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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11)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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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9.27  15: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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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봉가비(岐峯歌卑) : 관서별곡 가사비로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에 자리해있다. 원래는 아래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으나 최근에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철거돼 인근에 있는 수원 백씨 사당인 영모제 마당으로 옮겨졌다.)





11. 장흥의 가사 작가와 작품





韓國文鄕이라 일컬어 손색이 없을 만큼 장흥에는 뛰어난 文才들이 많다. 현대문학에서도 한승원, 이청준, 송기숙, 이승우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한 장흥의 文風은 이미 조선시대에 詩歌文學으로 맹위를 떨친 장흥의 文風에 견주어 이미 예견되고 당연한 것일 법도 하다.



담양과 어깨를 겨루는 가사문학의 고장, 관서별곡을 통해 기행가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기봉 백광홍 선생의 흔적을 더듬어 장흥 땅을 밟았다. 언뜻 보기에도 아름다운, 키 낮은 벚꽃 군락으로 둘러싸인 남산공원 허리춤에 터를 잡은 장흥문화원을 찾아 윤수옥 원장을 만났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든 불청객들에게 윤 원장은 단지 담양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담양이 부럽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 윤 원장은 “기봉의 관서별곡과 송강의 관동별곡 두 작품은 한국문학사에서 우리나라 말의 아름다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 우리 민족성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형상화한 최고의 작품들”이라며 “선별곡인 관서별곡은 기행가사의 효시로, 후별곡인 관동별곡은 기행가사의 백미로 알려지고 있을 만큼 두 별곡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고 운을 뗐다.



“관서별곡(1556년)이 관동별곡(1580년)보다 무려 25년이나 앞선 작품이고, 후별곡인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문학의 모체로까지 전해지면서도 뒷 작품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는 윤 원장은 “작가적 측면에서 기봉의 위대함은 기행가사라는 장르에다 단순한 노정과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한 게 아니라 그 대상에다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절묘하게 심을 수 있었다는 점”이라며 “기봉은 景을 보고 그 경에다 情을 접합시킬 줄 알았고 자연미에다 인간성을 접목할 줄 알았으며 풍류에 덧붙여 문학적 상상력을 추가시키고 문학성을 진화시킨 당대의 文章”이라고 강조했다.



윤 원장은 또 “같은 맥락에서 장흥에서도 많은 가사작가와 작품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담양이 가사문학의 산실로 널리 알려진 것은 담양가사가 지닌 작품성 외에도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 면앙정 등 널려있다시피 한 가사문학 유적과 송순, 정철, 기대승, 김성원, 김인후, 고경명, 김덕령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창출해 낸 ‘브랜드 파워’, 그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담양군의 노력이 곁들여져 일궈낸 결실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長興歌壇‘이라는 독자적인 가사문학권을 형성했던 장흥의 가사문학도 그 질량에 있어 국문학사적으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몸소 안내를 자청한 윤 원장과 함께 기양사(崎陽祠= 기봉 백광홍 선생을 배향한 사당)를 찾았다. 기양사는 장흥읍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안양면 기산리 사자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읍에서 수문 해수욕장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도립 남도대학 장흥캠퍼스가 보이고 기양사는 반대쪽 왼편 마을에 있다. 마을에 들어서 꼬불꼬불한 돌담길을 따라 300미터 남짓 오르면 기양사가 나타난다. 기양사는 주벽인 정신재 백장을 비롯해 백광홍, 백광훈 등 13현을 배향한 사당이다.



기양사를 둘러보던 일행에게 윤 원장은 기봉에 대해 빠뜨린 것이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기봉이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반궁에서 수학 중 임금이 주관하는 詩會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가 발표한 '동지부'라는 작품이 영호남의 기라성 같은 대가들을 물리치고 장원시로 뽑혔다”며 “명종 임금이 장원상으로 하사한 ’선시십권‘이 기봉의 생가에 현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차에 오른 일행에게 못내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몇 번씩이나 악수를 청하는 윤 원장의 따스한 마음을 뒤로 취재진은 부산면 호계리에 있다는 ‘관서별곡 시비’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岐峯 白光弘과 ‘關西別曲’



종래의 국문학사에 조선조에 ‘관서별곡’이라는 가사작품이 있다고 하여 그 제목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멸하여 그 내용이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왔으며, 작자에 대해서도 옥봉 백광훈으로 오인한 전적이 많았다.



