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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지명 천년 기획(30)수북면 대방(大舫)·대흥(大興)·두정(斗井)·수북(水北)·오정(梧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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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5  10: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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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북면 성암국제수련원 전경
   
▲ 수북면 수북리 사창마을
   
▲ 수북면 송정마을 앞 전경
   
▲ 수북면 두정리 경산마을 당산나무
   
▲ 수북면 대흥리 마을입구 전경
   
▲ 수북면 대방리 마을 표지석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대방1리 송정(松亭)마을
송정마을은 1580년경 조선 성종 때 단양우씨 중시조 정평공 인열의 후손들이 경기도 파주에서 이거하였다. 정평공 인열의 4세손 윤은 아버지가 사화를 당하자 형제들이 각처로 흩어져 은둔생활을 하다가 용구산 지맥의 화개봉(진산) 아래 터를 잡고 정착하여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천장봉 동쪽 화계산 밑 낙락장송이 울창한 가운데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살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송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정자 이름은 거북 구(龜)자 지형을 담아 ‘구천정’(나주목사 우필환이 건립)이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없어져 전하지 않고 있다. 1943년경 광주에서 채씨가 들어와 ‘구암정’(다른 이름으로는 대각정이라고도 불렀음)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대홍수로 이 역시 유실되어 사라지고 현재는 ‘거북집’이 지어져 있다. 수북면의 최북단에 있는 용구산 지맥의 진산 자락과 삼인산 자락의 산저촌에 형성된 마을이다.

2)대방2리 원대방(元大舫)마을
원대방마을은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조선 선조 때 여양진씨 직장공 영찬의 8세손 순신이 나주에서 고서면 산덕리로 옮겨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같은 무렵 의령남씨와 함양박씨도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선조 15년(1582)에 마을 3성씨가 수북학구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1668년경 현종 때 신평송씨 노송당 희경의 11세손 명주가 다시 입향하였다고 한다. 명주는 국지사가 잡아 준 원대방 터에서 부를 누리며 살았는데 송순의 세보에 의하면 면앙정 시호 문제로 전라도 관찰사와 각 고을 수령들이 다수 참석하여 논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처음에는 대방(大方)으로 쓰다가 만물시생지박주형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대방(大舫)으로 고쳐 불렀다. 이 마을의 입향조 진의집은 문과에 급제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중심부에 느티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그 느티나무가 지금은 노거수로 성장하여 여름철이면 마을 주민들의 피서지로 애용되고 있다. 원대방과 중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마을은 특히 다른 마을보다 대밭이 많아서 죽세공품과 죽피제품이 많이 생산되었다.

3)대방3리 포박·남전 마을
대방3리는 소재지 진등을 비롯하여 포박, 옥대동, 남전, 해방촌과 함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동쪽은 수북천을 경계로 주평리가 있고, 남쪽은 국도를 경계로 풍수리와 나산리 일부가 소재지로 형성되었다. 서쪽은 오정리가 위치하고 북쪽은 원대방이 위치한다. 포박마을은 돌과 자갈로 충적된 오래전의 수북천 땅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포박과 남전마을은 1960년대부터 정부가 시행한 수북천의 제방공사가 준공되기 전 천변좌우에는 돌과 자갈로 쌓여 있었으며 땅은 찔레꽃 넝쿨로 뒤덮인 황무지였다.

4)대흥리 대흥(大興)마을
대흥마을은 원대흥, 만화동, 바지마을로 구성된 마을이다. 원대흥은 구전에 따르면 함양박씨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하나 그 내력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마을 북쪽 전답 주변의 오래된 무덤들이 함양박씨 묘라고 연로한 노인들은 말한다. 그 후 조선 숙종(1690) 때 초계정씨 중시조 양평공 승의15세손 소유가 경상남도 역동에서 살다가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형성 당시에는 ‘갈현리’로 부르다가 조선조 말경에는 노령산맥의 큰 봉우리에서 줄기를 따라 내려왔다 하여 큰 대(大) 자에 무한한 번영을 위해 흥할 흥(興)자를 써서 ‘대흥리’로 개칭하였다 한다. 마을 서쪽 만화동은 월계리로 불러왔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대흥리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33년 나산에서 이거한 연안인 김종기가 마을 뒤에 일본인이 가꾸어 온 과일나무의 꽃과 마을 동쪽의 꽃나무 잔등의 백일홍 꽃이 만발하는 것을 보고 만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궁산1리 월궁산(月弓山)마을
월궁산마을은 정조 4년(1780) 초계정씨 천호장공파 시조 배걸의 27세손 정치성이 봉산면 산정에서 살다가 이곳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현풍곽씨도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고 허씨, 박씨, 주씨, 김씨 등도 들어와 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겼고 활촉이 동서남북에 있어 마을 이름을 활뫼 또는 궁산(弓山)이라 하였다 전한다. 원궁산은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에 위치한다. 왕봉산 지맥이 내려와 구릉지를 이룬 곳에 남향을 한 주거지를 이루었다. 동쪽에는 경산이 위치하고 남쪽에는 주평이 있다. 서쪽은 수북천을 경계로 대방리가 있고 북쪽은 왕봉산이 솟아 있다. 마을 앞으로는 돌과 자갈들로 충적된 지상으로 물빠짐이 좋아 전, 답 작물의 혼작의 조건을 가졌다.

