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1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한 회도 거르지 않고 1439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2월 9일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에서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바랍니다.(편집자주)
"지구 세 바퀴 반 돌고 도달한 곳"
"세계지도나 지구본을 가지고 사시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은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청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네티즌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1위, 여성특위가 뽑은 신지식인 5인 중 한 명, 문화일보가 선정한 평화를 만드는 100인 중 한 명, 2004년 YWCA 젊은 지도자상 수상자…. 한 팀장을 수식하는 말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 '바람의 딸'로도 불리는 그녀는 정작 세상 사람을 단 두 가지로 분류한다.
"저는 세계지도를 가지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고 싶어요. 그것의 있고 없고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의 폭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세계지도가 없는 사람은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나라까지는 알지만 우리 아시아, 우리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한국의 면적은 지구 전체 육지 면적의 27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이 반도만을 무대로 삼고 살기에는 너무 좁지 않아요? 세계를 무대로 살아야 할 운명이 저와 우리에게 있는 것 같아요. 물건과 상품은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도 정작 사고와 행동은 국경 안에 갇혀 있어선 안 되겠죠?"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한 한 팀장이 유년 시절 세계를 무대로 살겠다고 마음먹게 된 데는 부모님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는 세계지도 광(狂)이었어요. 가방, 필통, 식판, 샤워 커튼은 기본이고 평소에 우리가 입고 다니는 티셔츠에도 항상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다 못해 저금통도 '빨간 돼지'가 아니라 '초록 지구본'이었죠. 심지어 식탁 대화도 '페루에 김치 국물이 튀었다'느니 '인도가 빵구 났으니 꿰매야겠다'느니 하는 식이었어요. 아버지도 결코 뒤지지 않으셨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연결돼 있는 것을 보고 어린 제가 '나중에 크면 걸어서 세계를 한 바퀴 돌겠다'고 했더니, 매우 기특해 하시면서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격려까지 해주셨지요. 그리고 나중에 그 꿈은 현실이 됐죠."
홍익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한 팀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타대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국제홍보회사 버슨-마스텔라에서 근무하다 어린 시절 선언했던 '걸어서 세계 일주'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후 꼬박 7년 동안 세계 오지를 여행했어요. 처음에는 지구 한 바퀴를 돌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따져 보니 세 바퀴 반이 넘더군요. 그렇게 한국을 베이스캠프로, 세계를 넓은 무대로 삼으면서 지내다 보니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세계를 '지구촌'이 아니라 '지구집'으로 부르는 저 자신을 발견했지요. 그래요. 지구라는 집은 지금 아시아 방(房), 유럽 방, 아프리카 방, 아메리카 방 등으로 구분돼 있다고 봐요. 물론 과거에는 방과 방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존재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벽으로 바뀌었지요.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래서 '바람의 딸'은 '48시간 대기조'로 거듭나게 됐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재난이 발생하면,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48시간 안에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일그러진 세계지도'를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의 지도에는 미국만이, 혹은 일본과 중국 정도만이 존재하고 있었죠. 그러나 이제 우리는 '촘촘한 세계지도'를 가져야만 해요. 거기에는 가나, 토고, 말라위,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나라들도 지도에서 금방 찾을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갖춰야만 해요. 그런데 저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도움이 필요한 그들을 돌보고 살펴보는 일을 하면서 정작 제 인생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거든요. 세상에는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사랑과 은혜의 법칙'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무게가 100kg을 넘으면 폭발하는 대전차 지뢰가 수없이 매설된 지역에서 가벼운 몸무게 덕분에 살아남은 그녀이긴 하지만 항상 무쇠일 수는 없다. 그녀라고 왜 그만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한번이라도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확고한 신념 하나를 가지고 있다. 소방관이 불난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 않고 달려가듯이, 비록 그녀 자신이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현장을 지키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제 인생의 3부 능선을 이제야 막 넘은 것 같아요.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아닌 길'이기에 어렵긴 하지만 그것이 저의 가슴을 더욱 뛰게 하는군요." /정지환 기자
한비야 팀장의 이력서
▲ 홍익대 영문학과 졸업
▲ 미 유타대 국제홍보학 석사
▲ 국제홍보회사 버슨-마스텔라 근무
▲ 7년간 세계 오지여행
▲ 네티즌이 만나고 싶은 사람 1위, 닮고 싶은 여성 2위
▲ 여성특위 선정 신지식인 5인
▲ 문화일보 주체 평화를 만드는 100인 선정
상훈: YWCA 젊은 지도자상
저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