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와 놀부'는 권선징악의 유교적 교의를 함축한 가장 유명한 전통 이야기다. 마음씨 좋은 흥부는 복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놀부는 벌을 받았단 이야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를 착한 마음씨 속에서 찾고 있다. 과연 착한 마음씨가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일까? 그렇지 않다. 착한 마음씨 이상의 메시지가 깊숙하게 함축되어 있다. 이른바 유교적인 행위규칙의 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중에 D.캠벨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에 의하면, 서양에서의 행위규칙은 정의(正義)라는 개념을 중심(norm of justice)으로 발달되어 왔지만, 유교 문화권에서의 행위규칙은 책임(責任)이라는 개념을 중심(norm of responsibility)으로 발달해 왔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착하다(good)'는 것의 의미는 '정의롭다'는 것이며, 이 '정의롭다'는 말은 '합리적이고(rational) 공평한(fair)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던진 교훈

그런데 유교 문화권 특히 우리나라에서 '착하다'는 것은 자기 신분에 맞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자기 신분에 맞는 책임이란 곧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원칙에 부합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의로움보다는 신분에 맞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선시되는 행위규칙이 더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가 바로 우리나라가 아닌가?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또는 그것이 진실인가 아닌가 보다는 주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내게 주어진 삼강오륜의 책임을 다 했는가 아닌가가 압도적으로 중요시되는 사회가 우리나라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보다는 "모시던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인간관계의 책임을 지키려는 노력을 더 가상하게 평가하는 관행이 그것의 좋은 예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행위규칙은 인간관계 속에 놓여진 위치와 상관없이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이 착한 것이 되고, 도덕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 가에 따라 착한 행동과 도덕적인 행동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회식 자리에서 연장자는 식사비용을 혼자서 부담해야할 책임을 심각하게 느끼지만, 나이가 어린 사람은 지극히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긴다. 즉, 사람이 모여 있을 때 한국사회에서는 누가 책임을 지고 누가 책임을 안 져도 되는지가 자연적으로 분명해 진다. 군신유의, 부자유친, 붕우유신, 장유유서와 남녀유별이라는 오륜의 원칙이 이런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적시해 주는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적응적인 사람이란 바로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게 주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이런 오륜의 원칙에 맞게 기민하게 행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의 상황 속에서 자기 신분에 걸맞는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우리는 '착하다'고 하고, '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점에서 흥부와 놀부 이야기 속에 숨겨진 메시지는 단순히 '착하고 마음씨 곱다'는 뜻만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책임을 다한 흥부와 제 책임을 다 못한 놀부로 대립 구도를 만들려고 한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즉, 흥부는 삼강오륜의 책임을 다하려고 애썼지만, 놀부는 삼강오륜에 규정된 책임을 저버린 사람이다. 여기에서 정의로움, 합리성, 공평성 등의 개념은 아주 부차적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두 가지 책임이 크게 부각된다. 하나는 형과 동생 사이의 책임이며, 다른 하나는 제 집에 살러 들어온 제비를 돌볼 책임이다. 흥부는 동생으로서 형에 대한 존경과 순종의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제 집에 살러 들어온 제비를 돌볼 책임을 다했다. 이런 두 가지 책임을 다했기에 흥부는 착하고 마음씨 곱고 본받을 인물이다.

그러나 놀부는 달랐다. 형으로써 동생을 돌볼 책임을 다 못했고, 제 집에 살러 들어온 가엾은 제비를 돌볼 책임을 다 못했다. 그래서 놀부는 나쁜 사람이었고, 마음씨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놀부는 부끄러운 어른이었다. 그는 흥부에게는 부끄러운 형이었고, 조카들에게는 부끄러운 삼촌이었으며, 제비에게는 부끄러운 집주인이었다. 자기 몫의 책임을 다 못하여 부끄러운 인물의 대표 격으로 그려진 것이 바로 놀부인 것이다.

흥부와 놀부의 교훈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보호할 책임을 다하라'는 메시지 말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부끄러운 어른이 여전히 많다. 너무 부끄러운 짓을 해서 제3자인 나조차도 어른인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여학생 선수에 대한 성폭력 관행?

지난 2월 11일에 KBS의 '쌈'이라는 시사기획 프로가 "여학생 스포츠 선수에 대한 성폭력 실태"를 보도한 바 있다. 어린 여학생 선수를 보호하고 지도할 책임을 맡은 코치와 감독들이 학교 합숙소에서 성폭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명백한 책임의 방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놓은 변명은 더욱 부끄러웠다. 여선수 관리의 한 방법이라는 말도 있었고, 오래된 관행을 왜 새삼스럽게 문제 삼느냐고 항의하는 말까지 있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의 여학생 스포츠 선수들이 그런 성적학대를 받아 온 것이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며, 어느 특별한 소수의 정신 이상자가 일으킨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여학생 스포츠 사회에 관행처럼 지속되어온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인 것이 부끄럽다. 우리의 어린 여학생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모른 채 국가니, 민족이니, 발전이니, 개혁이니 하고 흰소리에 매달려 온 것이 부끄럽다. 우리 기성세대는 과연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기성세대는 현재 이 순간 바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보호하고 책임져야할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여학생 선수들이 야만의 본능과 폭력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공허한 추상적 논쟁에만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보호할 것은 보호하고 막을 것은 막으면서, 적어도 어른에게 주어진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책임은 다하면서 그런 이야길 했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 여학생 선수들의 절규가 느껴진다. 어른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