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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⑨금성면 금성리(金城里)·대곡리(大谷里)·대성리(大成里)
김관석 기자  |  wdy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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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6  12: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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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면 대곡리 손곡마을 고하 송진우 고택(전남도 문화재 제260호)
   
▲ 금성면 금성리 금성산성 연동사 노천법당
   
▲ 금성산성(사적 제353호)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금성1리 문암(文岩)마을
문암마을은 동학란 후 옥천조씨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전한다. 순창군 팔덕면에 살았던 옥천조씨 조익섭이 동학란 때 출전하려고 추월산의 밀재를 넘어가다 동학란이 끝나 버리자 지금의 광덕리(혜림복지원)로 박씨, 설씨 등과 함께 들어와 자리잡고 살았다. 그런데 도둑이 자꾸 들어옴으로 현재 마을로 옮겨 왔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문 모양의 바위가 있어 원래 문암(文岩)마을이라 불렀으나 고종 27년(1890)에는 마실재로 불렸으며 그때 서당과 학교가 생겨 교육이 강화되면서 1914년 문암마을로 고쳐불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문암마을의 광덕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진지를 구축하여 차일을 치고 적진을 감시했다는 차일봉이 있고, 장군이 망을 매어 놓고 망을 보았다는 망월봉이 있다. 차일봉은 군사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봉우리라 한다.

2)금성1리 부곡(釜谷)마을
부곡마을은 평신기 마을 바로 500m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영조 36년(1760) 옥천조씨 문중의 황씨 할머니가 당시의 덕성리, 지금의 문암마을에서 살다가 임진왜란 직후에 마을에 괴질이 번지자 두 아들을 데리고 넘어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부곡마을은 마을 뒷산이 가마솥 형국이요, 그 옆에 통시암이 있고, 뒷골은 굴뚝과 같다. 마을 이름을 가마실 또는 가마골로 불러오다가 부곡(釜谷)이라고 하였다. 평신기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새터로도 불렸다.

3)금성1리 평신기(平新基)마을
평신기마을은 금성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평지로 이루어졌고 큰 소나무가 있었다. 효종1년(1650) 흥양이씨와 여양진씨가 지금의 마을 뒷산 불로촌에 처음 터를 잡고 살았다. 불로촌은 문암마을과 더불어 신비의 약초가 많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해 괴질이 번져 못살고 부곡 뒷산 가마실에서 살아오다가 이후에 농경지가 많고 토질이 비옥한 이곳에 터를 잡았다. 새로운 평지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평신기라 이름하였다. 오랫동안 여양진씨가 자작일촌하며 살았으나 지금은 흩어져 버리고 없다. 그후 옥천조씨, 금성나씨. 홍주송씨가 입향하여 큰 마을을 이루었다. 나덕용과 나무춘은 예조참판을 지냈으나, 광해군 때 이이첨 등의 농락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곳 향리에 돌아와 가난을 이기며 책을 읽어 오다가 광해군 11년(1619)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의 후손이 지금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

4)금성2리 하성(下城)마을
하성마을은 담양읍 북동쪽으로 약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 시루봉이 우뚝하고 동으로 차일봉과 서쪽으로는 뽀족산, 남으로는 고지산이 자리한 아담한 마을이다. 선조 23년(1590) 달성서씨와 밀양박씨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터를 잡았다. 지형이 배 모양이라 하여 마을 동편에 돛대를 세우고 마을 앞 좌우 편에 수로비(水路碑)를 세웠으며 마을 앞에 느티나무 숲을 가꾸어 보호해 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조선목으로 베어 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당시에 마을 앞에 당산나무를 심어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주요 문화 유적 및 유물로는 금성산성(사적 제353호),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연동사지 3층석탑(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00호) 등이 있다.

5)대곡리 대곡1리 대실(帶實)마을
대실마을은 고려의종(1170년경) 때 진주하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 후 고령신씨가 입주하여 세거하던 중 고을 원님이 난 자리라 하여 지금도 고을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을 형성 당시 대여곡(帶如谷)이라고 불렀으며, 고려 원종 1270년경에 지형이 동남북에 원형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마치 비단으로 띠를 두른 듯 하다하여 대곡(帶谷)이라 불렀다. 1984년도에 88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동서로 통과하여 띠를 두른 듯 하니 옛 조상께서 수백 년 앞을 미리 알고 대곡이라고 칭하였다고 말들을 한다.

6)대곡2리 손곡(巽谷)마을
손곡마을은 옥녀봉 아래 동쪽으로 단사천이 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본 마을은 소가 누워 있는 와우 형국이라 하여 손우실 또는 손곡이라 하였다. 1100년경 달성하씨가 터를 닦았고 고성이씨가 세거하였다. 그 후 현종 6년(1665) 신평송씨가 봉산면 산덕리에서 창평면 현암리를 거쳐 입향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이후 대대로 송씨 가문에서 자작일촌하며 살고 있고, 다른 성씨는 주로 외촌들이 입향하여 살고 있다. 마을 중앙의 300여년 되는 당산나무는 송씨 입향조가 심었다고 한다. 손곡마을은 전국에서 제일 먼저 공동세배를 시작한 마을이다.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이면 온 마을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동네 주민의 안녕과 화평 그리고 새해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합동세배를 올린 후 풍물놀이로 흥을 돋우며 풍년농사를 다짐하는 미풍양속이었다. 또한 현대 민족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고하 송진우 선생의 성장지이고, 한말의병의 총수인 기삼연의 은신처며, 강학 현장인 송진우 고택(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60호)이 있다.

7)대곡3리 산이천(山伊川)마을
산이천마을은 후삼국시대 약90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 당시에는 산곡으로 부르다가 조선 중엽부터 산이천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 명칭 유래는 마을 뒤에는 산이 있고 옆으로 냇물이 흐른다 하여 산이천, 혹은 산이내(사이내)라 불린 듯 하다. 조리 형국인 이 마을은 이후 신평송씨가 자작일촌하며 살았다. 산이천마을은 진주하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손곡마을 입향조의 후손인 신평송씨가 먹굴, 점등에서 살다가 정조 4년(1789)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랫동안 자작일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먹굴, 점등 주위에 있었던 100여 호 가구는 집터가 세다는 풍수설과 작은 화재 그리고 극심한 도적의 횡포로 폐촌되었다. 지금도 그곳에선 주춧돌, 옛 기왓장, 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작은 동네지만 경찰서장, 면장, 조합장, 호적계장 등 고위 공무원이 많이 난 곳이다. 주요 문화유적으로 백제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산이내 고분이 있다. 마을주민들이 ‘똥묏등’이라고 부르는 이 고분 봉분에서는 도굴 갱으로 보이는 함몰부가 있으며, 봉분의 형태는 후대에 논이 확정되면서 주변이 많이 깍여 나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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