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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박환수 교수의 손자병법(46)국가의 개혁은 인재 등용에 있다
장광호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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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1.11  16: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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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어라 하면 毛澤東과 秦始皇이 선두를 다툰다. 모택동은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을 만들었다면 진시황은 바로 그 중국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毛澤東이 1935년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 주변의 지식인들이 毛澤東을 평가하기를 “마오 동지,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孫子兵法뿐이오.”라고 했다.
모택동은 젊은 시절 베이징 도서관에서 司書일을 하면서 수호전, 삼국지연의, 홍루몽, 사기, 한서, 정관정요, 자치통감, 중국지리와 세계지리 등을 통달하였고 손자병법은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인의 90%이상이 농민이었는데 중국 공산당의 간부들은 소련 유학파 출신으로 중국현실과 맞지 않은 마르크스 이론주의자이면서 중국의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더군다나 농촌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毛澤東은 秦始皇을 비롯한 중국의 역사서들과 병법서 속에서 그의 혁명관을 만들었고 농민을 중국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만들었다.

秦始皇을 닮은 카리스마,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평등주의를 들고 일어 난 무수한 농민봉기들, 墨家사상, 道家사상, 諸子百家사상 등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과도 같은 모택동의 능력은 누구도 항거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秦始皇을 멘토로 생각한 모택동은 秦始皇이 축조한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방대한 만리장성을 오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고 진시황은 죽었지만 만리장성으로 15억 중국 인구를 먹여 살리는 중요한 관광자원을 남겨 준 것이다.

秦始皇은 기원전 235년 조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왕족 자초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초는 당시 20명의 妾중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첩의 아들이었다. 이 떨거지 왕족 자초를 조나라 안국군 부인의 양자로 만들고 왕으로 만들어준 인물이 진나라 甲富 呂不韋였다.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이 임신하자 첩을 자초의 부인으로 보냈고 첩에서 난자가 진시황이다. 진시황의 친 아버지는 여불위인 것이다. 진시황은 불과 13살에 왕이 되어 39세에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50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秦始皇이 어린 나이에 중국의 통치자가 되어 중국을 통일하고 개혁과 대업적을 이루는 데는 人才登用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은 주변의 간신들과 섭정으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통치의 성공과 개혁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선발한 인재는 믿고 힘을 실어 주어 사람부터 개혁하였다. 이점을 모택동은 배우고 실천하였다. 통치의 시작도 개혁의 성공도 인재관리에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았던 것이다.

진시황을 중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낸 인재는 李斯로서 이사가 있었기에 중국의 진시황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던 李斯는 진나라 여불위의 식객으로 들어왔지만 여불위에게 천하통일의 비책으로 이간책(離間策)을 제시하여 그 명석함을 인정받았고 진시황에게 추천되었다. 진시황도 자기 나라 박사 700명을 제치고 초나라 李斯를 등용했다. 자기 나라의 잘못은 자기 나라 사람이 알고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진시황은 알았고 그래서 초나라 이사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힘을 실어 주었고 이사는 진나라를 개혁했다. 실제로 李斯는 주변국의 장군과 관료들을 離間시켜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기여하였다.

李斯에게는 쥐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이사가 便所에서 일을 보고 나오는데 변속에서 놀란 쥐가 튀어 나왔다. 또 어느 날은 穀間에 들렸는데 곡간의 쥐는 이사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조롱하듯 곡식알을 까먹고 있었다. 또 길을 가다가 하수구를 보았는데 그 속에서 남은 음식을 먹던 쥐가 놀라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그렇구나. 사람이나 쥐나 또 같구나. 지저분한 변소나 하수구에서 지저분한 먹을 것을 먹는 쥐는 그렇게도 놀라는데 곡간의 쥐는 남의 것을 훔쳐 먹는데도 놀래지도 않는 그것이 어찌 그리 인간과 똑 같은가. 이사는 그 깨달음으로 貧富 地位高下를 떠나 法治主義를 강력하게 적용하였다.

이런 정치관을 가진 이사가 진시황을 보좌하여 개방형으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의 大 事件으로 焚書坑儒를 시행했다. 그러나 분서갱유에서도 말 많은 학자들의 수많은 이론 서적을 태웠지만 국민을 위한 의학서, 점술서, 식목 서적들은 남겨두었기에 강한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국민들은 이를 반겼다.
진시황의 업적인 고속도로, 군사전용도로를 건설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대운하의 건설도 이사의 생각이었다. 運河 덕에 물길이 없는 서쪽으로 물길이 열려 동서 문화를 연결했고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를 연결하고 남과 북이 운하를 통하여 중국이 연결되었다.

진시황은 간축객서(諫逐客書) 즉 인재등용은 그 재주만을 봐라, 지연을 따지지 마라는 이사의 등용방식을 받아 들였다. 李斯는 진나라 사람이 아니어서 진나라를 제대로 볼 수 있었고 그렇게 개혁은 이루어졌다. 요즘 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선인은 조직 개편의 개혁과제를 두고 있다. 흔히 말하는 검찰, 국세청, 국정원, 금감원 등 무소불위의 기관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들을 개혁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시황의 개혁관이다. 이런 기관들은 이사와 같은 외부인에게 개혁을 맡기고 이를 밀어준 진시황 같은 지도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새 정부는 古典을 통해 敎訓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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