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에게 48.9%의 지지를 몰아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몰아준 국민. 이 국민은 이후 40번에 걸친 재보선에서 노무현 세력을 응징했다.

그걸로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지방선거에서도 참패의 수모를 안겼다. 그리고 1년 반. 이제는 냉정을 찾았을까 싶었지만, 노무현 싫다며 당을 깨고 나간 정동영에게조차 '너 (그래도 과거에) 노무현 덕 봤잖아'라며 사상 가장 인색한 표를 던졌다. 그 여파는 임기 내내 노무현과 각을 세웠지만 '진보적 색채'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직격탄을 맞은 민주노동당에까지 미쳤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노무현이 나라를 팔아먹었나, 그렇다고 전두환 노태우처럼 비자금을 만들었나, 언론을 탄압하고 여론을 압제했나.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엄청났다'고. 지금 국민은 다음 총선에서도 '노무현 그림자가 1%라도 보이는 당'을 심판할 준비가 돼 있다. 이 지점에서 이런 공포스런 염려 샘솟는다. 다음 대선 때까지 이 심판론이 맹위를 떨치는 것은 아닐지 말이다.

국민은 왜 한나라당을 선택했을까

국민은 노무현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본질적으로 '못 가진 자'의 편에 서서 민생을 챙겨주길 기대했다. 노무현은 그러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부응하지 못할 수 있다. 대통령이 무슨 슈퍼맨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술사인가. 노무현은 그러나, 너무나 뻔뻔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국민들이 몰라 준다"라는 볼멘소리를 쏟아내기가 일쑤였다. 국민이 맡긴 신성한 권력으로 정치적 흥정이나 일삼는 대연정 제안이란 결정적인 패착도 뒀다. 주가는 뛰고, 수출실적은 상승곡선을 그었지만 그것은 가진 자들의 파이였다. 한미FTA, 비정규직법 등 부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정책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 거 할 거면 차라리 이회창을 뽑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였다.

결국 사회는 양극화됐다. 이로 인해 전통적 범여권 지지층마저 180도 등을 돌렸다. 서민 계층이라 할 수 있는 강북, 노동자, 20~30대, 호남 출신. 모두 적진으로 투항해 버렸다. 전통적 한나라당 지지층은 어땠나. 틈만 나면 가진 자의 권익을 흔들려는 노무현 정권이 밉기 짝이 없었다. 투표일 당일. 강남의 투표구마다 줄 서는 이들로 북적였고, 기표소에서 유독 ‘쾅’ 소리가 컸다고 하지? 세종 때나 연산군 때 나라 경제 형편은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곤궁함을 애통해 한 세종과, 주지육림에 파묻혀 폭정과 학정을 일삼은 연산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명 차별됐다. 그렇다. 문제는 '태도'였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목격된다. 민생으로부터 멀어진 노무현에게 실망을 느낀 국민은, 그런데, 좀 더 민중 친화적인 민주노동당을 외면하고, '가진 자'의 주구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을 택했다.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재벌들이 살판 나,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더 위축될 것이 뻔하고, 노동자의 권익이 침해당할 소지가 커지고, 따라서 민생이 피폐해질 것이 분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을 택했다. 이 선택의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결국 국민은 ‘어떻게 해야 노무현이 실패했다고 낙인찍을 수 있을까’ 이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노무현의 굴욕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한나라당 지지를 한 것이다. 노무현은 알고 있을까. 이런 총체적 민심 이반을.

노무현이야 떠날 사람이라지만 남아있는 ‘친노’세력들이 더 걱정이다. 이들의 정치 인생이 구만리인데, 당장 코 앞에는 낭떠러지만 있다. ‘친노’는 노무현의 각성과 참회를 마지막까지 막은 ‘말리는 시누이’였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극대치에 이른 상황이다. 더 큰 ‘굴욕’은, 이명박 정권이 자충수를 둬서 나락으로 떨어져도 국민이 ‘친노’를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이런 정서에 기댄 (‘이명박 추락’ 이후를 노리는, ‘친노’의 정치적 재기를 국민이 결코 원치 않다는 점을 잘 아는) 이회창의 등장은 더욱 주목된다.

노무현 정권서 덕본 사람은 퇴진?

대통합민주신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등 소위 ‘진보개혁적 노선’의 당의 활로는 그런 의미에서 뻔하다. 노무현 시대의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서 덕 본 사람들은 최소한의 정치적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전면에서 퇴진해야 옳다. 그리고 노무현에 덕 보지 않은 인물과 세력을 전면에 배치해야 할 것이다. ‘쇼가 아니냐’는 조롱도 당했지만, 한나라당은 당사도 천막으로 옮겼고, 수차례에 걸친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씻김 굿’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동성 있는 자기 변신 없이 ‘BBK 특검’에 의존해 안티체제로 총선을 치르려 한다면, ‘노무현 그림자’를 안고 경쟁하는 것으로, 당연히 또 한 번 고배를 마시게 될 것이다.

필자도 한 때 ‘친노 인터넷방송 매체’에 몸담았다. 그 안에 있었을 때 나름대로 신자유주의 반대, 친미 사대주의 반대 등 진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물론 경영진 중에 누구도 그런 필자의 지향점을 폄훼하거나, 못 하도록 제동을 걸거나, 또는 일방적으로 노무현만 칭송하도록 압제하지 않았다. 정말 마음껏 방송했다. 그러나 월급을 제 때에 받지 못한 적이 수두룩하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했건만 언론을 경영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문제 삼으면 ‘돈 밖에 모른다’는 경영자의 비난성 반박에 직면했다. 상징적이지 않나? “국민의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면 “밥그릇에 연연하는 천박한 민도”로 대응하는 현 집권세력의 태도도 이랬으니 말이다. (필자는 그래서 퇴사 이후 일체의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단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국민이 회초리를 들 때, 무릎 꿇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고 싶다. 안 할 것은 안 하겠다며 다짐하는 모습도 목격하고 싶다. 이것만이 ‘정권 박탈 세력’의 유일한 살 길이기에 그렇다. /김용민(여의도통신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