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3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46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3월 6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소장이 ‘세계경제를 바꾼 스토리텔링 마케팅’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노동절 휴일 관계로 지난주 조찬강연이 열리지 않았기에 이 강연 내용을 대신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원주민들>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2주 만에 무려 80만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는데, 영화 내용은 이렇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대가 나치 독일과 싸울 때 알제리와 튀니지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두 식민지 청년들이 프랑스 군대에 입대해서 독일군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전사했다. 그런데 1958년 알제리와 튀니지가 독립하자 두 나라 출신의 상이군인과 전몰용사에게 지급하던 연금이 30%로 축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프랑스를 위해서 생명과 청춘을 바쳤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거의 매일 콩코드 광장으로 몰려와 데모를 했다. 그러나 합리적인 주장임에도 프랑스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프랑스 의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소장은 영화 이야기로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파괴력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구체적 사례이기도 했다. 실제로 <원주민들>이 개봉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이 영화를 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연금법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연금을 100%로 환원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한 것이다.
“나는 강연을 하면서 칠판에 섬을 하나 그린 뒤 청중에게 ‘제일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고 묻곤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외롭다’거나 ‘고립무원의 공간이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것을 ‘수렴적 사고’라고 분류한다. 자신도 모르게 굳어진 생각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사실 육지에서 섬을 바라보면 그런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섬에서 섬을 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섬은 사방을 향해서 뱃길이 열린, 무한한 가능성이 넘실대는 공간이다. 나는 이것을 ‘발상적 사고’ 혹은 ‘역발상’이라고 분류한다. 거꾸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뒤집어서 보면 세계의 지평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꿈, 감성, 이야기 파는 시대 도래”

홍 소장은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그런 불가사의한 기적(?)을 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에밀레종’을 사례로 들었다. 실제로 국사책에는 ‘어린 아이를 쇳물에 넣자 거기서 엄마를 애처롭게 부르는 듯 소리가 난다’는 에밀레종 이야기가 없다. 역사적 사실인 ‘성덕대왕신종’이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실’보다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화산업과 서비스산업 시대에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과연 그럴까?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NHL)에서 활동하는 유명선수인 웨인 크레치키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선수냐고? 퍽(Puck)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퍽이 있을 곳을 미리 알고 거기 가서 서 있는 선수다.’ 그런 점에서 ‘이제 정보화 사회의 태양은 졌다’고 선언한 롤프 옌센 전 덴마크 미래학연구소 소장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옌센은 앞으로 어떤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고 있을까? 옌센은 자신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정보 대신 꿈, 감성, 이야기를 파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참고로 옌센의 나라 덴마크에선 안데르센 이야기가 GDP의 5%를 창출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의 물결은 덴마크에만 넘실대는 것이 아니다. 가령 중국의 일반경제 성장률은 8.7%이지만 이야기산업(게임, 만화, 영화, 엔터테인먼트산업 등과 이와 관련된 부수적 산업) 성장률은 27.8%에 이른다. 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일반경제 성장률이 4.6%에 머물고 있을 때 이야기산업 성장률은 8.7%에 도달했다.
“한국이 반도체를 해외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이 4~5조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 작가 조앤 롤링이 개인적으로 창작한 해리포터 시리즈와 그와 관련된 출판, 영화, 만화, 캐릭터 등 부대산업이 창출해낸 부가가치의 총량은 7~10조원에 육박한다. 조앤 롤링과 빌 게이츠가 보유한 부(富)의 크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물론 객관적인 부의 총량만 놓고 보면 게이츠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롤링의 저작권료(1000억원)와 게이츠의 주식배당금(450억원)만 비교하면 상황은 반전된다(2003년 기준). 불공정한 시장독점의 덕을 보는 게이츠와 달리 롤링의 작품은 소비자가 스스로 강력하게 원해서 구매한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더 강력한 부를 창출하는 사람은 롤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주요 동력이 바뀌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야기산업의 하나인 허리우드산업은 군수산업의 뒤를 잇는 2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옌센이 예측한 대로 이미 ‘이야기 부자’가 ‘정보 부자’를 능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이야기산업의 ‘원료 문제’이다.
“이야기산업은 이야기의 원료를 확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허리우드는 지금까지 주로 서구의 역사와 서사에서 원료를 뽑아 썼다. 자급자족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디즈니는 안데르센의 광맥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 자원대국 덴마크의 <인어공주>를 가져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페르시아에서 <알라딘>을, 중국에서 <뮬란>을 가져왔고, 일본의 <레오>에서 <라이언 킹>을 추출해 냈다. 그런데 이야기 자원을 갈취(?) 당하는 나라들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은 면직의 원료인 면화가 부족하자 인도에서 원료를 저렴하게 충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원료로 찍어낸 면직물을 인도에 엄청나게 비싼 값을 주고 되팔았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면 인도처럼 당할 수 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홍 소장의 경고다. 한국 영화 대본이 허리우드로 팔려나가는 것이 바로 그 사례에 해당하는데, 홍 소장은 이것을 마치 한류 수출과 외화 창출이라도 한 것인 양 언론이 묘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산업혁명 시대에 연출된 영국과 인도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이야기혁명 시대의 좌표를 얻으라는 말이다.

“‘대박’이 아니라 ‘쪽박’ 찰 수도”

“대다수의 한국 영화 대본이 허리우드로 팔려 나간 사실을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실제 <괴물>은 100만 달러, <달마야 놀자>는 60만 달러, <시월애>는 40만 달러, <조폭 마누라>는 30만 달러에 팔려 나갔다. 작품 자체를 미국에 판 것과 대본만 판 것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허리우드는 구입한 대본을 가지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서 세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월애>를 가지고 <레이크 하우스>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한국에 되팔았는데, 4600만 달러나 벌어들였다. 40만 달러를 투자해서 100배를 훌쩍 넘기는 이익을 남긴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박지성 선수를 45억 달러에 데려갔지만 단 한 번의 한국 투어로 200억 달러를 챙겨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세계 경제의 흐름이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NBA가 중국의 야오밍을 스카우트한 사례에서도 우리는 적지 않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NBA는 7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야오밍을 5년 동안 쓰기로 결정했다. 흥분한 중국 언론은 뛰어난 중국 선수가 미국 프로농구 무대에서 뛸 수 있게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견의 판단에 불과했다.
“사실 NBA는 일부러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 야오밍을 사간 것이다. 그리고 야오밍이라는 원료를 NBA라는 공장에서 가공을 하며 키워준 뒤 다시 중국 시장에 되팔았다. 중국 TV는 야오밍 경기 장면을 사가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실제로 야오밍이 NBA에서 경기하는 모습이 TV에서 방영되면 중국인 2억명이 시청했다.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NBA는 이렇게 해서 1년에 10억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5년에 7500만 달러와 1년에 10억 달러. 스포츠에서도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통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을 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의도통신 정지환 기자

홍사종 소장의 이력서

▲ 서경대 철학과 졸업
▲ 고려대 경영학 석사
▲ 러시아 헤르첸국립교육대 명예경영학 박사
▲ 세종문화회관 운영과장
▲ 정동극장 극장장
▲ 한국문화경제학학회 이사
▲ 숙명여대 문화관광학과 조교수, 정책대학원 주임교수
▲ 아트노우 사장
▲ 한국문화콘텐츠학회 공연예술분과 위원장
▲ 경기도문화예술회관 관장
▲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
상훈: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제22회 한국연극예술상 공로상, 보관문화훈장, 제1회 한국관광대상 우수상 외
저서: 소설 <비둘기만 날아가다>, 희곡 <섬 그리고 섬>, <잡종지>, <한두레>, <장영실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