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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지명 천년 기획/(27)봉산면 신학(新鶴)·양지(陽地)·연동(淵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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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31  09: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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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면 양지리 마을회관
   
▲ 봉산면 신학리 봉산초등학교
   
▲ 봉산면 신학리 마을 전경
   
▲ 봉산면 연동리 보호수
   
▲ 봉산면 연동리 마을 전경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신학1리 신학(新鶴)마을
신학마을은 여양진씨 성량이 1750년대에 광중시 장등동에서 이 마을에 입촌하였는데 농사를 지을 여건도 좋고 살기가 편안함을 느끼고 1년 후 친형 성채를 오게 하여 두 형제가 살게 된 것이 입향 유래가 된다. 전주이씨는 이보다 수십년 전에 장성 북하면에서 입향하였고, 남평문씨는 1780년에 임진왜란 때 병조참판 월천군 남평문씨 빈의 14대손 영주가 수북면에서 입향하였고, 같은 연대에 진주 강씨가 역수 수북면에서 입향하였으며 밀양박씨는 그 후에 대덕면에서 입향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 1300년경 마을 뒤 산록에 신곡사라는 사찰이 이었다. 신학마을은 식수에 염기가 있었고 수량도 부족한 편이었으나, 사찰은 지대가 높으면서도 어느 곳에서나 땅을 파면 물이 샘솟아 식수가 풍족하였다. 지금부터 40여년 전 좌상석불과 기와 조각 일부가 출토된 바 있다. 이 사찰이 없어진 연유나 연대 등은 알 수 없고 현재는 그 절터에 옹달샘 흔적만이 남아 있고 그 주변일대는 농지로 변하여 버렸다.

2)신학2리 학동(鶴洞)마을
학동마을은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이웃마을에서 각 성씨들이 개별적으로 이주하여 살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김해김씨, 여양진씨, 밀양박씨는 이웃 신학마을에서, 안동김씨는 기곡리 방축마을에서, 탐진최씨는 장성군 북하면에서, 은진송씨는 광주 하남에서 각각 이주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학동마을은 위치와 지형이 마치 큰 언덕과 흡사한 산허리를 두고 신학마을과 한마을처럼 이웃하고 있다. 처음 생겼을 때는 신곡마을의 새터라는 뜻에서 샛마을 또는 마을내 우물이 좋다하여 샘마을로 불러왔다. 그 후 풍수지리학자가 이 마을은 신곡마을과 더불어 ‘학 터’에 해당된다고 하여 학동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속 및 신앙으로는 설날과 대보름 전후 및 주택 신축이나 이사 시에 징, 꽹과리, 장구를 이용하여 농악놀이를 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아이들이 쥐불놀이와 불싸움을 하고 놀았다.

3)양지1리 양지(陽地)마을
양지마을의 시조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에 평산신씨가 살면서 초시 벼슬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순흥안씨의 시조 자미의 14세손 만성이 조선조 1569년 입향하였고, 이어 동래정씨 시조 지원의 19세손 양화가 1629년에 입향하여 지금까지 두 성가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았다. 현재는 그 외에 광산김씨 등 7개 성
씨가 거주하고 있다. 처음 마을 이름은 못 지(池)를 써서 양지리(陽池里)로 불리었으나, 1900년경 땅 지(地) 자 양지리(陽地里)로 개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 소재지에서 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전면이 동북향으로 춘하추동 아침햇살을 제일 먼저 받는다는 뜻에서 양지리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 하천 가운데 수백 년된 정자나무가 있어서 마을의 휴식처로 이용되었으나 1965년 하천 제방공사 때에 제거하여 버렸다.

4)기곡4리 상덕(上德)마을
상덕마을의 입향조는 송순의 고조되는 송희경이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걸쳐 승문원에 재직하다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함에 이를 반대하고 낙향하여 1455년에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그 이후로 송씨가 대대로 자작일촌하여 살아 왔으며, 그 외에 한 가구씩 살고 있는 배씨, 박씨는 송씨 가문의 외손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은 처음에는 갈모리(乫毛里)였다. 그러나 송순의 출생지이며 지금까지 송씨 일가로 자작일촌 마을을 이어 오면서도 그렇게 부르게 된 연유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1758년 간행된 추성지에도 갈모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300여년 동안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14년에 상덕리로 개명되었다. 마을 뒷산 능안제 주변에 매년 겨울에 황새(백두루미)가 찾아온다고 전한다.

