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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담양지명 천년 기획/⑦고서면 분향리(分香里)·산덕리(山德里)
김관석 기자  |  wdy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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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8  15: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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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서 분향리 석불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 고서 분향리 잣정마을 죽림재(전라남도 기념물 제99호)
   
▲ 고서 산덕리 후산마을 명옥헌 원림(명승 제54호)
2018년은 담양군이 담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본지가 담양지명 천년을 맞아 관내 12개 읍면 및 해당 읍면에 속한 마을 유래에 대해 연재한다./편집자 주 1)분향1리 잣정마을 잣정마을은 조선 태조 1년(1392)에 창녕 조씨 유도에 의해 개척되고 마을이름을 분향으로 불러오다가 정조 17년(1793)에 백정 또는 잣정으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마을 주변에 있는 잣나무 밑에 정자를 지어 정착하면서 잣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잣정은 마을 뒷산인 향백산의 정기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래 푸르러 마을 이름을 잣정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잣정마을은 서석산 영봉의 한 가닥이 서쪽으로 뻗어 갈미봉이 있으며, 마을 뒤에 향백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계천이 돌아오고, 남쪽으로는 증암천이 돌아들며, 고산이 다정한 안산이 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창녕조씨가 세거하는 분향리는 명촌이다. 마을은 행주형인데 동에는 증암천, 서편에는 계천이 있어 분향평야가 물 가운데 배와 흡사한 형국이므로, 목성(木姓)인 조씨가 거주하면 길이 번창한다 하여 조씨 선조인 직제학 조수문이 현 정자나무 위치를 배의 기관부로 삼아 성촌하였다. 이후 조씨 후손들이 대대로 600여년을 살아오고 있다. 분향리의 ‘분’자는 나눌 분(分)자를 쓰는데 마을에 자주 분열이 일어나서 향기 분(芬)자로 바꾸었으나 행정명은 그대로이다. 대표적인 문화 유적 및 유물로는 죽림재(竹林齋)와 누정인 관수정(觀水亭)과 환학정(喚鶴亭) 등이 있다. 2)분향2리 용대(龍臺)마을 용대마을은 조선 연산 6년(1500) 김씨가 창촌하였다는 설이 있다.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인데 거북머리 터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정자가 있으며, 그 밑으로는 증암천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큰 바위 옆에 실꾸리를 넣을 만큼 깊은 소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용이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경관이 아름다운 용소 위에 대가 있어서 용담대라 하였고 마을을 용대라 불렀다. 고려때 조성된 곳으로 보이는 관수정 동쪽의 소지사라는 절터가 있는데 그곳에 미륵불이 있다. 거북등에 일제 강점기 때부터 출장소가 있었는데 인민군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려다 국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인민군들이 미륵불 뒤에 숨자 총을 쏘았는데 지금도 미륵불에 그 총탄자국이 있다. 마을지명으로는 관수정 서쪽의 지형이 소형국인데 그곳을 우탕산이라 한다. 증암천에 있는 바위 모양이 떡시루를 엎어 놓은 형국이라 시루바위라 한다. 주요 문화 유적 및 유물로 수남학구당과 분향리 석불입상, 소산정이 있다. 3)산덕1리 상덕(上德)마을 상덕마을은 고령 명종 연간에 연주현씨에 의해 창촌되었다. 마을이름을 상덕이라 함은 마을의 동산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기름진 들녘이 좋아 위 상(上)자를 쓰고, 인간의 제일된 도리를 덕으로 삼아서 좋은 자연환경에서 덕을 숭상하며 살고자 하는 개촌 이념을 내세운 이름이다. 손방에서 일지맥이 손룡의 형국을 이루며 길게 뻗어 내려오다가 상덕한 봉우리가 솟아오르면서 평탄지에 마을이 이루어졌다. 또한 마을 지형이 ‘上’모양을 하고 있으며, 배 형국이어서 마을에 샘을 만들지 못했다. 배에 구멍을 뚫으면 마을에 안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지천 물이 상덕봉을 감돌면서 마을의 동서로 큰 들을 이루고 있다. 예전 창편현이었을 때 토반이었던 현씨들의 집성촌으로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후손에 대한 교육열이 특히 높은 마을이다. ‘도의 마을’과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되었다. 4)산덕2리 연동(蓮洞)마을 연동마을은 선조 33년(1600) 현재의 연동마을과 강촌마을 사이에 존재하였던 갈마곡리라 불리는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북향으로 이루어지면서 좌우로 용과 호랑이 각 등날이 생겨 마을 형태가 매우 특이하게 형성된 마을이다. 목수와 장막을 치는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막을 만들었다는 설이 전래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조에는 막작(幕作)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갈마곡리가 200여년 유지되어 오다가 정조 24년(1800) 이 마을 주민들이 연동마을과 강촌마을로 점차 이주되면서 현재의 연동마을이 창촌된 것으로 전한다. 순조 30년(1830) 연일정씨 진사가 입주하면서 촌명도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인 마을 형국을 본따서 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10년에 장흥고씨 종주가 입주하고 나주오씨 형열이 입주하였다. 주요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유물인 산덕리 연동 고인돌이 있다. 5)산덕2리 후산(後山)마을 후산마을은 고려 중엽에 여양진씨에 의해 창촌되었다가 순천박씨가 입주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선조 23년(1590) 나주오씨 오희도의 아버지 오언표가 순천박씨와 혼인을 해서 후산리에 입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나주오씨가 400여년간 자작일촌을 이루었다. 마을 뒤편은 반룡산에서 뻗어 내린 2km의 긴 송령이 목맥산을 이루고, 마을 앞에는 청등산이 송령을 추어올리는 형국으로 송정등이 포위되어 마을이 이루어졌다. 이 두 곳을 양지와 음지로 나누어 불러왔다. 마을 앞에는 노거수인 버드나무 5주와 400여년 수령인 팽나무 한 주와 귀목 한 주가 서 있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400년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능양군(인조)이 반정을 앞두고 마을을 찾아 국사를 의논하기 위해 망제(명옥헌)에서 도의와 교리를 강의하던 오희도를 찾아와 그 은행나무에 말을 맸다하여 일명 계마수라고 하는데 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이 지은 명옥헌원림이 있는데 역시 기념물 44호로 지정되어 있어 선현의 얼이 담긴 마을이다. 과거에 이 마을은 높은 지대로 창평현에서 한해가 심한 마을이었다. 한때 삼산(후산·절산·나산)을 한해우심지구로 불렀다고 한다. 이제는 광주호가 축조되어 땅의 고저를 막론하고 모든 농지가 수리안전답으로 변하였다. 위치는 면사무소에서 동방 2km지점이며 주요 문화유적으로 오희도의 명옥헌원림와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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