흔히 말하기를 歌辭는 서사적 성격이 강한 반면 한시와 시조는 서정적 경향이 강해 문학사적 측면에서 보면 상호 보완적 관계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詩가 흥하면 歌辭가 쇠하고 歌辭가 흥하면 詩가 쇠했으나 孤山은 歌辭가 흥할 무렵 고집스럽게 詩를 써온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번호는 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 마지막 편으로 속칭 '광나장창(광주·나주·장성·창평)'으로 대별되던 가사문학권의 범주를 제2가사문학권으로 불리우는 장흥과 강진, 해남, 완도를 아우르는 이른바 시가문학권으로 외연을 넓혀 가사와 함께 당대에 동류 되었던 한시, 시조의 발달사를 함께 고찰해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으로 판단, 17세기 自然詩歌의 양상, 그리고 역사적 성격과 함께 당대 自然詩人의 대표격인 孤山 尹善道를 중심으로 취재 방향을 잡았다.





자연시가의 역사적 성격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조선조 시가문학의 핵심은 역시 사대부 중심의 이른바 江湖歌道 혹은 溪山風流라 일컬어지는 자연시가였다. 조선조의 자연시가는 당쟁을 피해 숨은 선비들의 자연친화의 산물로서, 賞自然의 풍류 속에서 성리학적 규범의 우주적인 보편성과 영원성을 환기 음미하는 태도를 전형화하고 있으며, 그 미적 특징으로는 여백의 미와 ‘절로절로’로 표상되는 질박함의 미가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경지임이 드러나고 있다.



16세기 동안 사림들은 훈구파나 궁정세력들과의 투쟁에서 무수한 희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그 도덕적, 이념적인 정당성을 토대로 끊임없이 修己와 治人의 길을 닦아 마침내 사림 주도의 정치를 구현하게 된다. 이러한 사림정치 확립기의 사림의 내면풍경을 전형적으로 구현한 것이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었다. 좌절을 딛고 이념적 확신으로 진군해 나가던 사림들의 낙관적인 전망이 이러한 ‘가능성의 세계-희망과 신뢰의 서정’을 낳게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6세기 자연시가의 성격은 이러한 <도산십이곡>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당쟁과 참혹한 외침으로 점철되며 열린 17세기는 이들 사림들에게 동요와 환멸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동요와 환멸 속에서 불안하게 태동한 것이 17세기의 山林政治였다. 현실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산림 속의 대학자에게 정치적 향도役을 맡겨 성리학적 이념의 구극을 至治의 경지로 구현코자 하는 이 산림정치는 그 성패를 떠나서 세계 정치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한국 성리학의 가장 첨단적이고 독자적인 모습의 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산림정치는 현 실태라기보다는 소망태였고 관념태였다. 좀처럼 구현되기 어려운 열망의 상징에 불과했다.



신흠의 좌절, 박인로의 갈망, 윤선도의 불안한 희망은 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사상이나 이념이 절정기에 이르고, 이제는 더 이상 그 절정유지가 어려워져 가는 단계의 사회문화적 풍토와 내면의식의 풍경, 이념과 그 광휘는 이미 동요하는 현실에 대한 통제력과 규정력을 잃어가고 있는 단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석양과도 같이 시대와 사회 전체를 폭넓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어서 더욱 강렬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며, 현실이 동요하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에 비례하여 더욱더 간절한 동경과 열망의 형태를 띠고 다가오게 되는 양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키호테의 경우처럼 이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낡은 이념의 노을에 매료되어, 오히려 더욱 과장적으로 이념을 표방하고 그 몰입을 선언하는 것이 17세기 자연시가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따라서 신흠의 경우, 박인로의 경우, 윤선도의 경우, 그 어느 경우에도 그 자연시가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탈이념적이고 탈중세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좀더 관념적으로 미화되고 강화된 형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신흠이 상두산 아래의 고향마을 상촌을 신선계로 관념한 것이나, 박인로가 노계를 회복된 낙원으로 관념한 것, 윤선도가 보길도를 신성에 가까운 청정한 이념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등은 오히려 자연의 관념화가 더욱 진행된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군은에 의해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것들을 탈정치적인 자연몰입으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당착이 될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자연시가는 16세기의 강호시가가 마니에리즘적으로 강화된 형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울러 노동 및 생산활동과 관련된 전원시가의 등장은 이들 자연시가와는 맥락을 달리하여 고찰하는 것이 온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자연시가의 양상과 그 특질





