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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⑳대덕면 문학(文學)·비차·성곡(聲谷)·용대(龍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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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11  12: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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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 용대리 석교(담양향토유형문화유산 제1호)
   
▲ 대덕 문학리 고인돌(청동기 시대)
   
▲ 대덕 만덕산 옥천사(현 법주사) 전경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문학1리 내문(內門)마을

내문마을은 신라 말엽 약 900년 전에 생겼다고 전해오나 확실치 않고 연대미상의 때 광산김씨, 금성나씨, 밀양박씨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내문재, 안동구, 내문으로 불러오다가 옥천사가 가히 글 읽기에 적합하다 하여 각 지방 유생들이 모여들어 인재가 많이 배출되자 문학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 마을은 주택의 위치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면서 두 마을 형태로 나누어져 있어 위쪽을 안문재, 아래쪽을 학동이라 하였다.

2)문학2리 외문(外門)마을

외문마을은 만덕산을 남으로 등지고 북으로 매봉산을 바라보며 위치한 모든 주택이 북쪽을 향해 있는 마을이다. 조선 성종 6(1475) 곡성군 오곡에서 살던 해주오씨 일가가 이주해서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마을 이름을 외문치(外門峙)라고 정했다고 한다. 외문을 밖문재, 내문을 안문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 호남고속도로 건너편 629번지 부근에는 번성기에 20여호가 살았다. 당초에는 천주교 성도인 영광정씨와 연주현씨가 개척했다고 하며 1950년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15호가 살았다. 이곳을 원터골이라 하며 외문마을의 반을 차지했었다. 당시에 보면 띠집(흙집)이 한 채 있어서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한집도 남아 있지 않다.

3)비차1리 차동마을

차동마을은 450여년 전 하동정씨가 처음 입주했으며, 뒤이어 흥양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크게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조선 명종 2(1547) 강원도 횡성군 출신의 김희필이 담양에 부사로 왔는데,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강원도 사는 손자 두 형제가 할아버지 안일을 걱정하고 심방하였다. 물어물어 찾아온 손자를 반겨 한동안 함께 하였는데, 손자가 할아버지께 고향으로 가겠노라 아뢰니 할아버지는 담양에 살고 보니 먹을 것이 풍부하니 차라리 이곳에서 살 것을 권하였다. 이렇게 김희필 공이 손자에게 차동에 새터를 잡아 주었고, 그 후 15대가 나왔다. 서쪽에는 창평면 화양촌과 남쪽에는 장전과 가홍동이 있고 마을 뒤에 매봉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약 500년 된 느티나무 노거수가 버티고 서 있다.

4)비차2리 가흥(佳興)마을

가흥마을은 약 400여년 전에 창녕조씨가 조남해의 5대 종조인 가흥 조의하가 대전면 행성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터를 잡았다. 처음에 마을 이름을 감골이라 불렀으나 주변 산세가 아름답고 맑은 땅이라 하여 가흥동이라 바꿔 불렀다. 창녕조씨가 자작일촌을 이루었으나 18세기경에 광산김씨, 전주이씨, 금성나씨 등이 들어왔다. 총계산 남쪽 기슭 아래에 자리하고 북으로 대소산 마을과 이웃하며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km 지점이다. 마을 남쪽으로 옥녀봉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은 옥녀탄금(玉女彈琴)의 명당이며 산 건너를 직기등이라 부른다. 민심이 순후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 효부 열녀가 끊이지 않았으며 남을 시기하고 예의가 바르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5)성곡리 성곡(聲谷)마을

성공마을은 조선 중종 15(1520) 밀양박씨, 창녕조씨 일가가 입촌하여 개척하였으며, 금의 옥천사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의 덕을 입어 마을이 번창한다 하여 성신리로 불러오다가 1910년 성곡리로 개칭하였고 일명 새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곡마을은 대덕면 소재지에서 동북방 4km 지점에 위치하여 동쪽은 무정면 오례리와 경계하고 남쪽은 문학리, 서쪽에는 무월마을이 있다. 서쪽의 시목, 무월마을 앞을 지나온 오례천은 성곡마을을 거쳐 무정면 오례리를 경유하고 담양읍으로 흘러서 영산강으로 유입된다. 처음에는 마을 뒤 매봉산 바로 아래에 터를 잡았으나 큰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의 터로 옮겼으며 4개 마을로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요곡(要谷)만 남아 있다.

6)용대1리 용대(龍坮)마을

용대마을은 고려 말 1390년경 송도에서 남하하여 은둔지를 찾던 어떤 왕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중종때 남평문씨와 전주이씨가 정착하였으며, 임란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처음 이 마을 이름은 까치가 많아 가작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마을에 이유 없이 화재가 자주 발생하자 마을사람들이 조선조 때 담양부사에게 그 사유를 고하니 부사가 직접 찾아와서 지세를 살피고 날아가는 용의 형국이라 하여 용대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 이름에는 불을 끄는 데는 용이 물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용대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0km 지점에 위치하며, 마을 뒤로는 수양산이 자리하고, 마을 앞으로는 화순~북면 간 군도가 지나고 있다. 앞산은 앵무봉을 중심으로 산맥을 이루어 곡성군 오산면 작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수양산의 정기를 받아 체도시(용머리)가 있어 용대라 불렀다고 한다.

7)용대2리 청운(靑雲)마을

청운마을은 조선 순조2(1802) 경기도 여주에서 살던 밀양박씨 박재호 일가가 사화를 피하여 담양 남면 경상리로 이주하여 살다가, 보다 좋은 명당을 찾던 중 이곳이 산수가 수려하고 만덕산의 정기가 서려 있어 운중발룡(운중발룡)할 지세로 믿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뒤 김해 김씨 일가가 들어와 살았고 그때 마을 이름을 청운동이라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당국의 소개 명령으로 마을이 전소되고 3년여 동안 피난살이를 했지만 다시 수복되었다. 청운마을은 면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마을로서 방아재와 수곡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뒷산은 명산이 만덕산이 위하고 있고 마을 앞산은 50년 이상된 편백나무가 수려하게 단장되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8)용대3리 수곡(水谷)마을

수곡마을은 조선 세종6(1424)에 마을 북쪽에 있었다는 옥천동 옥천사에서 일하는 기와공인 곡부공씨와 남평문씨가 이곳으로 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과 북으로 방아재(수철점)마을과 바징이(소지리)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두 마을을 합하여 수곡이라 불렀다. 마을 주택들이 산허리에 계단식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입구가 좁아서 옛날에는 도대문(독문)을 달아 출입을 하였다. 마을이 번창하였을 때는 100여호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때 장질부사가 발생하여 전 주민이 거의 죽다시피 하여 그 뒤로부터 마을이 위축되었다고 한다. 또한 6.25때 마을 전체가 작전 소개명령에 의해 완전 소각되었고 그후 다시 재건하여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1960년대까지 마을 주변에 자두나무가 많았고, 그 맛이 특이하여 수곡 자두는 타지방까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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