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 있다. 꽃이 지기 시작하니 이번엔 사방에서 죽순이 솟아오른다. 죽록원에 오르니 쭉쭉 뻗은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바닥에 깔린 죽로(야생차)는 죽로대로 연두빛 이파리들을 밀어 올리기 바쁘다. 굳은살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여린 싹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실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습진 날 물빛 화선지처럼 온 세상의 풀빛 색채를 몽땅 빨아들인 대숲은 고요하기만 하다. 시샘하듯 키를 재는 대나무들이나 죽로의 새싹들, 모기를 쫓기 위해 심어놓은 측백나무까지 숲은 완벽하리만큼 조화롭다.
그 가운데 외롭게 앉아있는 팔각정이 마치 자신도 숲인 양 의연하게 한 자리 하고 있다.
죽록원엔 크고 작은 그리고 다양한 모습의 대나무가 참으로 많다. 각기 다른 크기와 모습들의 대나무, 바닥을 기는 차나무, 경비병처럼 간간이 서있는 측백나무들까지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잘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는 대나무만큼 사람들도 참 많다.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 한바탕 어울려 한세상 살다 간다. 꽃들처럼 흐벅지게 웃어보지도 못하고 질펀하게 살지도 못하는 짧은 삶이 바로 인생인줄도 모르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아웅다웅거린다.
좁은 굴레에 갇혀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다툰다. 오로지 자신의 잣대로만 남을 재며 끊임없이 비판한다. 끼리끼리 어울려 편을 가르기도 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는 목청껏 소리 높여 틀렸다고 매도하기도 한다.
'나는 너와 다르다', '내 생각과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어떤 사고에서 기인된 것일까.
필리프 사시에의 책 중에 '똘레랑스'라는 말이 등장한다.
'똘레랑스'는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서 파생된 단어로 프랑스인의 깊은 사상적 기저(基底)이다. 영어로는 tolerance로 관용, 아량, 인내를 뜻한다. '똘레랑스'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절충해서 합일점을 찾는 타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서로 다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똘레랑스'한다는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견을 바꿀 수도 있지만 바꾸지 않고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품성의 하나가 아마도 이 '똘레랑스'가 아닌가 싶다. 특히 좁은 지역사회일수록 경향은 더욱 심하다.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상대방의 말과 생각에 귀 기울이며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면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서로 다툴 일이 없을 것 같다. 자연과 더불어 더욱 조화로운 세상이 될 것 같다.
죽록원에서 만난 자연들은 서로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고 키가 작다고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어리석은 우리네 인간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내리듯...
팔각정에 누워 맞는 바람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세상만사 잠시 접고 지그시 눈을 감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내 있는 곳이 선경(仙境)이요 내가 곧 신선(神仙)일진데 세상 무엇을 탐하랴.
"언서음하불과만복(偃鼠飮河不過滿腹)", 쥐는 작은 동물이라 큰 강물을 아무리 배불리 마셔도 배 하나 가득 이상은 더 들어가지 않는다 했으니 사람도 제각기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우리 사는 이 세상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