17세기의 자연시가는 그 양이 방대하고 그 편폭 또한 커서 모든 작가, 모든 작품을 일률로 재단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요, 아직은 그런 만한 연구사적인 단계에 이르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는 고산 윤선도(1587-1671)에 국한하여 그 주요한 국면들만을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고산 윤선도의 경우는 현재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일 뿐만 아니라 연구 또한 가장 많이 이루어진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산의 작품은 18세기 이후 창곡 연행의 실제에 서 가곡창이나 시조창으로 많이 불리워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가 작품은 그 형상적 성취가 뛰어나서 어느 작가보다도 즐겨 많이 가객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다. 심재완의 <역대시조전서>에 의하면 그의 시조 76수의 평균 수록 빈도는 ‘고산유고’까지를 포함하여 4.1종에 불과하여 신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서 20종 이상의 수록 빈도를 보이는 작품으로는 <백운이 이러나니>, <비오는 데 들희 가랴>, <우난 거시 벅구기가>의 세 수인데, 江海의 시원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거나, 산중의 소박한 삶을 질박하게 형상화한 것, 그리고 봄 바다의 흥취를 절묘하게 잡아낸 작품이다.



어느 것이나 다 전형적인 자연시가라 할 수 있는데 실제 그의 시세계 전반은 모두가 자연예찬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며,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자연을 특별한 감각과 애정을 가지고 노래한 시인인 것이 사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별히 강호가도의 정점으로 거론되면서 동시에 윤선도의 작가적인 개성, 문학사적 위상과 관련하여 논의의 초점을 형성해 온 것은 단연 <어부사시사>라 할 수 있다.



