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여섯 사람 중 한 명이 되겠소."

영국과 프랑스가 맞섰던 백년전쟁 때의 일이다. 프랑스의 칼레시를 함락시킨 영국은 칼레시민의 잘못을 묻기 위해 시민 여섯 명을 뽑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많은 시민들이 혹시라도 자신이 뽑힐까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바로 그때, 자신이 여섯 명의 희생자 중 한 명이 되겠다고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외스타슈였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목숨을 던지겠다는 외슈타슈의 용기 있는 행동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법률가 장 데르, 또 다른 부자 피에르 등 지도층 인사 5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까. 이후의 상황은 극적인 반전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왕이 이들의 결연한 뜻을 가상히 여겨 교수형 자체를 철회한 것이다. 사즉생(死卽生)의 의지가 칼레시를 살리는 순간이었다.

최근 발간된 <나로부터 시작하는 물결 리더십>(시대의창)에는,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역사적 사례가 상세히 소개돼 있다. 실제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명예(Nobleness)’만큼 ‘의무(Oblege)’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다.

박종달 병무청장이 지난 10일 고위공직자 등 사회지도층 인사 자제들의 병역 의무를 특별 관리하는 내용의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자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이 방침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특정한 사람들의 개인정보가 ‘잠재적 범죄자 리스트’처럼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회적 명분이 강하다고 해도 인권침해의 가능성마저 용인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그런 주장이 서민들에게 먹혀들고 있는지도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평소 한국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런 주장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어디 사회지도층 인사뿐이겠는가. 총선에서 유권자의 외면을 받은 정당과 후보들도 ‘사즉생’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교훈을 가슴에 깊이 새길 일이다.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