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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㉜용면 도림(道林)·두장(斗長)·쌍태(雙台)·용연(龍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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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9  14: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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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면 추월산 보리암
   
▲ 용면 용연리 마을 전경
   
▲ 용면 쌍태리 죽림정사
   
▲ 용면 두장리 마을 앞 전경
   
▲ 용면 도림리 담양호
   
▲ 영산강 시원지 담양 가마골 용소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도림리 도림(道林)마을

도림마을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마을 서쪽 산 너머에 있는 안되뱀이라는 곳에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당시 약탈과 도둑이 심하여 이곳으로 옮기고 용천면 되뱀이라 이름하고 살았다한다. 임진왜란 전에 이미 평산신씨 시조 숭겸의 20세손 신종구가 입촌하여 터를 잡았는데, 임란이 일어나 불행하게도 마을이 전멸되었다가 평산신씨 23세손인 심금수가 추월산 보리암 아래 석굴암에 피신해 있다가 내려와 폐촌된 마을을 다시 개척하였다고 한다. 도림리 신씨 후손들은 이 유래를 잊지않고 추수가 끝나면 옛날부터 콩 한말을 보리암에 시주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용천면 되뱀이가 용면 도림리로 개칭되었다. 도림리라 이름한 것은 신선한 숲속에 길이 열린 마을로 사람의 도리와 도덕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마을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1975년까지만 해도 도림리 옆에 산성리가 존재하였는데 담양호가 완성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어 도림리에 편입되었다. 산성마을은 담양댐 건설 때 발굴된 마을의 지석묘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2)두장1리 두지동(頭芝洞)마을

두지동마을은 양천허씨 23세손 허항이 1710년 숙종 때 두장리 634번지에 초가 4칸을 지어 두지동이라 명명한 것이 성촌의 시작이 되었다. 전해오는 말에는 원래 본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속칭 동녘골에 와야동이 있었다. 여기엔 탐진최씨 최장자 씨족들이 거주하였는데 양천허씨 수가 임란 때 피신 차 왔다가 최장자 가문의 간곡한 권고에 의해 정착한 것이 양천허씨들의 입향조였다. 그러나 이 마을은 산으로 에워싸이고 으슥한 곳이라 도적 떼들의 약탈에 배겨 날 길이 없어 씨족들은 순창으로 떠나고 허씨가 지금의 두지동으로 이거하였다. 허항이 두지동마을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연유가 있었다. 첫째는 마을 뒷산에 노적봉이 있는데 이 산에는 말바위, 구시바위가 있어 추월산 10보 거리에 승지(勝地)가 있다는 설에 따라 이를 아마회두(兒馬廻頭)형 명당으로 보고 이곳을 선택한 것이라 한다. 아마회두란 어린 말이 어미말을 보고 고개를 돌린다는 형국을 말한다. 둘째는 마을 뒤편이 노적봉인데 이 부근에 노서하전이란 명당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노서하전은 아침에 배고픈 쥐가 노적을 보고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인데 노적봉이 뒤주의 형태익고 또 뒷산이 다채로운 풍치림과 노송이 조화롭게 형성되어 있어 이곳이 자손만대에 영화가 있을 곳임을 확신하고 성촌하여 마을 이름을 두지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3)두장2리 장찬(長贊)마을

장찬마을은 옛 서평마을과 장찬마을을 합하여 두장리 2구로 행정개편되었다. 1620년경 광산노씨 계순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역이 광할하고 들이 샘바다라 농사짓기에 좋은 곳이라 여겨 터를 잡고, 자자손손이 번성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서평은 1674년 안동권씨 상필이 삼만리에서 이주해 와 터를 잡았다. 장찬리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에 장터가 있다하여 장터(장챙이)라 불러 오다가, 마을이 오래 빛나라고 장찬리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서평은 장찬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평리라 하였다. 1921년 두지동과 합하여 두장리라 하였으며 1961년 두장리 2구로 행정개편되었다. 이 마을은 추월산 줄기인 오장산에서 월산면 옥산리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동산이 뻗어 내려온 산세가 그 모양이 마치 낚시질 하는 형국이다. 그 중 장찬마을은 빡주(낚시도구 이름) 터를 말한다.