<어부사시사> 전편에는 아홉 차례나 거듭하여 ‘어부의 흥’을 도드라지게 표출해 놓고 있는데, 이 ‘흥’은 일부 논자들에 의하여 16세기와는 뚜렷하게 변별되는 윤선도 시가의 새로운 개성으로 주목된 바 있다. 이 논자들은 이러한 ‘흥’의 직접적인 표출은 16세기의 강호시가에서는 드물게 드러나는 것일 뿐 아니라 드러나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절제된 이념적 감흥임에 비해,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경우에는 이 ‘흥’이 즉물적, 탐미적, 즉 생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어서 탈 주자적, 탈 이념적인 성격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는 윤선도의 자연시가가 童心的인 자연친화의 기조 위에 성리학적인 자연관이 결합하여 강호의 시공간을 청정하고 신성한 형태로 승화 변형시킨 세계라고 보여진다. <어부사시사>를 위시하여 그의 자연시가에는 성리학적인 이념이 매개되기 이전의 유정하고 친근한 자연이 그 자체로 드러나 있는 경우가 분명히 있으며 그러한 감흥이 실체로서 자리하고 있다. 자연몰입과 자연탐닉을 성리학적인 이념으로 감싸 안고, 강호자연을 이념의 구현체로서의 청정한 신성공간으로 변환하고, 이러한 공간을 침탈하고 오염시키려 드는 일체의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배제하는 지향을 드러내는 것이 윤선도 자연시가의 작품세계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의 자연시가들의 작품구조는 자연 친화와 성리학적 이념이 상호배제적인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한결같이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제휴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부사시사>에는 그의 이전 시가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희망의 서정이 전편에 배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생동하는 심미적인 흥취 속에도 깃들여 있으며, 더욱 간절해진 연군 지향 속에도 일렁이고 있다. 두 지향은 씨와 날을 이루며 전편에 교직되고 있는데, 이러한 두 지향은 동사(冬詞)의 제9수와 제10수에 이르러서 그 최후적인 귀결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 지점에 이르러 두 가지를 확인하고 있다. 하나는 칠리탄의 주인일 수 있었던 엄자릉의 경우처럼 자신의 보길도 생활을 시비와 비방없이 공인받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비록 늙었을망정 나라를 혁신하는 대열을 선도했던 강태공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전혀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두 길이 이제 그의 앞에 새로운 가능태로서 열리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그가 ‘흥치며 거러 가셔’ ‘雪月이 西峯의 넘도록 松窓을 비겨’ 골똘히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이 강호생활과 정치적 실천 사이의 무수한 가능성들과 그 새로운 전망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부사시사>의 ‘흥’은 허상의 그림자였다기보다는 윤선도의 내면에 실체화되고 있는 희망의 역동하는 모습이었으며, 공허한 것이라기보다는 충만한 것이었고, 탈 이념적이고 즉물적인 순수 심미의 흥취였다기보다는 이념과 강호가 연군지향 속에서 상호 상승의 작용을 거듭하면서 동터오는 전망을 향해 좀더 고양된 기쁨으로 개방되는 순간의 감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선도의 개인사는 17세기 정치사와 맞물리는 지점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7세기는 정치사상사적으로 山林政治期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난숙에 이른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올바로 매개하는 일을 시대적인 과제로 인식했던 시대였다. 이에 따라 각 정파를 대표하는 山林學者가 상징처럼 우뚝 서게 되었고, 대북의 정인홍, 서인의 송시열, 남인의 허목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윤선도의 지위는 매우 독특했다. 출사 이전 아직 젊은 나이에 그는 대북의 실세 이이첨의 비리를 공격하다가 귀양길에 올랐고, 이것이 오히려 훈장처럼 작용하여 소수파 남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왕자들의 사부로 발탁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3년여 동안 가르쳤던 봉림대군이 임금으로 등극하는 행운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어부사시사>는 바로 이 때 지어진 것으로서 윤선도의 정치적 입장과 기대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연재를 마치며) ................................................................................................





선비들의 멋 중에는 거풍(擧風)이란 큰 行事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름철 지리한 장마가 물러가고 산뜻한 가을바람이 터지면 좀이 슬고 곰팡이가 덕지덕지 피어난 서책들을 꺼내어 가을햇볕과 바람에 내어다 말리고 쏘이는 일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모든 가치에 대한 척도와 규준이 중국지향 일색이었습니다. 지적 사유와 그것의 표현은 물론 행동의 양식까지도 중국의 잣대 아래 눌렸던 탓으로 금수강산 방방곡곡은 온통 화이풍(華夷風)에 깔리어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고문진보, 동래박의, 동감절요 등 중국서적을 얼음에 박 굴리듯 막힘없이 줄줄 외우며 한유, 유종원, 이백, 두보 등의 한시문을 신주단지 모시듯 숭상했던 사람들, 그들의 의식세계는 오로지 中華에의 同化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의 실질과 眞景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저 껍데기의 허상들이 조국의 산하를 유린했습니다.



그런 질곡의 곰팡이와 좀으로부터 탈출을 위한 擧風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부터 사상계와 문학계에서 일기 시작했는데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사상적 논쟁과 시조 가사 등의 우리말 시가문학 융성이 그것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우리를 질리게 한다”는 시학의 상징성, 그것은 쾌락과 퇴폐로 찌든 낭만주의 시대 영국 상류층 귀부인들에 대항한 자기 정체성에 따른 새로운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문과 한시가 아니면 시문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던 시절, 그것에 질리고 식상하여 우리의 말과 글로써 우리의 정체성에 바탕한 시조와 가사의 창작은 분명 중국 것 일색에 좀이 슬고 곰팡이가 핀 우리 영혼의 擧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임진 병자 양란 이후 우리의 말과 글을 이용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 그것은 분명 문화계의 개벽이었습니다. 그 개벽의 찬란한 빛으로 우리는 시민사회를 열었으며 현대 민주사회를 일궜습니다.



