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광주간 국도를 벗어나 고서 원강1리를 거쳐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다랑이논들을 휘감고 흐르는 실개천 옆,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고목 한그루가 지근거리서 낯선 방문객을 반기듯 봄 바람에 하늘 거리며 손짓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옹기종기 모여앉은 16가옥 50여명의 주민이 살고있는 산골마을 원강 2구 분토마을이 한낮의 봄볕을 받으며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 오해숙(62) 이장댁을 찾아 들어가니 부엌 한켠에서 한파를 용케도 견뎌낸 겨울 갓을 다듬으며 갓김치 담그기에 바쁜 오해숙 이장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반갑게 손을 잡아준다. 순박한 모습과 인정 넘치는 정겨운 환영에 어릴적 고향 내음이 물씬 풍겼다.
"아이구 이런 시골까지 어떻게 오셨다요. 별 내세울 것도 없는 산골마을 이장이 뭐 대수라고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환갑을 넘겨 이제는 손주들의 재롱을 재미삼아 황혼을 즐겨야 할 나이에 마을 이장을 맡아 젊은이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오해숙 여성이장과의 첫 만남이었다.
오해숙 이장은 남편 문용석씨(65)에 이어 분토골 반장과 부녀회 일을 오래도록 해오다 지난해 주민들의 선출로 마을에서는 첫 여성 이장을 맡게됐다.
분토골, 월곡 두마을로 이루어진 원강2리는 전체 가구라야 31호에 100명 남짓 주민들이 모두이고 고서는 물론 담양에서도 가장 낙후된 오지마을.
하지만 6명의 의학박사·정치학박사는 물론 전남대 법대학장을 지낸 이호준 박사를 배출할 만큼 교육열이 높고 인재가 많이 나는데다 송강 정철의 조부 묘가 있는 4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명당(?) 마을이다.
워낙 산골마을이라 지금껏 동네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한가로움과 적막한 분위기속에 정체된 듯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난해 오해숙씨가 이장을 맡고 부터는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주민들의 칭찬.
1년여의 짧은 이장 소임속에도 오해숙 이장은 그동안 한 푼도 마련할 수 없었던 마을기금 조성에 착수한 것을 비롯 지난해 9월 갖은 고생 끝에 마을 모정 '분토정'을 지었고 마을진입로 포장, 가로등설치, 꽃길가꾸기, 영세민 구조사업 등을 펼치면서 여지껏 누구도 하지 못했던 크고작은 마을일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것.
특히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 노인들만 남은 산골마을에 행정의 관심을 주목시키고 작은 일이라도 정부 지원사업이 있다면 마을로 가져오는 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아 모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몸이 아픈 주민과 영세민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이장으로서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녀는 "벼농사,밭농사가 전부인 이 산골마을에 뭔 희망이 있것소만 그래도 젊은이 하나 없는 산골에서 농사 짓고 살일 밖에 없는 형편이라 논일 이라도 수월하게 헐 수 있도록 농로 포장해주고 경지정리 해줬으믄 하는 것이 우리 마을 최대 숙원이요. 글고 남아있는 주민들이라도 오순도순 마을 지킴서 살수 있도록 짝더라도 마을노인당 하나 지었으면 하는 것이 인자 큰 바램이요"라며 소망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원강2리는 경지정리 안 된 다랑이논, 수렁논이 대부분이어서 비만 오면 농로가 질퍽거려 농사 짓기 여간 힘든게 아닌데다 여느 마을에나 다 있는 노인당·회관 하나 없어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비록 30여호 불과한 동네지만 집들이 여기저기 떨어진 나홀로 세대가 많은데다 노인들이 대부분이어서 농사짓고, 마을일 논의하고, 화합시켜 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한다. 다행히 모정 터를 이미 희사했던 이 마을에 선산이 있는 연일 정씨 문중에서 회관 지을 땅은 또 희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니 이제 마을기금에 행정의 협조만 있으면 희망이 보일 것이라 기대가 높다.
이장집에 기자가 찾아왔다는 말에 집수리를 하다말고 일부러 발걸음 한 이 마을 박병규 발전추진위원장은"비록 여자지만 성실하고 열의가 남다른데다 면사무소나 군청 할 것없이 마을일이라면 발벗고 쫒아다니며 도움을 구하고 협조를 받아내는 이장 때문에 그동안 짚은 잠에 빠져있던 마을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고있다고 혀서 모두들 이장 잘 뽑았다고 허요. 인자 요 이장 덕분에 우리마을도 쪼가 잘 될 것이요."라며 칭찬을 주저하지 않았다.
취재를 마치고 봄볕이 더욱 따사로운 구불구불 시골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문득, 19살 함평에서 이곳 분토골로 시집와 40여년을 남편과 함께 벼농사·밭농사를 지으며 살림살이와 농지를 키워 온 농사꾼으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7남매를 건사하며 장성시킨 오해숙 이장 이야말로 우리시대 농촌의 어머니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 일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장광호 記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