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생가 안마당에는 고인이 기억하고 있었던 소나무가 그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초록빛 들판과 산자락을 감싸놓은 나무들. 겨우내 긴 잠에서 깨어난 들판은 농부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국도 29호선을 따라 봉산면 구암(九岩)삼거리에서 창평쪽으로 꺾어들어 약 3㎞ 남짓 달리다 보면 창평면 장화리 장전부락에 이른다. 마을 초입에는 '늘 푸른 전원마을 장전'이라는 푯말이 손님을 맞고 그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노라면 마을 끝녘에 대밭을 두르고 자리한 널따란 한옥 古家가 나타난다. 이 집이 이승기(李升基) 박사의 生家다.
사랑채를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인기척을 느낀 안주인이 황급히 툇마루로 나서 낯선 이방인들의 얼굴을 살핀다.
"누구셔요?" 전에 이승기 박사 일대기를 연재했던 신문사에서 왔다고 하자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바깥주인을 불러낸다. 이집 바깥주인은 이승기 박사의 재종(6촌)동생인 이 준(65)씨로 50년이 넘도록 이 큰집을 관리하고 있다.
타고난 천재 과학자의 꿈과 좌절
故 이승기 박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10월 1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양녕대군의 19대손이자 경기참봉을 지냈던 부친 이병성(李丙星)씨와 어머니 기세정(奇世貞)씨 사이에서 태어난 7남매 중 넷째이자 유일한 아들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마치고 서울 중앙고보(5년제)에 입학한 이 승기 박사는 중앙고보를 4년만에 졸업하고 일본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에 입학한다.
松山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승기 박사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합격한다. 3년후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이 박사였지만 조국 없는 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설움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나타난다. "공장에 들어가면 돈은 벌겠지만 학교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으니 어찌하오리까. 공장에 가서 돈이라도 벌어볼까요?"
편지를 개봉한 부친으로부터 이내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식이 아비의 진심을 모르니 분통이 터진다. 내가 이 고생을 하여 공부시킬 때는 큰 뜻이 있었는데 돈벌이나 하라고 공부시켰나, 그렇다면 장사를 배우지. 당장에 집에 돌아와 농사나 지어라."
아버지의 불호령을 들은 이 박사는 지도교수였던 기타(喜田) 교수의 추천으로 오오사카(大阪)의 고에이(工英)社에 의탁연구원으로 취직하여 본인의 연구와는 동떨어진 아스팔트 강화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일본제 아스팔트는 쉽게 금이 가고 갈라지는 결점이 있었는데 이박사는 이 부분을 개선하는 연구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학회에 발표할 정도로 성과를 올렸으며 관련연구로 일본에서 특허도 취득했다.
이러한 실적과 기타교수의 후원으로 그는 동경에 있는 공업시험소에서 기타교수의 지도를 받는 연구원으로 취직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토제대부설 일본화학섬유연구소가 설립되자 연구강사로 임용되어 본격적인 합성섬유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일본 생활이었지만 이박사는 각고의 노력끝에 드디어 1939년 합성섬유 제1호(Poly Vinyl Acetate·비날론) 발명에 성공하고 식민지 시기에 유일하게 공학박사 학위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정식 교수에 임용된다.
8·15 해방과 더불어 그는 조국에 돌아와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교수를 거쳐 제2대 공대 학장을 역임했다.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北으로
북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최고의 과학자를 꼽는다면 단연 이승기 박사다. 어떤 책이나 글에서든 그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은 물론 북한의 인사로는 이례적으로 대중용 傳記가 단행본으로 출간될 정도로 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숭앙되고 있다.
해방후 남한에 있던 이승기 박사는 북한정권이 눈독을 들인 과학자 중 한사람이었다. 남북한을 통틀어 몇 안되는 박사학위 소지자 중 한사람인데다 교토제국대학에서 상당기간 연구활동을 한 화려한 경력이 이를 뒷받침했다. 또한 해방 직전 일제에 대한 비방과 비협조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어 투옥된 적도 있어 북한에서 영입할 명분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나 이념에는 거리를 둔 채 오로지 연구에만 골몰했다. 그의 생각은 "일제치하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과학 연구의 꿈을 해방된 조국에서 마음껏 펼침으로써 민족의 복리를 위해 일해보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북한의 집요한 월북 제의와 권유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그의 자서전에 수록된 내용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못했다. 만약 려경구 선생의 주견에 찬동한다면 그렇게 행동을 해야겠는데 난 그때까지 아직 준비가 돼있지 못했다. 北에대한 명백한 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떠날 그런 용감성은 없었다."