우리 말글에 의한 새로운 발견과 그에 따른 충격, 그것은 정서적 신선함으로 이어져 끊임없는 자활의 창조적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만 아쉽게도 요즘들어 다시 서구사회의 빵과 고깃덩어리 냄새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마구 잠식하고 그 장단에 철부지 이땅의 백성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궁둥이를 흔드는 광대노릇을 서슴없이 하고들 있습니다. 가치의 척도와 규준을 서구식 사유에 갖다 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국의 시문을 잘 흉내 낸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따라 한 것에 불과 하다”며 “우리나라의 참다운 문장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편뿐”이라 했던 서포 김만중 선생의 속 깊은 통곡소리를 결코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歌辭는 우리 말글을 통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의 우리식 드러내기의 결정체입니다. 아무쪼록 가사문학을 통한 영원한 정신의 擧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2001. 10. 최한선 박준규 共著 ‘담양의 가사문학’ 發刊辭에서)





그렇다. 우리네 선조 선비들은 암울한 시대에 잘못된 정치그늘아래서 타협과 영달을 과감히 뿌리치고 落鄕과 隱居를 택했다. 의리가 없는 정치, 정체성이 불투명한 사회, 진실이 왜곡되고 온갖 모략과 음해만 난무하던 시대에 진정한 선비의 가슴은 갈래갈래 찢겨지고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세상을 향한 분노는 뜨거운 태양을 삼킨 듯 이글거렸으리라. 그래서 그 터져나오려는 恨과 痛哭을 오롯이 錦繡江山에 묻어 후세들에게 길이길이 敎訓으로 남기고자 했음이리라.



배신의 세월을 탓하기보다 차라리 그 세월을 뜨겁게 안아버리고 온몸을 불살라 詩歌라는 문학으로 승화시켰던 선배 선비님들의 올곧은 자태와 사상, 그리고 지혜가 가득 담겨있는 歌辭文學을 접한다는 자체가 실로 흥분되고 설레는 접근이었다. 2개월여에 걸친 기획취재는 기자에게 언제나 가슴 뭉클한 감동과 환희를 안겨주었고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며 그 시절 선비들의 슬픔과 고뇌를 함께하게 했던 소중한 체험이었다. 소쇄원에 들어 대봉대에 이르면 소쇄처사가 버선발로 뛰어 맞고 식영정 뒷산 장원봉에 오를라치면 어느사이 송강이 곁에 있었다. 면앙정 대숲길을 오르니 가쁜 숨에도 절로절로 흘러나오는 詩 한수 “春燕紅花 飛開寧/ 感時花淚 無所情...”



무릇 歌辭는 사대주의에 점철되어 주체성을 잃고 방황하던 한 시대의 독립선언이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진짜배기 선비들의 구국선언문으로 정의되어 질 진데 이제야 비로소 가사문학이 지닌 참 價値가 눈에 드니 이 어찌 값진 체험이라 아니하겠는가.



이번호로 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서’를 마칩니다. 일정과 지면관계상 취재 범위가 담양지역과 일부 호남지역에 국한되어 충분한 취재가 되지 못한 점과 채집한 자료들을 전부 소개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추후 기회가 마련된다면 전국을 대상으로 보다 상세하게 다시한번 취재를 기획해보려 합니다. 아무쪼록 소중하고 값진 취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관계자 여러분과 바쁜 가운데도 자문위원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 남도대학 최한선 교수님, 그리고 취재에 협조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명석(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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