6)두정리 용정·경산·두동 마을
두정마을은 왕봉산 아래 용정, 경산, 두동으로 부르나 어느 때부터 그렇게 불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두동의 두(斗)자와 용정의 정(井)자를 합하여 두정이라 했다. 두동은 뒷산의 지세가 거북 모양인데 그 꼬리부분에 마을이 있다 하여 ‘말월’이라 많이 불렀다. 경산은 왕봉산의 지맥이 능선을 이루고 내려온 구릉지에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그 지세가 고래 형국이라 한다. 1977년 담양호의 준공으로 간선수로가 개설되어 오래전부터 불러온 무너미고개로 물이 넘어와 농업용수가 공급되고 있다. 두동과 경산은 거북과 고래 형국으로 이제 물을 만났으니 마을의 번영이 기대된다고 말한다. 말월은 임씨 집성촌이라 전해 오지만 고증할 길이 없고 영조 때 김해김씨 김우택이 대덕면 비차리에서 진외가인 경주김씨를 따라와 들어왔고, 현종 때 함풍이씨 이정헌이 궁산리 구암촌에서 들어와 정착하였다.

7)수북리 진등마을
진등마을은 원래 포백, 남전 등과 함께 대방리 3구로 행정 운영돼 왔으나 2004년 수북리가 만들어지면서 편입되었다. 1920년 면사무소가 오정리 99번지에서 대방리 338번지로 이전되면서 급속히 발전되었고 진들마을도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진등마을은 원래 물이 부족하여 땅이 잡종지나 묘지로 쓰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면사무소, 초등학교, 지서 등 관공서가 들어서며 급속히 발전하였다. 특히 담양댐이 생기고부터 마을이 더욱 발전하고 인구가 늘기 시작하더니 수북리로 편입되면서 각종 음식점이 들어서며 수북리의 면소재지 역할을 강화해 주고 있다.

8)오정1리 강동(江洞)마을
강동마을은 조선 중종 때 진주정씨 시조 정헌의 9세손 이하가 경상도 진주에서 외조부 이휴원의 주선으로 산세가 수려한 이곳에 정착하여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인조 때 함양박씨 중시조 월영당 이홍의 4세손 태초가 창평에서 이곳으로 와 정착하여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사창동은 조선 철종 때 전주이씨 중시조 금원군 11세손 수형이 이곳이 장차 크게 번성할 곳이라 생각하여 본 면 용구동에서 이거해 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정씨, 고씨, 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그런데 사창동은 2004년 수북리가 만들어지면서 그곳으로 편입되었다. 강동마을은 수북면 서북쪽에 있는 삼인산 자락의 구릉지대에 주거지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대방리가 자리하고 남쪽은 고성리가 있으며 서쪽은 삼인동이 인접해 있다. 마을 뒤로는 삼인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9)오정2리 삼인동(三人洞)마을
삼인동마을은 고려 때 명양현청이 있었던 곳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나 고증할 자료는 없다. 영조 26년(1750) 유학자 박해언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삼인산에 도착하여 보니, 산세가 가히 좋고 산 아래는 만물이 태생하는 터라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북쪽에 몽성산과 용구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무등산의 영봉이 삼인산과 정상을 마주보며 눈아래 펼쳐진 너른 들과 그 한복판을 영산강이 흐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평화로운 마을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기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삼인산 아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 이름을 삼인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삼인산은 원래 봉우리가 셋이어서 사람 인자 세 개를 겹쳐 놓은 형태라 하여 삼인산이라 이름하였다. 그 형태가 형제지간이 서로 우애하며 사는 모습처럼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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