대신에 그는 남한에 남아 좌익에서 문제를 삼던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논의하는 주요회의에 참석하는 등 오히려 남한정부에 협조적이었다. 분명 그는 북한의 기대와는 달리 적대적인 체제의 남한에서 주요직책을 맡으며 복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같은 인물이 월북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북한정권이 남한 과학자 영입을 위해 조직적이고 치밀한 공작을 벌인 탓도 있었지만 남한사회의 혼란과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案) 파동으로 인한 대학의 황폐화가 그를 갈등과 좌절의 상태로 몰아넣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몇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생각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그래도 조국에 이바지하겠다고 민족적 모멸을 받으면서도 꾹 참으며 연구해낸 성과를 이젠 땅속에 묻어야 할 형편이 됐다. 나는 아내와 함께 어린것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향했다. 차라리 초부(樵夫)로 일생을 보낼 각오였다. 나는 이제 25년만에 아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학정때도 꺼질줄 모르던 희망의 불길이 해방된 오늘 재가되어 돌아왔다."
참담한 심정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북한정권은 수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월북을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0년 이승기 박사는 서울에 머물다 6·25전쟁을 맞게된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그에게 북한 수상 김일성의 위임을 받은 한 인사가 찾아오게 된다.
그는 훗날 북한의 부수상과 과학원장을 지낸 리종옥이라는 과학자였고 이승기 박사에게 비날론연구소 설립을 보장하는 김일성의 제의를 건넨다. 결국 이승기 박사는 일본에서나 남한에서 좌절된 그의 연구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김일성의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 북행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박사의 제자로 당시 그와 함께 월북했다가 다시 남으로 돌아온 국순웅 고려대 명예교수는 얼마전 본지에 연재했던 '담양의 인물 - 이승기 박사 편'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당시는 전쟁통에 학교도 어수선했다. 이박사님을 비롯한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모여 수업 정상화에 관해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북한 산업성 부상이라는 사람이 학교로 찾아와 평양으로 가게됐으니 짐을 꾸려 서울역 앞으로 집결하라고 했다. 나는 다음날 이형규, 신현석, 옥지훈 제형들 가족과 함께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승기 박사님은 신당동 자택에서 출발했는데 부부와 세자녀가 함께 서울역에 도착했으며 공과대학의 다른 교수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7월 27일 정오에 서울역을 떠난 기차는 다음날 아침 10시경 평양역에 도착, 산업성장관의 환영을 받았다. 나는 박사님과 신현석, 옥지훈 형과 함께 평안북도 청수에 마련된 연구실에 연구원으로 배치됐다가 10월경 북한에 진주한 국군을 만나 남한으로 돌아왔다."
이승기 박사 영웅 과학자가 되다
월북 후 이승기 박사는 북한사회에서 가장 촉망받는 과학자였다. 일제시대 때부터 그의 이름은 한국이 낳은 과학계의 대표적 기대주로 거명되곤 했다.
전쟁이 끝난뒤 이승기 박사는 평안북도 청수지방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전후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갖가지 실험설비와 시약, 서적 등이 갖추어질만큼 북한정권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요청한 인물들이 대거 연구집단으로 참여했다. 그의 연구에는 함께 월북한 신현석(서울대 화학공학), 옥지훈(서울대 화학공학), 리창직(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 등의 제자들이 핵심인물로 참여했다.
연구실이 꾸려지자마자 본격적인 비날론 연구가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김일성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1961년 5월 연산 2만톤 능력의 대규모 공장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이날의 감격을 이승기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오늘을 통하여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은 한 과학자의 운명은 결코 그 자신의 재질과 노력, 즉 주관적 요소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사회의 제도적 성격이 규정해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상공에 비날론 공업화의 경축포성이 울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남녘에 있는 재질있는 과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겠는가? 남반부의 과학자들과 학생들, 누가 자기의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으며 누가 조국 과학사에 특기할만한 발명들을 하고 있는가?..."
이박사는 그 당시에도 못내 자신의 꿈을 펼치도록 연구를 뒷받침해주지 못한 남한사회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듯 표출하고 있었다.
이승기 박사는 이날 준공식에서 규모, 기술, 생산량 면에서 세계최대 비날론 공장을 이룩한 공로로 북한정권으로부터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제1회 과학부문 인민상을 수상하게 된다.
