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노예>라는 R. 라이시의 책이 있다. 부유한 사람이 노예일 수가 없고, 노예가 부유할 수 없다고 하는 일상적 선입관에 배반하는 제목을 가진 책이다. 이 책은 부유하기는 하되 노예에 불과해진 성공한 현대인의 패러독스를 묘사한다. 원래의 영어 제목은 ‘성공의 미래(The Future of Success)’라는 것으로써,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적 성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 전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비슷하다. 병든 사회 속에 사는 개인은 병든 삶을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공통점 때문이다. 프롬이 선택의 자유 앞에 무력해진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이 책은 부유할수록 더 일을 해야 하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현대인의 우상이 된 기크와 쉬링크

그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의 주된 생존방식이 신기술 경쟁으로 특징 지워지면서 부유할수록 그 부를 지키기 위한 기술개발에 더 바빠지게 된 패러독스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성공을 최선의 가치로 밀어붙이는 현대의 신 경제 질서는 개인으로부터 삶을 차압해간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일에 더 몰두하기 마련이며, 일에의 몰두는 삶의 여유를 해체시킨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친구도 잃고, 가정도 잃고, 지역사회의 정도 잃어가게 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기술혁신을 주된 경쟁으로 하는 (미국식)신경제의 등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에의 몰두를 극대화 시켜서 일과 삶의 균형을 철저히 파괴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기술혁신의 치열한 경쟁이 주종을 이루는 신 경제 사회에는 두 가지 적응적 인간유형이 있다. 하나가 기크(Geek)이고, 다른 하나가 쉬링크(Shrink)이다. 이 두 인간형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 지독히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몰두하는 일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기크는 과학, 기술, 예술, 문학, 수학, 컴퓨터, 사이버 게임제작 등등의 어떤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 푹 빠져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데, 결국 그런 몰두가 모두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한편 쉬링크는 특정 영역에 대한 전문성보다는 대중의 인기와 관심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는데, 그 몰두도 결국 돈에 대한 욕심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갈망하는 것 등등 충족되지 않은 대중의 공통적인 문제를 푸는데 더 관심이 있다. 오늘날의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한 정부나 기업 또는 어떤 단체의 경쟁력은 바로 이 두 인간 유형의 잘 조화된 협동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기크와 쉬링크는 자기의 일에 목숨을 걸 듯 매달린다. 일류대학 입시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는 고3 입시생처럼 그들은 일에 지독히도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한 기크와 쉬링크는 남이 부러워하는 경제적 보상을 얻어 부자가 되는데, 그 보상으로 삶의 여유를 얻기보다는 그 보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에 몰두해야한다. 노예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유해질수록 더 바빠진다. 일과 삶의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어 가는 것이다.

성공한 기크와 쉬링크는 현대인의 우상이다. 특히 경제적인 부유함이 사람을 여유롭고 자유롭게 하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일부의 기성세대가 이런 젊은이들을 양산시키고 있다. 이 책은 이점을 안타깝게 지적하고 있다. 부유함이 결코 여유로움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에 미친 부자는 과연 행복한가?

저자인 라이시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부유해질수록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그래서 삶이 더 여유로워 질 것이라는 케인즈 이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면서, 100년 전보다 수 십 배나 더 부유해진 오늘날 선진국의 중산층들이 일에 매여서, 얼마나 귀중한 삶을 희생당하고 해체당하고 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펼쳐서 읽는 순간부터 긴장감이 앞선다. 주제가 심각해서라기보다는 로버트 라이시라는 이 저자의 용기와 결단 때문이다. 일에 파묻혀서 가정과 가족, 친구, 그리고 지역사회를 잊고 지내던 그가 어느 날 결단을 내려서 직장에 사표를 낸다. 미국 클린턴 정부의 노동부 장관직으로부터 사퇴를 하는 것이다. 그의 사퇴는 가정으로 돌아가려는 한 아버지의 사퇴가 아니라, 일에의 몰두를 무한대로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병리적 경향에 용감하게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용기라 할 수 있다.

노동 장관으로서 꼭 해야만 할 일을 그는 해낸 것이다. ‘일에 몰두해서 부자가 되는 삶의 길’을 미화만 해온 오랜 인류의 관행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그는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개발연구원 월보에도 게재된 이 칼럼을 필자의 양해를 얻어 본지 독자와 함께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