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라운 속살처럼 고운 느낌과 정겨움을 주는 가을의 거리 관방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리라. 수 백년 된 느티나무와 거목들이 들려주는 세미한 음성의 이야기들과 자신을 채색한 고운 옷으로 흙 길 위를 덮어 거닐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자아내는 풍경들이 너무도 정겹다.
그 어디에 서서 포즈를 취하든지 한 폭의 화폭을 담아내듯 배경이 되어주는 정겨운 거리가 있음은 담양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유산인 것 같다.
이 거리에 서서 이런 생각에 잠겨 본다. 이 시대에 마음과 삶이 세상 분주한 일들로 지치고 힘겨울 때, 이곳 관방제를 거닐며, 흙과 거목들과 그리고 겹겹이 쌓인 낙엽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면 조금은 쉼을 얻을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인다.
김우정 작가가 쓴 "수일이와 수일이"(<주>우리교육출판)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수일이는 날마다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에서 온통 공부에 자신의 몸을 내어 맡겨야 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다. 그의 현재의 상황을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게 뭐야. 에이, 방학 동안 학원에만 왔다 갔다 했어!"/ "엄마 때문이야. 우리 엄마 시키는 대로 다하려면 내가 둘은 있어야 해!"
이제 그의 마음은 그러한 자신의 환경에 대하여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더 이상 지금의 상황을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수일이가 그의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이곳 담양의 관방제에 찾아온 가을의 거리와 죽녹원을 거닐수 있다면 아마 그는 또 다른 수일이를 찾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갖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환경에 힘들어했고 어떠한 변화가 생겨나길 고대했지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수일이네 집에서 키우고 있는 진돗개 덕실이가 수일이에게 또하나의 수일이가 있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수일이는 그렇다고 했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냐고 재차 묻자 정말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수일이는 정작 자신의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가 말을 한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이 놀라운 일을 엄마에게 말씀 드렸지만 엄마는 학원을 가기 싫어서 엉뚱한 일을 한다고 믿으려 하지 않고 학원으로 떠밀어낸다.
수일이와 덕실이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덕실이는 손톱을 쥐에게 먹이면 또 하나의 수일이가 될 것이라 알려준다. 수일이는 그것은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이라며 믿으려 하지 않지만, 옛날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해 보자는 덕실이의 제안에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래서 허름한 집에 손톱을 갖다놓고 다시 찾아갔을 때, 거울을 본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수일이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진짜 수일이와 가짜 수일이가 탄생하게 된다. 가짜 수일이 역시 쥐에서 사람으로 변한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 다시 쥐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수일이와 덕실이는 그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모든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 하지만 엄마 역시 공부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으로 알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
진짜 수일이는 가짜 수일이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공부하는 일과 학원가는 일을 하게 하고 자신은 자신이 그처럼 원했던 일들을 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짜 수일이는 이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재미있어 한다. 엄마 역시 변모한 수일이의 모습에 흡족해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진짜 수일이가 원하는 대로 가짜 수일이가 움직여주었고, 가짜 수일이 역시 그렇게 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상황은 바뀌어 갔다.
가짜 수일이에 의해서 진짜 수일이와 덕실이 그리고 그 주변의 환경들이 길들여져 갔다.
엄마에 의해서 수일이와 덕실이 그리고 가정의 모든 분위기가 길들여지듯이 말이다. 수일이는 이러한 변화에 놀라워했고, 가짜 수일이를 자신의 위치에 세워놓고 자신은 또 다른 수일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낼 수 있어 행복한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하는데 그 가짜 수일이를 원상태인 쥐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위치에 쥐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쥐도 이제 싫다는 것이었다.
수일이는 이층 할머니의 도움으로 들고양이를 통하여 가짜 수일이를 내 쫓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찾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됐어. 나도 마음을 새롭게 바꿀거야. 내 진짜 모습을 잃어버리면 안되니까!"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지치고 힘들면 수일이와 같은 마음이 생겨날 것 같다. 그러나 수일이가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듯, 관방제의 거목이 수백년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오고 있듯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면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