凍土뚫고 40년만에 만난 오누이
'둘러보소서 문중 집안 온 가족들의 깊은 애도 속에 위로 선조분들 모시고 부모님 곁에 묻히셔야 할 종손인 당신의 육신은 북쪽 찬 땅에 누워 계시지만 저희들의 뜨거운 마음으로 당신의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오니 부디 영원토록 천국의 안식을 누리소서.'
이글은 담양이 낳은 세계적인 과학자이자 20세기를 빛낸 10인의 인물 중 으뜸으로 꼽히는 故 이승기 박사의 막내 여동생 이계남(李季男·2003년 작고)씨가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이다.
이계남씨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1990년 5월, 딸 숙현씨로부터 오빠 이승기 박사의 기사가 실린 잡지 한권을 전해 받고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오빠 승기씨가 함흥비날론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딸의 권유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잡지에 실린 주소로 짤막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오빠, 몇 년만에 이렇게 불러본 오빠요, 저는 오빠의 막내여동생 계남입니다. 이 편지가 오빠의 손에 받아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건강하시어 우리 남매, 숙질간 상봉하여 한맺힌 혈윤의 정한을 풀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봅시다."
편지를 보내놓고 혹시 올지 모를 답장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하기를 3개월, 고대하던 답장이 도착했다.
"아! 야속한 사람아, 진작에 소식을 전해줄 일이지. 내 사무실에서 누가 편지 한 장을 갖다주어 무심코 보니 한쪽에 네 이름이 있어 이것이 웬 일인가? 이게 무슨 편지인가? 하고 뜯어보니 정말 내 동생 너의 편지여서 앞이 캄캄하고 눈물에 글씨가 안보였단다."
당시 계남씨는 미국 영주권을 갖고있던 터라 주미 한국영사관에 방북의사를 전하고 가능여부를 물었다. 뜻밖에도 영사관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은 계남씨는 방북신청을 하게되고 1991년 2월 12일 그토록 그리던 오빠 이승기 박사와의 상봉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다.
수많은 보도진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평양에 도착한 계남씨는 고려호텔 근처에 있는 장조카 종과씨의 아파트에서 오빠 이승기 박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이박사는 중병을 앓아 건강이 좋지않은 상태였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보도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7남매인데 다 세상 뜨시고 막내동생 이 한사람이 아직 살아있어 40년만에 만나게 됐다."
이박사는 계남씨에게 오랜 옛날 고향 무월리 시정에서 입학시험 준비하던 일이며 고향집 안마당에 심은 소나무 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고향에서의 추억을 회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뒤인 1996년 2월 이승기 박사는 북녘땅 함흥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소나무는 푸르기만 한데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승기 박사가 타계한지도 어느덧 아홉해가 지났다. 이곳 생가 안마당에 심어놓은 소나무는 아직도 푸르기만 한데 담양이 낳은 세계적 과학자이자 20세기를 빛낸 故 이승기 박사의 생가는 누구하나 변변히 찾아주는 이 없이 쓸쓸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박사의 재종동생이자 이곳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준씨는 이박사의 타계소식을 듣고 가까운 친척분들을 모셔다 두 해 동안 제를 모셨다.
준씨는 '격세지감'이라는 말로 지난 세월의 고통과 어려움을 대신했다.
"한때는 툭하면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녹음기를 들고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 가곤 했습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살아왔지요. 그런데 이제는 대학교수들도 찾아오고 사회 저명인사들도 가끔씩 들러주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됩니다."
준씨는 또 "주위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이 큰집을 관리하자니 매년 들어가는 보수비용만도 만만치 않은데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관리하기가 벅차다"는 어려움도 토로했다.
준씨는 얼마전 이곳에 들른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이승기 박사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훌륭한 분인데 그분의 생가가 이렇듯 방치되어서야 되겠느냐, 서울에 올라가면 문화재청에 이야기해서 문화재로 지정받도록 하겠다"고 했다며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느냐는 바람을 내놓았다.
아울러 최근에 이곳을 들른 최형식 군수도 이같은 바람을 전해듣고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했다며 기대를 표했다.
9대를 이어온 종가집 답지않게 제법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이승기 박사의 생가 안마당에는 고인이 기억하고 있었던 소나무가 그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글 한명석 局長 사진 정종대 記者
(이승기 박사 略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