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피곤하게 보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너무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뭘 할까 생각하다가 얼핏 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이 떠오른다. 6장을 보면 잠이 오지 않은 왕은 역대 왕의 일기를 읽었고 왕이 역사서를 읽음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 책 읽는 이야기가 떠올라 나도 그냥 서가에서 무심코 책 한권을 꺼내 들었다. ‘죽은 자들의 증언’이다.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조사과장으로 활동하던 이용석 중령이 그 동안 유해발굴을 하면서 있었던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 중령은 '제2의 징비록'을 만드는 심정으로 60년을 외로운 산골에서 울부짖는 무명용사들의 영혼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자신들을 잊어버린 조국을 원망하지 않고 그저 내 땅에 묻혀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수십 년 세월을 견디어 낸 6·25 참전 용사들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에는 얼마 전 언론에서도 잠시 화제가 되었던 6.25 참전 용사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야말로 들어 본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린 감동스런 이야기다. 그 분은 6.25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북자가 되어 살아 돌아왔다.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고통을 받고 살면서도 단 한 번도 고향과 부모 형제와 사랑했던 그 여인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 여인 때문에 60년을 견디었다고 한다. 그래서 탈북을 했고 탈북 후에 바로 사랑했던 여인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는다는 현수막을 걸었다. 6.25전쟁 전에 자신의 앞집에 살았던 지금 살아있다면 80세가 되었을 사랑하는 여인을 찾는 다는 애절한 현수막이었다.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일까. 기적처럼 그 현수막을 그 여인의 손녀가 무심코 지나가다가 자기 할머니의 이름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자기 할머니에게 들려주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이름을 아는 손녀도 지금의 청소년들과 비교하면 대단한 학생이다. 할머니는 설마 내가 아니겠지 하면서도 할머니는 전화를 걸었다. ‘누구신데 이 이름의 여자를 찾나요?’ ‘나요. 당신을 찾아 북에서 살아 돌아 왔소.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소.’ 두 분의 재회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면 두 분의 축복을 위해 만든 것 같았다. 60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황혼 결혼식을 올렸다.

그간 우리는 해마다 6월이 오면 6ㆍ25 전쟁에서 전사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살아계신 참전 용사들의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고 떠든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국군포로 문제는 물론 전사자들의 유해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현충일만 되면 정부도 언론도 국민도 대단한 애국심이나 역사의식이라도 있는 양 화려한 수사들로 말잔치만 벌여왔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이 제대로 된 6ㆍ25 전쟁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금년도 국정감사 현장에서는 모처럼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른 내용이야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나라를 폐허로 만든 6ㆍ25 전쟁만큼은 제대로 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전쟁은 김일성이 한반도 적화 통일을 위해 기습 남침을 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역사교과서가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참전자들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바른 역사 교과서라 할 수 없으며 그렇게 배운 학생들이 어떻게 호국 영령들의 희생을 바르게 추모할 것인가.

또 국정감사 현장에서 일부 의원들은 보훈처장의 학교교육 내용을 문제 삼고 보훈처 업무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사퇴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장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안보교육을 하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한 일이며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도 보훈처의 업무라고 맞섰다. 여기에 대해 누가 옳고 그르냐는 국가 안위를 어느 수준에서 바라보고 있는지가 관건일 것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새벽 4시에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 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희생된 장병 15명과 공무원 3명의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18명의 유해를 실은 공군 수송기를 오바마 대통령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면서 유해의 본국 송환을 맞이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이를 대통령의 정치적 쇼로 보지 않는다.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에 유해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는 대통령을 보고, 미국인들은 애국심과 함께 국가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는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이랄 수 있는 ‘흑인’ 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당파싸움 앞에 한번씩 ‘국가’를 망각해왔던 한국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더욱 숙연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오늘도 손자가 말한 兵者는 國之大事라. 死生之地오 存亡之道니 不可不察也라는 말이 생각난다. 생사와 존망이 달린 국가 안보 문제를 깊이 살펴야 하는데 오늘의 정치는 오로지 黨利黨略에 치우쳐 있는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