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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⑪금성면 석현리(石峴里)·외추리(外楸里)·원율리(原栗리)·원천리(元泉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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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2  12: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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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면 외추리 매곡마을 보광사 전경
   
▲ 금성면 오평마을 왕버들나무(전남도기념물 제168호)
   
▲ 금성면 석현리 마을 앞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석현1리 석현(石峴)마을

석현마을은 세종 32(1450) 충주지씨가 석현리의 가래등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러나 어느 도사가 추월산 보리암을 가다가 마을에 들러 장고봉 밑 호미등에 터를 잡으면 천년을 안주할 곳이라 이르니 서둘러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전한다. 그후 인조8(1630)에 남원방씨가 곡성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방장사와 지장사 등 거인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방씨는 현재 중학교 자리에 터를 잡았으나 도둑이 많아 지금의 마을로 옮겨 병합하였다. 마을에 돌이 많으므로 돌고개 또는 석현이라 하였다.

2)석현2리 무림동(茂林洞)마을

무리동마을은 삼국시대 백제 개루왕(150년경) 때 남원황씨가 처음 터를 잡고 그 후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마을 뒤 텃골에서 기와나 백자 등이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옛 마을이나 대사찰, 도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천면에 속해 있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큰 마을이었고 부자들이 많아서 외천마을 사궁장(射弓場)에는 무리마을 선비들이 항상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3)외추리 외추(外楸)마을

외추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느나 1964년 마을 뒷산을 일굴 때 삼국시대에 사용했던 토기 및 점과 돌구유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이름을 추동이라고 부르다가 조선 고종때 마을 위치가 추월산의 바깥쪽이라 외추마을로 개칭하였다. 또한 나무가 많아서 노나무 추()자를 썼다는 설도 있다.

4)외추리 매곡(梅谷)마을

선조 13(1580)에 언양인 청계 김응회가 담양읍 백동리에서 살다가 세상이 어지러운데 장차 피난이 어렵다 하여 남산리로 이거하여 살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매곡마을 뒤에 장사를 모시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주위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아름다워 이곳에 장착하였다고 한다. 면 소재지에서 남방 4km에 위치하며 동북방에 외추마을과 노천마을이 있고 마을 뒤 300m 지점에 보광사가 있다.

5)외추리 노천(蘆川)마을

노천마을의 형성은 751년경 통일신라시대에 개척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그후 외추마을과 함께 하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 선조때 나주가 고향인 광산인 김여생이 창평 현감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으로 김덕령 장군과 노천계곡에 의병활동을 하던 중 김응회 장군과의 인연으로 이곳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있고 계곡이 깊고 수놓은 듯 아름다우며 기러기가 갈대를 입에 물고 날아가는 형국이어서 피난처의 적지로 여기고 김여생 부사는 노천계곡에, 김응회 장군은 매곡에 각각 가족을 피신시키고 의병활동을 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6)원율1리 원율(原栗)마을

원율마을은 백제 때부터 현 소재지였다. 고려 명종2(1172)에 감무를 두었다가 고양왕 3(1391)에 담양감무가 율원현감을 겸임하면서 폐현되고 원율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리역이 원율현에 있었는데 용마가 있어 매번 고갯마루에 숨어 있으므로 마은령(馬隱苓)이라고 했고 지금도 말이 숨어있던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도인과 술사가 많이 난다하여 폐현되었으나 유지는 있다. 마을의 형성과 입향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신평송씨 율옹 송징의 부친이 대덕면에 살다가 이 마을로 이거하였다고 하고, 송징이 마을앞에 있는 450년된 당산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신평송씨가 입향조로 추측되고 있다.

7)원율2리 오평(鰲坪)마을

오평마을은 고려 태조(920년경) 때 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 오나 어느 누가 입항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후 광해 2(1610)에 남원윤씨가 입항하여 자작일촌하며 살았다. 오평마을은 추월산 용맥이 마을 앞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이 앞동산이 자라등에 해당되고 마을의 집들은 자라알에 해당되어 자라가 알을 낳고 바라보는 형국이라고 해서 오평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한자표기 하면서 지명을 자라 오()자를 써서 오평마을이라고 불린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고 일명 자라등이라고도 한다.

8)원천1리 내천(內川)마을

후삼국시대(900년경)에 평택임씨들에 의하여 큰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개척되었으며 마르지 않은 샘이 있다하여 내외천마을이 천동으로 불렸다.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옥녀봉 아래 옥천샘이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두 개의 물줄기가 솟아 나와 안팎으로 샘을 이루었다. 때문에 안에 있는 샘을 중심으로 안시암골, 밖에 있는 샘을 중심으로 바깥시암골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내천과 외천마을이 되었다.

9)원천2리 외천(外川)마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밀양박씨 14대조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하며 금녕김씨가 무정면 덕곡에서 살다가 영조46(1770) 산수가 수려하고 옥청수가 솟아 이곳이 천년을 안주할 곳이라 여겨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천동이라 불려오다가 일제강점기 때는 원천리라 하였으며 1914년 면 통합 때 외천이라 개칭하였다. 옥녀봉 아래 옥천샘으로부터 두 개의 물줄기가 솟아 나와 각각 안팎으로 샘을 이루어 안에 있는 샘을 중심으로 한 내천마을(안시암골)과 밖에 있는 샘을 중심으로 한 외천마을(바깥시암골)로 구분하였으며 두 마을은 한 마을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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