 

4)쌍태리 쌍태(雙台)마을

쌍태마을은 추월산과 밀재의 광대바위산에서 오장산으로 뻗어가는 힘찬 준령 아래에 월산면 광암리와 경계를 이루는 상월, 태월, 삼태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삼태는 마을 앞에 삼태산, 중태산, 하태산으로 부르는 오장산 세줄기 봉우리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서 이름 붙여졌고, 태월과 상월은 마을 오른쪽에 있는 반달형의 산 형국을 따서 붙여 졌다. 상월은 풍천노씨 삼담이 서울서 임란을 피해 광상 삼향동에서 살다가 새로운 터전을 찾던 중 이곳이 산세가 좋고 또한 그 한가운데 펼쳐져 있는 평탄한 황무지를 농토화하는데 좋겠다고 판단하여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진원박씨는 삼태에서, 김해김씨는 테월에서 살았다 한다. 쌍태리는 풍광은 좋으나 물이 귀한 것이 흠이다. 지역이 높고 돌이 많아 비가 오면 한꺼번에 물이 밀려오다가도 하루만 지나면 말라 버린다. 2001년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는 식수가 떨어져 소방차가 1주일 동안 물을 공급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마을 앞 관정을 다시 만들고 간이상수도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담양댐의 물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농사에 애로를 겪곤 한다.

 

5)용연1리 분통(粉桶)마을

분통마을은 추월산을 끼고 담양호를 돌아 전북 순창에 이르는 지방도 792번 도로에 근접해 있다. 마을 한가운데로 시냇물이 흘러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임진왜란을 피해 진주강씨 강충남이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말해 주듯이 주변에는 노거수가 산재해 있어서 마을의 풍치를 더해 주기도 한다. 옛날 전북 완주군 초곡동에 진주강씨 강충남과 전주이씨 부부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 차 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 중앙에 새로운 터를 잡고 개척을 시작한 것이 본 마을의 시초였다. 강충남은 피난차 이 마을에 들렀다가 마을 뒷산이 옥녀단좌(玉女端坐) 명당인 것을 알고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주변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옥녀봉을 비롯 비룡산이 두루 감싸고 있고 치마바위와 비녀골 등이 있었다. 또 마을 동쪽에 선녀봉과 가세바위가 있어 경관이 수려했다. 그래서 농토를 개척하고 통사골과 분재실골에 정착하였다. 그 이전에는 인가가 전혀 살지 않은 맹수와 밀림만으로 꽉 차 있었으며, 그 후 이천서씨를 비롯하여 최, 이, 김, 손, 권, 조, 박씨 성이 모여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아온 마을이다.

 

6)용연2리 가마골

가마골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계곡의 중심에 있는 용추사가 526년 혜총과 혜증 두 선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해 오므로, 가마골 골짜기에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사찰의 건립과 때를 같이할 것으로 본다. 사찰 창건에 필요한 기와를 굽기 위한 가마터가 생기면서 민가가 생기고, 이름도 가마골로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가마골은 호수는 적으나 지역은 넓은 곳이다. 1989년도에야 전기가 들어온 오지이다. 계곡이 깊고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 나무를 해서 전북 순창까지 재를 넘어가서 팔아 생활하였고, 용추사 밑에까지 가서 농사를 지었다. 가마골 최상단에 일제가 펄프공장을 운영하였으나 교통이 나쁘고 수원이 부족하여 폐쇄하였으며, 이후 한때 목장이 들어섰지만 소 값이 하락하자 이것도 문을 닫았다. 또한 예전에 평심원이라는 결핵환자 요양소가 있었는데 열칸정도의 집이었다. 가마골 주민들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 도우면서 견더왔다. 그리하여 수려한 풍경의 고향마을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다.

 

7)용연2리 용평(龍平)마을

용평마을은 영조(1750년경) 때 진삼봉씨가 이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입향조인 진씨는 원래 담야호에 수몰된 노루목리에서 살다가, 산중으로서는 비교적 광할한 편이며 농토를 조성하는데 조건이 좋은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된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마을 이름을 새터로 불러오다가 등룡의 전설이 있는 용소와 산간 지역으로는 넓은 평야를 갖고 있는 옆 마을인 대흥리와 합하여 용평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순창과 담양으로 통하는 세갈래 길이 교차된 지점이라 하여 일명 삼거리라고도 하였다.

 

8)용연3리 용동(龍洞)마을

용동마을은 순정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마을로 임진왜란 때 김해김씨가 난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목탄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통리, 용평리와 함께 용연리로 속하게 되었으며, 1961년 10월 1일부터는 용연3리로 행정 운영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앞산에 유명한 소년바위가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따서 소년촌이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때 용동이라 개칭하였으나 옛 선인들의 뜻을 따라 다시 소년촌이라 하였다. 담양호 건설로 청흥리에 있다가 수몰된 용면북초등학교를 이설하였는데 소년촌이라는 명칭이 선조들의 말처럼 적중했다고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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