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IMF 한파로 직장을 잃었던 노동자들과 요즘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사오정'이란 신조어가 생길만큼 직장인들은 항상 '혹시 직장을 잃지 않을까'하는 걱정속에 하루를 보낸다. 어느 시대건 경기악화는 실직률 상승을 낳고 그때마다 월급통장이 유일한 삶의 수단이였던 직장인들의 어깨는 땅바닥을 향했다.
이런 이유로 직장인들은 '농업'이라는 직업은 IMF 시대의 정리해고도, 쉰도 안된 나이에 직장을 떠나야 하는 고통도 없을것으로 생각할런지 모른다. 물론 그같은 일은 없다. 땅이 있고 건강한 정신과 육체가 있다면 누구나 농업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과 관련된 여러 여건들에 비추어 농업인의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음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시작해 어느새 한우 130두의 축산인으로 고속행진을 하고 있는 이동근(담양읍 삼만리.55)씨. 15년전 담양죽세품시장이 명성을 누리던 때 이씨도 시간만 나면 대자리를 만들어 시장에 냈다.
"시세도 좋고 만들기만 하면 훔쳐가듯 팔렸으니까 마을 주민들이 대자리를 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이 재미가 붙으니까 나중에는 눈감고도 만들 정도로 기술자가 되버렸죠." 그래서 김씨는 조금 더 조직적인 생산을 위해 정부지원을 얻어 '삼만공예특산단지'를 설립하고 15평 남짓의 공장에서 아내 정선자(48)씨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출발한 사업은 죽제품 시장의 쇠퇴로 경영난을 겪게 되자 고심 끝에 송아지 8마리에 재산을 투자했다.
"사업이 생각데로 풀리지 않으니까 겁도 나고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소를 사는 것으로 얼마 안되는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큰소가 300만원을 훨씬 넘어선 가격에 거래됐으니 소가 곧 재산이었습니다." 애지중지 자식같은 송아지 8마리를 사육하면서 이씨부부는 작은 외양간 나무판자사이로 보이는 황금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축산인의 길로 들어서면서 한 마리씩 늘려가는 송아지를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던 이씨에게 큰 위기가 덮쳐왔다.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 25만원을 밑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을 받아드려야 했던 소파동.
사료값은 하늘이 무서운줄 모르고 치솟고 소값은 떨어져 이씨를 더욱 힘겹게 했고 축사를 정리해야 겠다는 결심까지 이르게 했다. 그런 이씨에게 아내 정씨는 격려을 아끼지 않았고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사료값이 소값보다 비싸다고 해야 맞는 말일껍니다. 그렇게 축사를 운영하다가는 실패는 정해진 일이었습니다.”이씨는 그때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축사 한켠에 녹이슨 죽통과 보일러로 이끌었다.
"지금도 못버리고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더 열심히 하게되요. 아내랑 둘이서 농산물시장 채소 쓰레기를 가져다 쌀겨와 섞어서 죽을 만들어 사료 대신 사용했습니다. 몸은 힘들었어도 그래도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나르고 또 끓였습니다."
현재는 부루셀라의 발병으로 축사운영에 노심초사 하고 있는 이씨는 정기적이지 않지만 "이것이 농업이구나 결코 편한 길은 아니구나"하고 일깨워 주는 도처의 어려움들이 그동안 그를 괴롭혔고 "다른 농군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집안이 안정되야 나가서 일도 잘되고 하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일을 하면서 그저 평탄하기만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농업에 대한 확신과 비전을 갖고 종사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벼를 수확하면서, 소를 키우면서,비닐하우스에서 작물을 재배하면서 시세를 걱정하고 판로를 생각해야 한다면 제 자신도 자식들에게 농사짓지 말라고 말하는건 당연합니다."
이씨는 결코 평탄한 길을 원하지 않는다.또 노력없는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농업의 중요성을 알고 농군으로서 자긍심을 지키며 살고 싶을 뿐이다.
만약 농업인들이 '사표'를 쓰고 싶어 한다면 어디에 제출해야 할까?
정부일까? 아니면 농업인 자신? 그곳은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일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농업인들 스스로는 결코 사표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외국산 농산물이 밀려 들어오고 그것을 구매하는 우리의 손과 농업에 대한 무관심이 농업인들에게 사표를 쓰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김필식 記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