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19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1일 COEX 인터콘티넨탈호텔 다이아몬드룸에서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창조한국의 기회와 과제’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매년 1월 말이 되면 세계 각국의 정상, 지식인, 기업인들이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인 다보스에 모여서 일주일 동안 토론을 벌인다. 국제적 조류의 향방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서 나는 이 행사에 꼭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다보스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일자리 문제이다.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금 세계 지도자들이 고민하고 있다. 자칫하면 일자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을 이끌어간다는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돼 있다. 이러한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세상을 바꿔야 되겠다는 절박감이 나에게 용기를 내도록 했다.”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고립된 한국

최근 대선 출마를 선언한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대다수 기업이 해고를 강행할 때 거꾸로 일자리를 늘려서 예비조를 만들어 근로자에게 휴식과 학습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데 회사가 망하기는커녕 도리어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시아 최고의 직장’으로 선정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강연의 상당 부분을 일자리 문제 언급에 할애했다.

“일자리는 국가 지도자의 최고 관심사가 돼야 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기업형 정부론’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창조적 정부론’도 그런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클린턴은 대선 출마를 하면서 ‘일자리 2000만개를 만들 테니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그의 회고록 <마이 라이프>에는 ‘나는 오늘 현재 몇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는 표현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인 48장에서 ‘나는 드디어 250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국민과의 약속을 그것도 초과 달성한 클린턴이 다보스에 오면 참석자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낸다. 앙겔라 메르켈이 중소기업과 손잡고 2006년 무역흑자 2100억달러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실업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 전 사장은 한국이 이런 세계적 흐름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국제적 고립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그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1999년 전 세계 공공기구와 민간기업에 호소하고, 그 2년 후인 2001년 발족된 ‘글로벌 콤팩트’를 하나의 사례로 들어서 설명했다.

“글로벌 콤팩트는 ‘21세기 지구촌 서약’으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약 3000개의 민간기업을 비롯해 전문가조직 등 4200개 정도의 기관이 이 서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지난 7월 5일 제네바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의 주재로 바로 그 글로벌 콤팩트 7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몇 달 전에 반 총장의 초청을 받았던 나는 그러나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대회에 참석하기 몇 달 전 급히 글로벌 콤팩트 한국협회 준비모임을 3~4회 갖고 약 50개 기업의 서명을 받았다. 그런데 대회에 참석하고 나서 귀국해 보니까 국내 신문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때 한국이 얼마나 국제적 조류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나라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을 향해 끊임없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쳤던 국내 언론이 아닌가. 그런데 글로벌 스탠더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글로벌 콤팩트’를, 그것도 한국인 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이 주재한 국제행사를 한 줄도 보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녕 몰라서 보도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보도하지 않은 걸까.

“글로벌 콤팩트에는 인권, 노동, 환경, 반부패 등 4개 분야에 걸쳐 모두 10가지 원칙이 명시돼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기업은 실질적인 결사의 자유 및 집단 교섭권을 인정한다’(3조), ‘기업은 고용과 직업에 관한 차별을 철폐한다’(6조), ‘기업은 금품 강요 및 뇌물 수수 등을 포함하는 모든 형태의 부패에 반대한다’(10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국내 최고의 기업이 노조가 없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OECD 회원국 중 가장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해내고, 재벌 총수가 부패 문제로 감옥에 들락거리는 상황에서 아마도 이들 3개 조항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국은 비정규직이 4%에 불과하고, 영국도 6%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 전 사장은 “비정규직이 55%나 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면서 “신자유주의를 아주 잘못 배워서 신자유주의 종주국에도 없는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고 꼬집기도 했다. 재벌의 부패를 청산하자고 주장하면 좌파로 매도하는 국내 언론의 왜곡된 자세도 비판했다.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의 초빙을 받고 러시아에 가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올해에만 러시아에 1400억달러의 외국인 직접투자가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이자가 하나도 붙지 않은 돈이 들어오고, 덩달아 기술이 공짜로 들어오고, 미래의 시장 판로를 보장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소기업 상황은 어떤가. 심한 경우에는 18%의 이자를 내고 있다. 상식적으로 이자를 11% 이상 내라는 것은 사업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대부업법은 이자를 66%까지 허용하고 있다. 이런 나라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다. 다른 나라처럼 4~5%의 이자나 무이자(FDI)를 쓰게 해야 한다.”

문 전 사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근로자들이 살인적인 과로 체제에 떠밀려 교육을 통한 재충전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비판했다. 19세기에 뜨거운 교육열 하나로 일어난 한국이 지식사회인 21세기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위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과 일본은 일을 많이 하는데 유럽은 너무 일을 안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30~40% 더 일을 많이 한다. 이 비율은 그나마 대기업이 평균치를 낮춰져서 그렇게 나온 것이지 중소기업에 가 보면 보통 2600시간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산업체 근로자의 사고율과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10만명이 다치고, 3000명이 죽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과 그 가족의 아픔과 불행은 차지하더라도 국가가 부담한 경제적 손실만 15조원을 넘어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그 15조원을 아까워하지도 않을뿐더러 10만명의 아픔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다치지 않았다고 공동체의 문제에 무감각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반기문 사무총장을 좌파라고 해서야

시종 차분한 목소리로 연설하던 문 전 사장도 이 대목에서는 조금 강하게 목청을 높였다. 이어서 그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일자리를 갖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절규,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것도 모자라 3배나 급등한 현실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사회 지도층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이제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로벌 콤팩트를 주도한다고 반기문 사무총장을 좌파라고 매도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로자 권익 신장과 반부패 운동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반 사무총장의 근황을 감추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세계가 이미 바뀌었는데, 더 이상 우리만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그 변화의 선두에는 지도층이 서야 한다. 지도층의 부패에 대해서 더 이상 관대하면 안 된다. 과로를 허용하고 조장하는 기업과 정부에게 레드카드를 보여주고, 그것이 명백하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과로를 없애고 평생학습을 실시하는 것이 우리의 살 길임을 선언하도록 해야 한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문국현 전 사장의 이력서

▲ 한국외대 영어과 졸업
▲ 서울대 경영학 석사
▲ 1974년 유한킴벌리 입사, 사장
▲ 학교법인 유한학원 이사장
▲ 생명의 숲, 평화의 숲 국민운동 공동대표
▲ 한국최고경영자(CEO)포럼 부회장
▲ 대통령자문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 위원장
▲ 이화여대 경영대학 겸임교수
▲ 서울대 환경대학원 초빙교수
▲ 서울대 CEO지속가능경영포럼 교수?회장
▲ 피터드러커 소사이어티 이사장
상훈: 전경련 국제경영원 최우수경영인상, 제13회 일가상, 금탑산업훈장, 제19회 경영자대상, 2007 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 외
저서: 유한킴벌리-세계가 배우는 한국기업의 희망, 도시의 생명력 그린웨이, 지구온난화의 부메랑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