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소설가다. 길을 걷다 마주치게 되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까지도 소설의 소재가 되어 저마다 쓰고 있는 인생소설에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켜 준다. 가끔 바쁜 이유로 아니면 그 가치를 인지하지 못해서 지나치는 경우도 다반사지만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일상의 소재를 놓치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소유는 아니지만 "고향땅이 다 내것"이라는 소신으로 마을을 이끌고 있는 이상섭(70,금성면 봉서리)씨.
사람들은 보통 나이 일흔이면 70여년동안 써온 소설의 소재가 바닥나 경로당에서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낼 것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씨는 35가구 봉서리 주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청년의 삶을 살고 있다. 농사에 대한 포부와 학구열도 여느 농업인 못지 않다는게 주민들의 평가.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뿌리깊이 흙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부모님이 물려준 논 1000평으로 들녘에 나섰다.
"시골이 다 그러지만서도 4형제중에 둘째였지. 워낙 힘들었어 그때는 한끼 때우기도 힘든 세상이였으니께. 그런디 아버지가 물려준 논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말하믄 잔소리제." 그렇게 시작한 농사일을 60여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한길만을 걸어온 이씨는 "농사같이 좋은일이 어디있것냐?"며 되묻는다.
농사꾼이라는 자신의 명함과 함께 더욱 이씨에게 젊음을 선물하는 일이 있다. 이씨는 봉서리 주민들의 정겨운 10년지기 이장이다.
나이 일흔의 이씨가 "10년째 독재(?)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이 터져 나온 이유가 나이를 생각한 선입견 때문일까. 이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죽으로 치장한 핸드폰을 멋들어지게 허리에 차고 빨간 헬멧에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누빈다.
"뉘집 밥그릇이 몇 개인지 알수 있는 작은 마을이라 집에 앉아만 있어도 마을 대소사를 지도를 보듯 파악하고 있다.”는 이씨에게 이장일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이끌어 주는 소중한 소재다.
소설에는 위기와 절정 그리고 결말이 있다. 농사일과 이장이라는 소임은 이씨에게 항상 절정의 삶을 살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수확을 앞둔 논을 폐허로 만들었던 자연재해, 시세폭락 등 모든 힘겨움을 이겨내야 했다. 또한 어려운 형편에서 오로지 흙과 씨름하며 살아오는 동안 이씨에게는 여느 부모들처럼 경작해야할 또 다른 농사(?)가 있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한순간도 소홀함 없이 '잘 짓고 싶어 하는 농사',자식농사다. 2남 4녀를 두고 있는 조씨는 “많이 낳는 것이 자식농사였다면 열명도 가능했다."고 우스갯소릴 한다. 부모로서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농군으로서 반평생 인생을 살아온 그는 자신이 고향땅을 애지중지 하는 까닭으로 말을 잇는다.
"농사지어서 부자소린 못들었어. 근디 자식만큼은 농사덕에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나는 논이 좋고 밭이 좋아.땅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있것는가."
이러한 이씨의 신념은 일흔의 나이에도 은은한 빛으로 봉서리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다. 할머니가 유난히 많은 봉서리에 생활불편사항(?)이 접수되면 보일러 수리공에서 우편배달부까지 서슴치 않고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그는 현재 친환경농법에 대한 열망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주기적으로 군에서 실시하는 '친환경농법'교육에 마을이장으로 참여하며 틈틈이 관련서적을 돋보기를 의지해 공부하고 있는 것.
"처음에는 한번 받아나 보자 하고 갔을꺼여. 근디 요것이 교육을 받아보니깐 알것어. 추곡수매도 안되는 마당에 정말 농약 안쓰고 농사 져야지 안그러면 안되것드만. 그러고 인자는 흙을 자식같이 키워야 혀. 그동안 농부들이 많이 써묵었으니깐 건강을 되찾아 줘야 안쓰것는가."
틈만 나면 마을회관을 찾아 주민들에게 자신이 보고 배운 친환경농법에 대해 설명하는 이씨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주민들이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알아야 이장도 할수 있다.'는 믿음에 주민들도 크게 동참하고 있는 사실에 이씨는 행복하기만 하다.
"사람이 없어 휴경지가 많은 마을 현실이 안타깝다."는 이씨는 어려웠던 과거를 생각하면 전부 임대해 씨앗을 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농사천하지대본'은 뇌리에서 사라지고 외국에서 들어온 쌀과 갖가지 농산물들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씨는 농민은 어떤 작물을 해서 수입을 늘리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근본에는 오랜 세월 농군의 삶을 이끌어준 '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