심지어 두 편의 별개 가사인 ‘箕城別曲’과 ‘香山別曲’을 합쳐서 ‘관서별곡’이라고 제하였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었다. 그러던 중 이상보(李相寶)박사가 1961년에 수원 백씨 기봉공파 종가에서 기봉 백광홍의 시문집인 ‘기봉집(岐峯集)’을 발굴하여 거기에 게재되어 있는 ‘관서별곡’을 분석, 평가 소개한 ‘관서별곡연구’(국어국문학 제26호, 국어국문학회, 1963)를 발표함에 따라 ‘관서별곡’의 진면목이 알려지게 됐다. 따라서 이때부터 관서별곡과 작자인 기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기봉의 인품과 문학이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봉집’이 발견돼 소개되면서 거기에 실려있는 홍직필(洪直弼) 序의 序文, 백사근(白師謹) 撰의 서문, 홍직필 찬의 墓碣名, 기우만(奇宇萬), 백후진(白厚鎭), 백채인(白采寅), 백의인(白義寅)의 跋文 등을 근거 삼아 기봉의 생애와 인품에 대하여 단편적으로나마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白光弘의 號는 岐峯이며 字는 大裕로 1552년(중종 17년) 장흥군 안양면 기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당시 태인 시산(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던 호남의 巨儒인 일재 이항(一齋 李恒)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기봉은 영천 신잠,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 문인들과 道義之契를 맺어 덕업을 쌓았다.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홍직필이 쓴 “묘갈명”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富는 가히 구할 것이 아니요 貴는 가히 도모할 것이 아니다. 구하지 아니하고 도모하지 아니함은 하늘의 이치로 되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족히 근심할 바 아니요, 천하다고 족히 슬퍼할 바 아니다. 당연히 빈방에 있어도 맑은 바람 밝은 달이다. 임금과 상제가 계시거늘 내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좌우명을 지었다고 한다.



28세 때인 1549년(명종 4년에 진사 생원을 뽑던 司馬兩試에 급제하였고, 3년 후인 1552년 11월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正字에 임명되는데 그 해에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영호남의 문신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게 되었다. 이때 기봉은 賦 ‘冬至’를 지어 장원으로 뽑혀 임금으로부터 ‘選詩’ 10권을 특사 받았다. 다음 해인 1553년에는 湖堂에 뽑혔다. 그리고 1553년 봄에 평안도 評事에 임명되어 서도관방에 부임하였다. 그곳에서의 삶과 정취, 자연 풍광을 시문으로 吟詠하던 중에 가사 ‘관서별곡’을 지으니 당시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관서별곡’은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서 송강 정철이 25년 뒤에 지은 ‘관동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사실은 두 작품을 분석하여 비교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증명된다. 즉 이상보,丁益燮(전남대) 교수의 연구는 ‘관서별곡’이 모티브, 구성형식, 표현기법에 있어서 ‘관동별곡’의 모체가 되었음을 적시했다. 뿐만 아니라 ‘관서별곡’은 ‘금당별곡’을 지은 魏世稷, ‘人日歌’와 ‘草堂歌’를 지은 李商啓, ‘自悔歌’ ‘勸學歌’와 ‘合江亭船遊歌’를 지은 魏伯珪, ‘天風歌’를 지은 盧明善, ‘長恨歌’를 지은 李中銓, ‘德岡九曲歌’ ‘德泉尋源歌’를 지은 文桂泰 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소위 ‘장흥가단’을 이루는 바탕이 됐다. 정익섭 교수는 “이 가사가 나오자 정철의 ‘관동별곡’이 나오게 되고, 같은 유형인 조우인의 ‘속관동별곡’, 위세직의 ‘금당별곡’ 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백광홍의 관서별곡은 조선조의 모든 기행가사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그는 湖南詩歌史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찬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그 문학사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또 고경식 교수는 조우인의 가사작품 전반에 ‘관서별곡’이 직접적인 영향이 끼쳤음을 고증하고 있다.



가사는 주로 한문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던 당시에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가락으로 표현한 예술 양식의 하나다. 따라서 ‘관서별곡’은 언어 의식에 가치를 둔 현대의 국문학 연구의 경향에 힘입어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되어온 셈이다.



