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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⑩금성면 덕성리(德城里)·봉서리(鳳棲里)·봉황리(鳳凰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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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2  12: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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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면 봉서리 소재 대나무골테마공원
   
▲ 금성면 덕성리 마을 전경
   
▲ 금성면 봉황리 마을 전경(유기농 쌀단지 모내기)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덕성1리 덕성(德城)마을

덕성마을은 면사무소지에서 동북방 2km 지점에 있고, 남쪽에는 장항마을, 동쪽에는 방축마을, 서북쪽 산 넘어 평신기마을 등에 접하여 있는 큰 마을이다. 평산신씨, 옥산조씨, 초계최씨가 삼성받이로 입향한 곳이다. 광덕산맥이 마을 뒤 덕진산으로 뻗어 내려 노적봉 아래 당그래봉과 앞으로는 고지산이 보이는 지점으로 둔덕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930년경 평산신씨가 그 산 밑들 가운데 터를 잡았다. 마을 뒷산인 덕진봉이 노적봉에 해당하며 그 아래 당그래봉이 또 있다. 그 아래 자리한 마을은 평지로 덕석처럼 펼쳐져 있다. 노적봉에서 곡식을 당그래로 끌어내려 덕석에 널어놓은 형국이라 가난한 사람이 없고 고르게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을 형국이 덕석 모양이라고 해서 원래 마을이름은 덕석리였는데, 조선조 말기 무렵부터 점차 덕석이 덕성으로 변해 불리고 있는 평온한 마을이다.

2)덕성1리 영월(迎月)마을

영월마을은 전라북도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국도 27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는 전라남도의 관문이기도 한 마을이다. 옥천조씨가 자작일촌을 이루었으나 마을형성 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옛날 임금이 호남지방을 순시할 때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여 잘 쉬어간 곳이라 하여 이름을 언안(彦安)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영월이란 이름은 명월이 순창 해미산에 솟으니 그곳에서 달을 맞이하였다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3)덕성1리 행정(杏亭)마을

행정마을은 토박이 땅이름으로는 은행쟁이이다. 350년전 마을에 행화정(杏花亭)이 있었다는 걸로 보아 마을에 정자와 은행나무가 있어 행정마을이라 불러 왔고, 마을의 형성연대는 알 수 없다. 고덕진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데, 한양박씨 형제가 산약초를 캐기 위하여 광덕산과 덕진산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명약이 많고 야수가 좋은 이곳에 터를 잡아 생겨난 마을이다.

4)덕성2리 시목(柿木)마을

시목마을은 이름을 감바위로 불러오다가 1680년대 시목으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서남쪽으로는 창평 금과면 늑곡마을, 북쪽에는 방축리, 서쪽으로는 덕성마을이 있다. 시목마을은 선조 13(1580) 담양전씨가 이주해 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바로 뒤에서 그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와 주춧돌이 등이 출토되어 전씨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고터로 짐작되고 있다.

5)봉서1리 대판(大阪)마을

대판마을은 조선 선조13(1580)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400년 전 광산김씨가 창평에서 살다가 산세가 수려한 고지산 용맥에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대판이라 했다. 비탈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대판마을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마을이 고지산 줄기 밑 북풍받이에 자리한 까닭에 겨우내 춥고 눈이 녹지 않았으며, 물이 귀해 농사에 애로가 많았다. 덕성리 저수지와 문학리 저수지 물로 농사를 지었으며 지금도 댐의 수로가 들어오지 않아 관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6)봉서1리 장항(獐項)마을

봉서리는 주산인 고지산이 봉황이 깃드는 곳이라 해서 봉서리라 했으며, 장항마을은 뒷산이 노루 형국으로 마을이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되니 노루 장(), 목 항()을 써 장항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서 백제 성왕 때(550) 사람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기와와 주춧돌 그리고 샘터의 잔해가 발견되고 있어 이곳을 고가지(古家之)터라고 부른다. 일설에는 고씨가 처음 터를 잡았기 때문에 고가지터라 한다는 말이 있고 골()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7)봉서2리 와룡(臥龍)마을

와룡마을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고지산의 맥이 이곳 동남 방향으로 길게 뻗어 내려서 용맥을 이루니 마치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룡이라고 불렀다. 바로 해주최씨 문중산인 뒷산이 용의 형국이라 하여 묘를 쓰면 안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묘를 쓰고 최씨 집안의 젊은 아들이 죽자 그 어머니가 내 아들은 죽었지만 다른 아들들은 죽지 않도록 뒤산에 다시는 묘를 쓰지 말라며 울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큰 인물이 나려면 용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마을 산과 주변형국을 보호하는데 신경쓰고 있다.

8)봉서3리 비내동(飛乃洞)마을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도사가 절터를 짓기 위해 여러 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이르렀는데 오동나무와 대밭에 봉황이 서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천년을 누릴 터라 생각되어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고려 인종 때 하씨들에 의해 개척된 이후 인동장씨다시 개척하였으며 해주최씨는 문충공 석헌의 후손이 입향하여 17대째 살아 오고 있다. 19867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비내동이 봉서2구에서 3구로 분구되었다. 지금은 담양대나무축제 초대 대회장을 역임한 고 신복진씨가 조성한 대나무골테마공원이 있는 마을이다.

9)봉황1리 가라곡(加羅谷)마을

가라곡마을은 고려 경덕왕(1355년경) 때 흥양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그후 의령남씨가 이주해 와 살았으며 선조 33(1600) 담양읍 백동에서 살다가 이주 해 온 언양김씨가 어매곡에서 가까운 가라곡으로 분가하였다. 그리고 순창설씨, 담양전씨, 광산김씨, 평산신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장수황씨, 홍주송씨 등이 들어와 살았다. 계곡마다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비단같이 펼쳐져 있어 가라곡이라 불렀으며, 부엉이 밥통이라는 속설도 있다. 언양김씨들이 비봉산자락에 선산을 만들었다. 가가곡마을은 봉황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가라실이라고도 불렀다. ‘가라실이 합쳐진 이름으로 물가의 마을이란 뜻도 있다.

10)봉황2리 상신기(上新基)마을

상신기마을은 밀양 손씨가 순창 금과면 목동에서 살다가 숙종 26(1700) 피란길에 가라곡마을에 새로운 터를 잡고 형성한 마을이다. 가라곡, 죽림에 비해 늦게 형성된 마을로 위쪽에 새로운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상신기로 불린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명 장가동이라고도 하였다.

11)봉황2리 죽림(竹林)마을

죽림마을은 연산군 6(1500)에 양녕대군 6대손인 전주이씨 이효원이 경기도 수원 오미에서 난을 피해 담양읍 벌뫼로 이주해 와 살았는데, 선조 33(1600) 그 후손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마을 앞산은 어미 호랑이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이며 남쪽으로는 비봉산맥을 이은 뒷산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라 이곳에 터를 잡으면 천년을 누리고 살 것이라 여겨 정착하였다. 마을 동쪽이 순창 금과면 목동마을, 남쪽은 무정 덕곡마을, 서쪽은 대곡마을이있으며 대숲이 많다 하여 죽림마을로 불린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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