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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지명 천년 기획/㉞월산면 광암(廣岩)·신계(新溪)·오성(五星)·용암(龍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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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0  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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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산면 광암리 소재 천주교 공원묘원 전경
   
▲ 월산면 오성리 군수동마을 회관
   
▲ 월산면 신계리 신계제
   
▲ 월산면 용암리 홍암마을 표지석
   
▲ 월산면 용암리 마을 입구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광암1리 사암(四岩)마을

사암마을은 1780년경 담양국씨 국치문이 안식처를 찾고 다니다 이곳에 와서 명당터라 생각하고 정착하였다. 마을 동쪽에는 구선봉이 있어 아홉 신선이 놀고 있고, 서쪽에는 노적봉이 있어 재물이 가득하고, 북쪽에는 광대바위가 있어 모든 액을 막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암천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어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라 하여 정착했다고 전한다. 사암마을 이름을 속명으로 ‘니아우’라 부르는데 마을 주변에 비석과 같은 바위가 4개 있었다 하여 네 바위라 부르다가 니아우로 바꿔진 것이다. ‘추성지’에는 십팔곡면에 산정, 사암, 개양이 있었고 또 어느 때인지 광면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데,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산 광암리 사암마을로 되었다. 광대산에서 뻗어 나온 광대바위 밑에 산정리가 있었는데 남양홍씨와 전주이씨에 의해 개척되었다. 1940년까지 몇 집이 살아오다가 지금은 인가가 없어졌다. 광암마을에서 보면 서편에 광덕마을, 남쪽에 월천마을, 북쪽에 용면 쌍태리, 동쪽에 서리고개 옆 개양동이 있다.

 

2)광암2리 월천(月川)마을

월천마을은 1530년경 전주이씨에 의해 개척되었다. 또 1780년경 평가채시 채규신이 창평 오강에 살다가 이수덕의 딸을 맞아 이곳으로 와 보니 산수가 아름답고 자손이 번성할 곳이라 여겨져 정착하였다 한다. 월천마을은 옛날 광암리가 십팔곡면에 속하였다고 하나 월천마을이라는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암의 한 마을로 있다가 호수가 늘어나면서 월천마을로 분리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을이 반달형이라서 월(月)자를 따고, 마을 옆에 맑은 냇물이 흐른다 하여 천(川)자를 따서 월천마을이라 하였다한다.

 

3)광암3리 광덕(廣德)마을

광덕마을은 1450년경 옥천조씨 조인이 순천 주암에서 살다가 관직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서 살았다. 그러다 1453년 계유정난 때 피난차 내려오는 길에 추월산 밀재에 앉자 잠시 쉬다 산세를 우연하게 둘러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광덕마을의 모습을 보고 500~600년을 편안히 안주할 만한 지형이 되겠다 하여 정착하였다. 내려올 당시 옥천조씨, 경주이씨, 대구배씨 등 세 가정이 함께 내려 오다가 옥천조씨는 광덕마을, 경주이씨는 월산마을. 대구배씨는 중방마을로 정착하였다고 전해온다.

 

4)신계1리 용산(龍山)마을

용산마을은 1500년경 초계최씨가 전남 광양에서 살다가 3형제가 분가하면서 장형인 최산두가 마을 동북쪽 ‘신거리’라는 곳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마을이 형성되지 못하다가, 계룡산 기슭인 이곳으로 이주하니 인가가 늘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언제부턴가 계룡산의 ‘계’자를 빼버리고 ‘용산’이라 불렀다. 용산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창평면 장북면에 속해 건정실(乾井谷)이라 불렀다.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을 통폐합 할 때 월산면 신계리 용산마을이라 하였다. 마을 동쪽에 박산마을이 있으며 북쪽에는 홍암마을, 서쪽에는 장성군 북하면 대흥리와 접하고 있다.

 

5)신계2리 박산(朴山)마을

박산마을은 1600년경 전북 임실에 살던 함안조씨 조정래가 이곳에 와 보니 넓은 황무지가 있는데, 주변에 산수가 좋아서 개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박씨가 터를 잡아 박산이라 했으며, 마을 이름은 박뫼라 불러오다가 한자로 쓰기 위해 박산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조의 창평군 장북면에 속해 있을 때 신평리 또는 유곡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마을인지 알 수 없다. 박산마을 남쪽으로 올라가면 배실이라는 옛날 마을 터가 있었는데, 어느 때 어느 성씨가 얼마나 살다가 폐촌이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6)오성1리 군수동(郡守洞)마을