그러나 기봉의 문학세계는 “기봉집”에 전하는 많은 한시문(賦 9편, 五言絶句 9편, 五言古詩 11편, 詩山古詩 3편, 七言絶句 52편, 七言四韻 17편, 詩山雜詠 28편 등)들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드러난다. 기봉은 특히 칠언에 능했고, 유가에 사상의 바탕을 두었다. 유가적인 군신의 도를 읊은 것으로 ‘天行健’ ‘令名德之輿’ ‘富貴在天’ ‘孝悌’ 등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기봉은 ‘관서별곡’을 지은 이듬해인 1556년(명종 11년)에 병환으로 벼슬을 내놓고 돌아오게 된다. 같은 해 음력 8월 27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부안의 처가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의 스승인 一齋는 부음을 듣고 “문재와 학덕이 드물게 뛰어났는데 이를 크게 펴지 못한 것이 아깝다”며 크게 슬퍼했다. 1808년(순조 8년)에 고향마을 기산리에 있는 岐陽祠에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배향됐다. 2004년 6월, 문화관광부는 기봉 백광홍 선생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수우옹 위세직(守愚翁 魏世稷)의 ‘金塘別曲’



‘금당별곡’은 처음에는 존재 위백규의 祖父인 삼족당 魏世稷의 작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위세보의 삼종형인 수우옹 위세직(1655~1721)의 작으로 정정됐다.



‘금당별곡’의 내용은 배로 금당도와 만화도를 유람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감정을 서경적으로 읊은 일종의 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의 영향 관계를 따지자면,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창작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봉의 ‘관서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관동별곡’은 ‘금당별곡’에 영향을 준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금당별곡’은 ‘관서별곡’의 간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기봉과 송강의 가사가 북방의 승경을 노래한 기행가사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남방의 해양도서 지방의 승경을 노래한 가사라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이종출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하여 “作者의 자유로운 詩想이 마음껏 펼쳐져 있고, 비록 隱逸的 思想이 多少 엿보이기는 하되 평민적이면서도 自然에 純化된 정도로서는 오히려 ‘關東別曲’보다 勝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며 “이 작품이 前代 가사에서 이른바 換骨奪胎는 못될지언정 그 표현 및 구성에 있어서도 前代 가사들에 비해 결코 못지않은 스스로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청사 노명선(靑沙 盧明善)의 ‘天風歌’



‘천풍가’는 청사 노명선(1707~1775)의 작으로 장흥의 명산인 천풍산(천관산)의 자연풍경을 서경적으로 읊은 가사작품이다. 이종출 교수가 발굴한 가칭 ‘三足堂歌帖’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 거기에는 한글로 ‘천풍가라, 노청사라’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작가의 본명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長興誌續錄’ 券之三 學行條 夫山面項에 “盧明善, 光山人光原君毅后 號淸史 從遊閔老峰 鼎重文學名世 作天風歌 行于世”라는 기록이 있어 천풍가를 지은 노청사의 본명을 확인할 수 있었고, ‘光山盧氏族譜’를 통해 그의 생몰연대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도 일종의 기행가사로 작자가 겨울에 천풍산의 여러 골자기와 봉우리, 절과 암자 등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내용을 적고 있으며 표현 기법에서 관동별곡과 흡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지은이는 부귀공명과 거리가 먼 청빈한 선비이며, 창작시기는 “빈발이 호백하고 기력이 쇠잔하니”의 구절로 보아 노년으로 추정된다.





存齋 魏伯珪의 ‘自悔歌’, ‘勸學歌’, ‘合江亭船遊歌’



존재 위백규(1727~1789)는 생전에 ‘政絃新譜’ 등 수십권의 저술을 남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다. 그는 전 생애를 거의 고향인 관산에서 학문에만 전념했으나 만년에 옥과 현감의 벼슬에 1년여 동안 나간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세 편의 가사(자회가, 권학가, 합강정선유가)와 시조로 農歌 9수가 전한다.



‘자회가’는 효사상을 바탕으로 작중 화자가 생전에 불효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사친지도를 술회하는 내용으로 돼있다. 이 작품의 내용상 구조는 ①父母恩功(序詞) ②忘恩不孝 ③老後悲哀 ④天運猜忌 ⑤風樹之嘆(不孝懺悔) ⑥善行顯親 ⑦孝行勸奬 ⑧再錄祝願(結詞)과 같이 8단으로 구성돼 있다.



‘권학가’는 제자 혹은 젊은이들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본연 심성을 방실하고 자포자기하여 박혁음주하고 이욕여색 탐을 하면 금수되기 멀지 않고 사람되기 어려우니, 효제충신 예의염치 뿐만 아니라 선대명자를 알기 위해서도 배워야 하며, 사람이 할 일은 문필밖에 없다’고 술회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있다.



