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이 아니라도 좋다. 담양이 좋아 담양땅에서 흙내음 맡으며 땅을 일구는 농군 백은기(38, 봉산면 곡정리)씨와 그의 아내 최정순(34)씨의 고향 이야기.
식목일 다음 날 봉산면 곡정리 외길 도로가에 길게 늘어선 비닐하우스가 내리는 봄비에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며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50여가구 남짓의 봉산면 곡정리, 그 속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꾸며 "이제 농사꾼 티가 제법 나는 것 같아요"라며 미소짓는 백씨는 동네에서 막둥이 농군이다.
장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때까지 담양은 그저 조부님이 사시는 곳, 그저 그것 뿐이었다. 그런 백씨에게 답답한 도외지 생활은 귀농을 결심하게 했고 태어난 장성이 아닌 조부님과의 인연으로 담양행 버스를 탔다.
그렇게 10여년, 백씨는 "제 고향은 담양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결혼.
농군 초년생에게 결혼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시골의 열악한 환경과 농사일의 힘겨움이 가정을 꾸리고 싶은 백씨에게 넘어야 할 벽으로 다가왔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부인 최정순씨에게 백씨는 자신이 농사꾼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혼생활, 백씨부부는 광주에서 3년여 동안 생활했고 마침내 백씨는 자신이 땅을 일구는 농군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해야 했다.
"처음 시골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그 사실보다 저를 속였다는 사실이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보다 제가 더 농사꾼 같아요."
광주에서 태어나 도회지 생활에 익숙해 있던 최씨는 남편을 믿고 곡정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제는 1남 1녀의 어엿한 어머니로 곡정리 젊은 농군 백씨의 든든한 내조자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흙먼지 묻은 최씨의 작업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농사.
"농사일을 해오면서 저도 모르게 농업인들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그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힘겨운 노력으로 생산된 농산물이 제값에 팔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농업인들은 내년 농사를 준비하며 희망을 찾습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하더라도 수입을 올리지 못하면 다른 업종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농업인들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백씨 자신도 곡정리를 대표하는 젊은 패기로 무장, 기술은 미숙하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으로 발전을 거듭해 복숭아 1500평, 딸기 800평, 수박 1600평의 튼실한 농업인이 되었다.
"저는 지금 길위에 있습니다. '부농'이 되는 길 말입니다. 수입이 좋지 못해 현재는 힘든 상황이지만 제가 '부농'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수 있을 때 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 길을 달릴 것입니다."
국민의 식탁을 책임진다는 농업인의 '사명감'과 농촌발전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백씨의 의지는 그가 말하는 '농촌의 샘'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희망.
백씨의 꿈은 부농만이 아니다. 예전 100가구 이상이 살던 봉산면 곡정리. 그 번영의 과거를 막걸리 한잔에 떠올리는 추억으로만 여기고 싶지 않는 것이 백씨의 마음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농업에서 희망을 찾고 귀농을 결심하게 하는 것이 백씨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시골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는 이유는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많은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농업인들이 우리 농촌에 이러한 기회를 만들고 또 돕는다면 이농(離農)이 아니라 귀농이 더 익숙한 현상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군 시절 고향도 다르고 말씨도 다른 젊은 청년들이 20여명 남짓 내무반에서 생활했다. 후임병이 들어오는 날이면 고참병들은 "고향이 어디냐?"며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시절 '광주'소리만 들어도 그 반가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특히 광주에서 수년 넘게 살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는 후임병보다 고향은 아니지만 현재는 광주로 이사해 살고 있다는 후임병에게 정이 많이 갔던 기억이 있다. 휴가를 가게 되면 '같은 버스'를 탈 수 있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백씨는 담양의 농군들과 같은 버스를 타고 있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고향은 담양이라고 자부하면서. /김필식 記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