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눌제 박상 선생도 학식이 높은 분이시다. 그렇지만 너는 기필코 정암 선생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정암의 세상이 아니냐. 조정에서 정암 선생만큼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신하가 없다. 그 분 문하에만 들어가면 장차 네 앞길이 탄탄대로가 될 것이야. 애비가 다 생각이 있어 한양으로 가는 것이니 네 생각을 고쳐라.”

“눌제 선생님 밑에서 공부해도 급제할 자신이 있습니다.”
“안 된다. 남자가 출세를 하려면 먼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다음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고, 세 번째가 집안이 좋은 규수를 부인으로 맞는 것, 넷째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니라.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나 좋은 스승, 좋은 부인, 좋은 친구 만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더냐.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정암 문하에 들어가야만 한다. 정암 문하에만 들어가면 출세 길이 열리고 저절로 좋은 친구도 만날 수 있을 게다. 집안 좋은 규수 맞는 일은 애비한테 생각이 다 있다. 그러니 애비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소자는 윤제와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

양산보는 아버지 말이 옳다고 치더라도 돌밑 마을의 김윤제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경쟁자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공부에는 항상 김윤제가 그보다 더 열심이었다. 한 발 앞서가는 그를 따라가기 위해 양산보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양산보는 이상하게도 김윤제와 함께 있을 때 공부 욕심이 커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김윤제가 2년 전 눌제 문하에 들어갔을 때, 양산보도 김윤제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 때도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라리 화순에 사는 학포 당숙한테 보내겠다고 했다. 어쩌면 학포 당숙이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화순으로 가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학포 당숙이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네가 한양에 가서 정암 선생 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다 학포 당숙 덕으로 알아야한다. ”          

집을 나선 지 엿새 만에 한양에 당도한 양산보 부자는 먼저 학포 당숙 집으로 갔다. 학포 양팽손은 아버지와 6촌간으로 홍문관 교리로 있었다. 미리 서찰을 보낸 터라, 학포 당숙은 양산보 부자를 반갑게 맞았다.
“네가 벌서 이렇게 헌헌장부가 되었구나. 형님, 이만한 풍신에 장차 학문과 재덕만 갖춘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학포 당숙은 양산보의 겉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창암공에게 말했다. 창암공은 만족한 얼굴로 아들을 보았다. 양산보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 가서 학포 당숙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학포 당숙이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화순 춘부면 지동에 있는 양담 할아버지 묘소에 인사 올리러가서 잠간 만났었다.        
 
학포 당숙은 다음날 이른 아침, 입궐하기 전에 부자와 함께 정암의 집으로 찾아갔다. 정암은 예조좌랑을 거쳐 언관으로 있었다. 정암은 학포와 동문수학하고 같은 해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도의로 교우하였다. 정암은 6살 아래인 학포를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학포는 정암을 친형처럼 예를 갖추어 따르고 존경했다.

“올해 열다섯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풍채가 좋고 신수가 훤 하구만. 나도 열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오신 한훤당 선생님을 찾아가서 공부를 배웠다. 그 때 스승께서는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하셨었지. 스승께서는 소학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하셨다. 한훤당께서는 그 때 ‘글을 읽어도 천기를 알지 못하였는데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 못을 깨달았다’고 하셨지.” 
 조광조는 그의 스승이었던 김굉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소학을 내어주며 다시 읽으라고 했다.

양산보는 유난히 얼굴빛이 하얗고 눈빛이 날카로우며 결기 넘치는 조광조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조심조심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했다.  
“성리학을 하자면 소학부터 잘 읽어야하느니.”
조광조는 처음 만난 양산보에게 소학에 대한 이야기를 힘주어 말했다. 소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저술한 것으로, 가족관계나 행동규범의 실천을 강조한 책이라는 것 쯤 양산보도 알고 있는 터였다. 성리학과 함께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소학은 조선조 중종 때,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과 함께 그 중요함이 더해졌다.

특히 정암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보급한 소학은 성리학적 이념을 확산하고 사풍을 변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서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정암은 그런 뜻으로 그의 문하로 들어오는 제자들에게 먼저 소학을 다시 읽도록 당부한 것이다. 양산보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이미 소학을 읽었으나 정암이 시킨 대로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소학은 읽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기억하고 있는 대목까지 만이라도 암송을 할 수가 있겠느냐? ”
뜻 밖에 조광조는 양산보에게 소학을 외워보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산보는 자신 있게 말하고 큰 목소리로 단 한 대목도 막힘없이 외워 바쳤다. 실은 그동안 김윤제와 함께 있을 때 소학은 물론 그동안 그들이 배운 서책을 외우는 시합을 자주해 온 터이라, 소학을 암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양산보가 막힘없이 다 외워 바치자 조광조의 얼굴에 웃음이 흘렀다. 그렇게 해서 양산보는 정암의 문도가 되었다.
 
양산보는 정암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는 동안 여러 동문동학들을 만났다.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도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그 무렵 기준, 박소, 정황, 정환 형제, 이충건, 이문건 형제 등 30명 가까운 젊은 선비들이 정암의 제자가 되었다. 정암의 집에서 왕도정치를 꿈꾸는 사림파 선비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하루에 한 번 정암 스승으로부터 강해를 듣는 것이 좋았다.(다음호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