군수동마을은 진원박씨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장성 진원면에서 월산면 도동으로 입향한 진원박씨의 손 박팔상이 장택고씨와 결혼하고 분가하고자 새 삷의 터를 찾아다니다 이곳에 이르렀다. 오장산이 우뚝 솟아 옆에 차일봉을 이루고 동남으로 뻗으면서 마을을 소 구시와 같이 오붓하게 둘러싸 살기 좋은 곳이라 여겨 정착하였다. 그후 담양국씨, 김해김씨, 달성서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일구었다. 군수마을은 일설에는 군수가 난 마을이라고 얘기도 되지만 그런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일제 때 길을 내며 오장산 혈만 자르지 않았으면 지명을 따라 군수가 나왔을 곳이라는 얘기들도 오간다. 하지만 그 보다는 마을 형국이 소 여물 주는 구시통 모양이라 원래 ‘구시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는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구시동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다 보니 군수동으로 바뀌게 뒨 것으로 보인다.

 

7)오성1리 내동(內洞)마을

내동마을은 약 800년전 고려 명종 때 담양국씨 국중호가 처음 터를 잡았다. 국씨는 창평에 살고 있었는데 둘째아들이어서 분가를 하기 위해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곳은 좌우산이 오목하게 감싸고 있고 시냇물이 서출동류하여 기름진 옥토에 관계수가 풍족하니, 농촌으로는 살기 좋은 곳이 되겠다는 생각에 정착하였다. 그 후 제주양씨, 원주유씨, 김해김씨가 들어왔다고 전한다. 내동마을은 동서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동쪽은 오성마을, 남쪽은 월산마을, 서쪽은 광덕마을, 북쪽은 월천마을이다. 담양군에 내동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 백동리 내동, 삼만리 내동, 대전면 병풍리 내동, 무정면 내동, 오성리 내동 등 5곳인데, 이 가운데 안 내(內)자로 딱 떨어진 마을은 오성리 내동마을 뿐이라고 한다.

 

8)오성2리 원오성(元五星)마을

원오성마을은 450년 전 진원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장성 진원에 살던 박천서가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이곳이 산세가 좋고 들이 넓어서 농사짓기에 제격인 곳이라 여겨 정착하였다. 마을 뒤편 서쪽으로 오장산이 다섯줄기로 뻗어 내리면서 다섯 장군이 나올 길지라 하여 마을 이름을 오성리가 했다. 옛날에는 담양군 광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 통폐합으로 담양군 월산면 오성리라 하였다. 면소재지에서 4km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은 동서 장방형을 이룬다. 마을 동편은 군수마을, 남방은 복정마을과 농암마을, 서편에는 월산마을, 북방에 월천마을이 있다.

 

9)용암1리 용금(龍錦)마을

용금마을을 창설한 사람은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전설로는 달성서씨와 함풍이씨가 조선 중엽 임진왜란을 피해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안석골(내금곡)에 들어와 움막을 짓고 살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1660년경 전북 순창에 거주한 교동인씨의 처 능성구씨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이름은 뒷산에서 금이 놀고 있음으로 누루 황(黃)자와, 동편과 서편의 들 이름 내금곡과 하내금곡의 쇠 금(金)자를 넣어 황금동으로 불러오다가 1700년경 현 용금으로 불렸다. 마을 남쪽에 도동마을, 서북방에 신계리, 북에는 홍암마을이요, 동북방에 소쿠리재를 넘어 월평리가 있다.

 

10)용암2리 홍암(紅岩)마을

홍암마을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신라시대에 진주정씨 정인성이 진주에서 살면서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을 순회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약초 캐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파평윤씨를 만나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을 듣고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이후 담양읍 양각리 사미정에 관련된 문헌에 따르면 이태조의 이복형 완풍대군 이원계의 차남 양도공 천우는 숙부인 이성계의 위업을 도와 개국정사좌명공신이 되었고, 그가 죽은 다음 날 여양군 굉이 태종 17년 5월(1417)에 또 세상을 떠나자 세종 2년(1420)에 정종비 정안왕후와 자매지간 이었던 정부인은 굉의 아들 사형제를 데리고 내려와 현 양각리 2구 용문사 부근에 정착하여 마을을 성촌하였다고 한다. 그 후 아들 월성군 명인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강의 서쪽에 사미정을 건립,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그런데 여양군 이굉과 재종간이 되는 세종대왕은 종친의 낙향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의 월산면 능동에 전토와 대명산 일대 63정을 사패지로 내렸다. 그 사패지를 따라 월성군의 차남 병절교위파 효강이 홍암리로 입향하며 이후 마을이 전주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성군 북하면 적암리라 하였는데, 뒷산의 우뚝 솟은 바위가 붉어 적암이라 부르다가, 이조 말엽에 홍암리가 불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담양군 월산면 홍암리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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