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세월동안 항시 마을일을 공평하게 보고 동네 화합을 위해 애 많이 썼지라. 지금까장 마을사람 누구하나 이장한테 불평없이 잘 따라준께 더 할말 있것소. 진짜, 여자지만 대단허고 훌륭한 이장이랑께"
남면 지곡리 지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여러명의 아주머니, 노인들의 한결같은 칭찬이 이어지는 주인공은 바로 이 마을 이장을 10년째 맡아 딱 부러지게 일해오고 있는 여성 이장 고영숙씨(53).
고영숙씨는 담양군 여성이장 제1호 이자 현재 여성이장단 총무를 맡고있다. 10년전 여자가 이장을 맡는 것 자체가 생소할 무렵, 군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이장에 뽑혀 남자들도 하기 힘들고 기피하던 마을일을 돌보기 시작한 보기드문 일꾼이다.
당시 마을일을 믿고 맡길만한 남자들도 많을텐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대부분 마을 남자들로 구성된 지실마을 개발위원들이 여성인 고영숙씨를 이장으로 추천하고 기어코 이장 일을 맡겼다고 한다. 그만큼 성실하고 믿을만 한데다 말그대로 '똑 소리나게 일을 잘 하는 성품 탓' 이었을게다.
여자의 몸으로 처음 이장을 맡았을 당시만해도 마을에서는 서로 이장을 안하려는 분위기여서 어쩔수 없이 이장을 맡게되었지만 봉사와 희생을 감수하며 크고작은 마을일을 해오다 보니 마을사람들이 이장을 바꿔줄 생각을 아예 하지않아 올해로 벌써 10년째 마을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
이장 일에 어느정도 이골이 날만한 6년째 되던 해에 이젠 정말 그만두려 했지만 마을주민들이 '재신임(?)'을 통해 또다시 임기 3년의 이장을 맡기는 통에 오늘날까지 꼬박 10년을 이장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고영숙씨는 "여자로써 한두해도 아니고 십년 가까이 이장 일을 해내기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유난히 돈 많은 외지인들이 마을에 많이 들어와 살던 탓에 위화·적대감이 팽배했던 마을분위기를 서로 이해하고 상부상조 하는 화합의 마을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며 "우리 마을이 역사와 전통이 깊은데다 풍광도 수려해 돈 가진 타향 사람들이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일이 많아 마을의 화합이 깨질까봐 한때는 적잖은 마음 고생을 했다"고 소회했다. 그녀는 또 "예전엔 마을 당산제, 백중날 민속행사에 정말 소극적이던 동네분들이 이제는 모두가 적극 참여해 마을의 전통을 지켜나가고 더불어 즐기는 축제 분위기 조성에 서로 손을 걷어부치고 나서게 된 것도 큰 보람이다"고 뿌듯해 했다.
고영숙 이장은 비록 여성이지만 여느마을 이장 못지않게 마을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많은 성과도 거두었다. 관내 최초로 전통한옥 마을회관 건립을 비롯해 마을안길 정비, 하수도 정비, 마을보호수 자연석 쉼터 조성, 자미원 가는길 농로포장 등 다른 마을 남성 이장들도 못하던 일을 척척 해냈다. 일제때 '지실부락'으로 써왔던 마을 표지석도 '지곡리 지실'로 일제식 표기를 없애고 우리말로 마을 표석을 바꿨다. 무엇보다 50여 가구에 불과한 마을에 외지 돈 가진 사람들이 13세대(30%)나 들어와 살면서 주민들과의 위화감이 조성되며 불편한 상황이 계속되던 처지에서 이들이 스스로 마을 사람이 되는 의미에서 회관 건립시 가구당 100만원씩을 출연, 마을일에 더불어 동참하도록 이끌어 낸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었던 당차고 야무진 일이었다. 이로인해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한마을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고영숙 이장은 매사 마무리를 잘하고 깔끔하게 일하는 성품이지만 이장 생활 10년동안 애로사항이나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군에 마을 실정을 토로하고 여러차례 건의했지만 결국 예산 문제등으로 마을 상·하수도 불편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비록 좀도리 정신으로 검소하고 청빈하게 마을 기금을 절약하면서 크고작은 마을일을 챙겨왔지만 큰 돈이 들어가는 상하수도 문제만큼은 역부족 이었던 것. 이제 마을 숙원사업이 되어버린 이 일은 후임자(45, 정희용씨)에게 맡겨야 할 처지가 됐다. 오랫동안 마을일을 돌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마을의 '수호천사'요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던 그녀지만 이제 이장 일을 후배에게 물려주려고 내놓았기 때문. 비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리거나 변함없이 1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여자의 몸으로 숱한 어려움과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남들 마을 못지않게 열심히 마을일에 매달리면서 많은 일도 해냈던 그녀지만 이제 올 3월이면 이장직을 그만두게 된다. 그녀는"전임 이장이 뒤를 잇는 이장을 적극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큰 힘이 될 것 같다"며"새로 마을일을 맡게된 후배 이장이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무엇이든 열심히 도와줄 생각이다"고 말했다.
취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마을회관에 모여있던 마을 아낙네들에게 고영숙 이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 "잘한 것이 열 개라도 하나라도 잘못하면 말이 나오기 마련인디, 저 사람은 10년을 지켜봤지만 마을사람 누구도 아무말도 안해. 아 글먼 대단한 사람 아니것소. 인자 이장 그만 둔다니께 거짓말 아니라 진짜 섭섭한 마음이 많이 드요. 고생 많이 했지라"면서 칭찬과 아쉬움을 드러냈다. / 장광호 記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