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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27)무정면 오례(五禮)·오룡(五龍)·오봉(五峰)·정석(貞石)·평지(平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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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30  16: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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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면 오룡리 석불입상(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 무정면 오봉리 오봉마을 앞 전경
   
▲ 무정면 평지리 평지마을 표지석
   
▲ 무정면 정석리 정석마을 전경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오례1리 오례(五禮)마을
오례마을은 고려시대 1200년경 고령신씨가 장성산(오례리 산17번지로 짐작되며 우시동 또는 장선까끔이라 함)에 터를 잡았으나, 도적 떼들의 횡포에 못이겨 지금의 오례촌으로 옮겨 살게 된 것으로 전한다. 광주-곡성 간 도로와 담양-곡성 간 도로변에 무운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으며, 1968년 5월 14일 오례1구로 지금까지 행정 운영되고 있다. 오례마을의 처음 이름은 반룡리였으나 조선시대로 추측되는 역원인 오례원이 있어 고관들이 쉬어 갔는데, 한 원님이 마을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예를 가르쳐 준 후 이 마을을 오례촌이라 불렀다 한다.

2)오례2리 등용(登龍)마을
등용마을은 무운산(武雲山) 아래에 자리하고 뒤쪽에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며 앞에는 오례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용이 뒷산인 무운산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형국이라 하여 등룡동(登龍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남해고속도로를 내면서 용의 허리 부분이 잘려 나가 마을의 젊은 청년이 많이 죽었다. 그 뒤부터 마을 주민이 큰 성공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받으러 미국에 간 강광진씨가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오기 일주일 전에 죽는 등 재앙이 있었다. 맘은 크게 먹으나 이루어 지는 것이 없고 이상하게 사고도 많이 나곤 하였다. 남해고속도로 전에는 마을이 무탈했으나 그 뒤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생기니 용의 허리를 고속도로가 자르고 지나간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3)오례3리 신촌마을, 회룡마을
회룡(回龍)마을은 조선 선조 33년(1600) 경주정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지금은 정씨는 살지 않고 정조 4년(1780) 광산김씨가 입촌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신촌은 오례리의 새터 마을이었는데 예전에는 깨목쟁이로 불렀다. 그 후 6.25 동란때 광산김씨가 피난 나와 안주한 것을 시작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촌(新村)은 말 그대로 새터라 하여 신촌이라 불린 것이다. 그리고 1914년 회룡과 신촌을 통합하여 오례3구로 행정개편하였다. 마을 이름은 오례천이 용의 모습으로 마을 앞을 감싸고 돌다가 다시 뒷산에서 승천하는 형국을 보여 회룡동이라 했다. 마을 앞 정씨 문중산은 까마귀 혈이고 회관 뒷산이 쥐 혈, 산 너머 계곡 건너에 떨어져 있는 고양이 머리 모양 바위가 있는 곳이 고양이 혈로, 마을은 그 가운데 위치하는 명당터이다.

4)오룡1리 외당(外堂)마을
외당마을은 고산봉의 남쪽 작은 동산을 등에 업고 오례천 도로를 따라 일자형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로 내당에 비해 밖에 있다 하여 외당이라 불렀다.  오래전 밀양박씨와 남양홍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담양군 무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운산리, 외당리를 합하여 뒤산의 모양이 다섯 마리 용처럼 생겼다 하여 오룡리라 정하고 무정면에 편입시켰다. 마을 안 오룡리 325번지에는 1914년 무면사무소가 설치되어 1928년 1월 15일까지 무면의 소재지였다. 1916년에는 오룡리 339번지에다 4년제 무정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45년 행방되고 나서부터 학생들은 담양보통학교로 통학하였다.

5)오룡2리 내당(內堂)마을
용봉 아래 두 갈래로 곱게 뻗어 내려온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산마루가 앞을 가리고 있어 동구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름 그대로의 내당마을이다. 조선 중종 27년(1532) 금성나씨가 현재의 마을에다 터를 잡았다 하나 지금은 그 후손이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마을 좌우 쪽에 용 모양의 다섯 산마루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하여 오룡동이라 한 뒤, 산고개 안에 있다 하여 내당리라 하였다. 조선 영조 34년(1758)에는 담양군 도호부 무이동면에 속하였으나, 그 후 무이중면에 속했다. 1914년 외당리 일부를 합하여 무면 오룡리로 개칭되었으며, 1932년에는 무정면 오룡리라 했다. 1961년 10월 1일부터 오룡리 2구로 행정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공수부대가 들어와 마을을 감싸 안아 옛날 무면(武面)이라는 지명에 맞게 되었다고 놀라워한다.

6)오봉리 오봉(五峰)마을
오봉마을은 매봉산, 담주산, 새까끔, 말뚝봉, 영천산 등 다섯 개 봉우리 밑에 서북쪽을 향해 병풍처럼 곱게 감싸진 유서깊은 마을이다. 창평면 광덕리와 경계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광주호의 용수가 흐르고 있다. 고령 성종 14년(955)에 뒷산인 담주산에 담양읍을 설치할 때 정, 이, 김, 송씨 4성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터를 잡아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현종 3년(1662)에 곡부공씨와 삭녕최씨가 입촌하였다고 하며, 순조 12년(1812)에 밀양박씨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정석리 정석(貞石)마을
화봉산 남쪽 아래 자리잡고 있는 정석마을은 고려초 1000년경 진주소씨가 터를 잡았으나 지금은 한집도 살고 있지 않으며, 1397년경 함양여씨가 들어와 자작일촌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당현(堂峴, 당고개)마을이었는데 한일합방과 더불어 정석으로 바뀌었다. 마을 동서남북에 선바위가 두 개씩 마치 문처럼 서 있다고 하여 정석이라 개칭된 것이다. 정석마을은 도로변에서 보면 닭 모양의 닭터라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여씨 종가댁이 있는데, 거북이가 엎드린 형국의 터로 지금도 21대손이 같은 터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마을을 둘러싼 산의 형국이 뱀, 황새, 개구리 형인데 ‘까치골’, ‘황새고개’, ‘칠사골’, ‘개구리봉’으로 불린다. 이 지명들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뱀 일곱 마리가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하여 내려오는데 까치골에서는 까치들이 지저귀고, 앞에 황새골에서는 황새가 버티고 있어 개구리를 잡아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8)평지리 평지(平地)마을
평지마을은 설산 줄기의 남쪽 기슭에 오례천과 서암산을 끼고 자리한 마을로 조선 선조 25년(1592) 김해김씨와 초계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평지마을은 높은 데 있다 하여 고정리(高亭里), 일명 높은쟁이라고 하고 청석돌이 많아 청석으로도 불렀다. 그리고 이 마을을 골목으로 나누어 윗뜸이, 갓뜸이, 새터로 불러오다가 조선 말 지형이 평평하다 하여 평지리라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불러 오고 있다. 지명 유래로는 마을 뒷산에서 푸른 돌이 나온다 하여 청석으로 했다가 일제 때 평지마을로 바꿨는데 이곳은 무정면에서 제일 평평한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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