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25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5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승효상 종합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가 ‘이 시대 우리의 도시와 건축’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우리의‘마당’이 21세기 건축의 비상구”

“나는 이로재(履露齋)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로재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고사에서 연원한 것이다. 옛날에 한 가난한 선비가 부친을 모시고 살았는데, 새벽에 아침 이슬을 밟으며 문안을 갈 때마다 일부러 웃옷을 걸쳤다. 부친이 밖으로 나오면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덥혀진 옷을 건네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로재는 결국 ‘효성이 지극한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을 뜻한다. 사무소 이름을 이렇게 붙인 데는 특별한 사연도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베스트셀러를 발간하기 이전의 가난한 학자였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집을 설계해준 적이 있는데, 설계비를 제대로 지불하기 어렵게 되자 200년 된 현판을 선물로 주었다. 그 현판에 쓰여 있던 글씨가 바로 ‘이로재’였다.”

한국 현대건축의 쌍두마차로 평가받는 김수근과 김중업의 영향력 아래 건축계에 입문했지만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중에 ‘비움의 구축’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철학을 정립한 승효상 대표.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향연장인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받는 등 국제적 명성까지 얻었지만 정작 그는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이카루스가 추락한 진짜 이유

“지난 2001년 발생했던 9.11테러 당시 테러리스트들이 세계무역센터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이유를 건축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당연히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가치에 주목했을 터인데, 그 핵심은 건물의 높이에 있었을 것이다.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공격함으로써 뉴욕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 나아가 미국과 서방세계 그리고 자본주의에 전면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가치 때문에 이 건물에서 근무하던 약 7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세계무역센터와 같은 초고층빌딩을 흔히 ‘마천루(摩天樓)’라고 부르는데, 직역을 하면 ‘하늘을 닦는 건물’이란 뜻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자만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른바 ‘높이’에 대한 숭배는 인간이 생겨나면서부터 존재했던 본능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됐듯이, 모든 물체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직립 보행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그 직립 자체가 중력에 항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출발한 것이 바로 건축이다.

“인간과 높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의 전설이다. 이카루스의 아버지 달로스는 크레타섬의 미노스궁을 설계한 사람인데, 미노스 왕의 미움을 받아서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달로스는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붙인 날개를 만든다. 그러나 중력으로부터의 해방감에 흥분한 이카루스는 ‘너무 높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추락한다. 이것은 아버지를 업신여긴 아들의 비참한 최후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신(神)의 잔혹한 복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바벨탑이 붕괴한 원인은 언어 소통의 혼란이 아니라 하늘에 오르겠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신의 복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중력에서 벗어나 하늘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빚어낸 원형이 건축이라는 것이 승 대표의 해석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하늘의 신과 지상을 연결시키기 위한 건축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 인도의 스투파(유골을 매장한 인도의 화장묘)도 그러한 좌절된 인간의 욕망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바벨탑의 고대적 버전의 미니어처라는 것이다.

“일상적 집보다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중층화(中層化)와 목조건축 양식을 취한 우리나라의 다보탑도 그런 연장선 위에 있는 건축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건축물에는 일종의 미니어처를 만들어서라도 땅에서 벗어나 하늘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배어 있는 셈이다. 그러다가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높은 천정과 넓은 내부 공간을 확보하게 되는데, 고딕시대의 퀼른 대성당이 그러한 하이테크 건축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인간은 높이에 대한 콤플렉스와 하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건축을 통해 인간의 자존을 과시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착공해 바로크 시대에 완성된 걸작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만인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교황 1인을 위한 건축’에 불과했다.”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은 건축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신적 자유와 물질적 자유가 확장되긴 했지만 동시에 도시화의 물결도 거세게 넘쳐흘렀다. 런던의 경우 7평짜리 방 하나에 20~30명이 거주를 해야 했다. 르 꼬르뷔제 등 일단의 건축가들이 20세기 초에 신도시 운동을 전개한 이유도 이러한 도시화 문제와 무관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르 꼬르뷔제가 1930년대에 그린 설계도는 엄청난 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켰다. 널찍하게 떨어져서 그려진 고층건물, 풍부한 녹지와 공원의 배치, 쾌적한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설계도는 실제로 현대도시의 모체가 된다. 도시를 설계하면서 주거지역, 공업지역, 상업지역으로 공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도로 변에 짓는 건물의 높이와 밀도까지 제한하는 규제 방식도 이때부터 정착됐다. 겉으로만 보면 굉장히 근사한 실험이었고,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만인을 위한 건축’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세워진 도시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모든 도시에 빠짐없이 적용된 도로의 위계화, 도심과 부도심의 계급화, 중심가와 변두리의 양극화는 과연 인간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을까? 도심의 상업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부도심의 근린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갖지는 않을까? 일각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건축가들의 도전적 질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한스 홀라인이 발견한 가치

“불행하게 한국도 이러한 현대도시의 틀에 박힌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한국의 신도시는 ‘급조된 도시’의 전형으로 집중 연구해야 할 부정적 대상이 되고 말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야합의 산물인 분당 신도시는 그렇게 탄생했고, 붕어빵 같이 찍어낸 도시가 일산, 평촌, 산본 등으로 번져갔다. 지역 명칭만 다를 뿐 어떤 개성과 차이도 없는 도시가 잇따라 세워진 것이다. 신도시는 더 이상 삶의 터가 아니었다. 재산 증식의 수단이자 부동산 전시장에 불과했다.
18세기와 20세기의 서울이 그려진 지도를 본 적이 있다. 산수화를 닮은 18세기의 서울 지도 위에서는 자연과 도시가 평화롭고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지만 20세기의 서울 지도 위에서는 물류의 이동을 상징하는 도로만이 생경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축과 도시의 모습은 무엇일까. 승 대표는 자신이 직접 참가했던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슬로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축 행사인 베니스 비엔날레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내놓은 선언은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인 것”(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었다고 한다.

“덜 예쁘게 꾸미는 것이 더 윤리적인 건축이 된다는 슬로건을 보고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비엔날레에서는 한스 홀라인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의 출품작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물 위에 큰 판을 띄워놓고 그 위에 하얀 모래를 깐 뒤 돌 몇 개를 가져다 놓은 단순한 작품이었는데, 언론은 이를 두고 윤리적 건축의 원형이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은 일본 교토의 서북부에 있는 사찰인 용안사의 정원을 흉내 낸 것이었다. 한계에 부닥친 서구 건축이 동양에서 탈출구를 찾고자 했던 몸부림의 산물인 셈이었다. 나도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문득 우리의 ‘마당’을 떠올렸다. 용안사 정원이 닫힌 공간이었다면 우리의 마당은 열린 공간이었다. ‘비움의 구축’은 그 때 얻었던 깨달음의 결과였다. 그러한 개안(開眼)은 나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불리는 산토리니보다 더 아름다운 마을이 우리의 ‘달동네’라는 새로운 발견도 선물했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승효상 대표의 이력서

▲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 서울대 공학 석사
▲ 공간연구소 대표이사
▲ 북런던대학 건축인테리어 디자인학부 객원교수
▲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객원교수
▲ 김수근문화재단 이사, 사무총장
▲ 경주고도보존회 이사
상훈: 대법원장 표창, 한국건축가협회상, 한국건축문화대상, 김수근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외
저서: 이 시대 우리의 건축, 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 건축 사유의 기호, 비움의 구축 외
작품: 한국종합전시장, 청주국립박물관, 서울법원종합청사, 주미한국대사관저, 베이징 M-City 마스터플랜, 베를린 페펴베르크박물관, 북경 전문대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