5)양지2리 월전(月田)마을
월전마을은 독서골과 새터로 구성되었다. 조선 정조 4년(1780) 양지마을에서 안씨와 정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기초하였다고 하나 고증이 없어 확실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또한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옥살이를 한 은진송씨 가문의 송흥진이 은신처를 구해 찾아온 곳이었는데, 당시에는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송흥진은 광주 양림동 숭일학교에서 교사직에 있으면서 미국 타마자 목사와 양지교회와 개동교회를 설립하고 선교 활동을 하면서 마을을 일구었다. 월전마을의 지명 유래는 달이 뜨면 증암천에 비추는 모습이 밭 모양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한쪽은 이웃 와우마을이 소의 형국이고 월전마을이 송아지 형국이라 해서 ‘독소골’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또 옛날 훈학을 하였던 서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독서골’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독서골에 양지초등학교가 들어서 지명대로 되었다고들 얘기한다. 마을을 일구고 교회를 개척하였던 송흥진이 양지초등학교를 세울 당시 교회의 많은 부지를 희사하였다. 이 ‘독서골’과 ‘새터’를 합하여 지금의 월전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6)연동1리 연동(淵洞)마을
연동마을에 최초로 입향한 분은 흥양이씨이다. 흥양이씨 효공은 남원도호부사 재임 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세조1년(1455) 연동에 정착하였고, 광산김씨 언모는 선조 26년(1593)에 대덕면에서, 그리고 함양박씨 도제는 1733년 화순군 동면에서, 의령남씨 학진은 헌종 1년(1835) 월산면 생촌에서, 연안김씨 구연은 고종 19년(1882) 수북면 나산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연동의 최초 마을 터는 마을 동쪽 전전과 그 주변 웃마실이라고 전해온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이곳에 수백 호의 집들과 곡식창고가 있었는데 임란으로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위치로 마을이 옮겨왔으며, 웃마실에는 지금도 샘이 있고 밭에는 기와 조각이 가끔 출토된다. 연동은 한때 지동으로 불려오다가 조선조 말기에 연동으로 개칭되었다. 연동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 이전은 알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 담양부 기곡면에 속했다. 기곡면은 일제의 한일합방으로 두면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14년에 목면, 두면, 우면을 통폐합하여 구암면으로 개칭되었고, 연동마을은 구암면에 속하였다. 구암면은 1931년에 오늘의 봉산면으로 개명되었다. 연동마을의 지세는 용이 꾸틀거리는 형국이다. 용은 못이 있어야 하므로 한때는 지동(池洞)으로 불려 오다가 조선 말기에 연동(淵洞)으로 개칭되었다. 1775년 8월에 창건되어 1880년에 철폐된 연동서원지가 있었고, 봉산제, 삼강유허비가 있다.

7)연동2리 죽림(竹林)마을
죽림마을은 약 500년전에 나씨와 엄씨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고, 마을 앞 500년된 느티나무를 보고 입향 연도를 추정한다. 조선 중종 5년(1510)에 능성 구씨 문하가 들어오고 중종 25년(1530)에는 남원양씨 성복이 들어 왔으며, 헌종 11년(1845)에 흥천용씨 영연이 강진에서, 철종 6년(1855)에는 전주이씨 영이 월전리에서, 철종 11년(1860)에 장흥 고씨 시순까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죽림마을은 경기도 광주에서 내려온 구씨 3형제가 수북과 죽리마을에 들어왔는데 제일 큰형님이 죽림마을에 정착하여, 최초 마을 이름을 대서반으로 불렀다고 한다. 연일정씨들이 득세하던 시절 서민들은 갓을 못쓰게 하여, 인근에서 갓을 쓰고 다니다 들키면 송강정에 불려가 매을 맞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유일하게 이 마을에 갓을 쓴 사람은 구씨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선조 중엽에 마을 주변 야산에 대나무가 자연발생적으로 무성히 자라서 울창해 죽림을 이루었는데 이 마을도 죽림과 같이 번창하라는 뜻을 담아 죽림마을이라 개칭하였다. 죽림마을은 행정구역상 연동리에 속하나 연동1리 연동마을보다는 유산2리 마산마을과 더 가까이 지낸 곳이다. 현재 20여개 성씨가 살고 있는데, 공학박사(박충년), 대법관(이성렬), 검사(구본민) 외에 의사와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판소리를 했던 이 마을 출신 용인덕 씨는 회갑잔치를 비롯한 큰 잔치에 기생을 데리고 다니면서 공연을 하던 담양에서 유명한 소리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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