‘합강정선유가’는 존재가 옥과 현감에 재임시(71세, 1797년) 순찰사가 도임하여 전라남도 옥과면 합강리 소재의 합강정에서 인근 지역의 여러 수령들과 함께 선유하는 내용을 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지재 이상계(止止齋 李商啓)의 ‘草堂曲’, ‘人日歌’, ‘勸學歌’, ‘耕讀歌’, ‘獨樂歌’, ‘湛樂歌’



지지재 이상계(1758~1822)는 장흥군 용산면 묵촌리 아양골 사람으로 자는 君沃이며 호를 觀松이라고도 했다. 이상계는 어릴 적부터 性度와 儀範이 남달리 뛰어나고 성덕이 군자적 기질을 가졌다. 그는 자라서는 성현의 본을 받는 유도적 학문에 전념했으나 벼슬에는 별로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남의 어려운 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고, 오직 의와 덕을 좇아 살고자 했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돈독했다. 문집으로는 ‘止止齋遺稿’가 있다. 또 그의 사손에 의해 보관돼 온 ‘草堂曲全’이라는 가첩이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가사 작품 ‘초당곡’과 ‘인일가’를 비롯해 아직 작자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勸學歌’, ‘闕里歌’, ‘耕讀歌’, ‘獨樂歌’, ‘湛樂歌’ 등 모두 7편이 실려 있다. 이 중 ‘궐리가’는 내용은 동일하나 ‘안택가’, ‘도덕가’, ‘퇴계 선생 안택가’ 등 다른 이름으로 널리 가창되었던 작품으로 이상계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나머지 작품은 이상계의 작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히 이상계의 작품으로 확인된 ‘초당곡’과 ‘인일가’를 제외한 ‘권학가’, ‘경독가’, ‘독락가’, ‘담락가’의 작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정확한 확인 작업이 필요하리라고 판단된다.



‘초당곡’의 창작연대는 묵촌리 아양골에 초당을 구축(1908년 정월 20일)한 시기와 가사 내용 중 “知命年이 되온 後에”라는 구절을 근거로 지지재가 51세 때이며 초당을 준공한 후인 1908년 3, 4월로 추정하고 있다. ‘인일가’의 창작연대에 대하여는 문집의 기록이나 가사 내용 중에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어 추정하기가 어렵지만 초당을 짓고 기거한 후, 즉 초당곡과 거의 같은 무렵인 만년의 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당곡’은 ①醉起言志(序詞) ②學而時習 ③草堂風景 ④草堂淸遊 ⑤月下仙遊 ⑥安貧樂道의 6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인일가’는 유가적 사상과 인륜 도덕을 가사라는 형식으로 술회한 작품으로 ①人日讚美(序詞) ②和親敦睦 ③道心警覺 ④堯舜欽仰 ⑤千古胎笑 ⑥五倫解義 ⑦博覽習訓 ⑧人日醉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월 초이렛날 밤에 인일회를 열고 친족 친구들이 모여 놀며 ‘인일가’를 수창케 했다고 전한다.





우곡 이중전(愚谷 李中銓)의 ‘長恨歌’



우곡 이중전(1825~1893)은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 사람인으로 유고집인 ‘愚谷集’ 단권 1책이 전하는데, 664구에 달하는 장가인 ‘장한가’가 여기에 실려 있다. ‘장한가’의 창작 시기는 이 작품의 말미에 “丙子臘月”의 기록과 내용중에 “時年이 半白이라 人間公道 저 白髮이 나의 頭上 오것구나”로 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곡이 52세 때인 1876년 12월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사는 내용 구조상 다른 가사 작품과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가사가 대개 일관된 주제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반해 이 작품은 전반부는 작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도덕 사상에 근거하여 읊은 것이고, 후반부는 금강 유람을 소망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어 한 작품 안에 두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경세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장한가는 ①太極造化 ②早失父母 ③勸農勸學 ④禁酒禁色 ⑤喪故不絶 ⑥消遙自適 ⑦願遊金岡의 7단으로 구분된다.





겸재 문계태(謙齋 文桂泰)의 ‘德岡九曲歌’, ‘德泉尋源歌’



겸재 문계태(1875~1955)는 장흥군 유치면 덕산리 사람으로 구한말에 태어나서 일제시대를 거쳐 6?25동란 이후에 생을 마쳤다. 그는 한학자로 일생을 학문과 함께 보냈는데 ‘덕강구곡가’는 구곡의 서경에 빗대어 지은이의 나라 잃은 설움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구한말, 혹은 일제시대에 창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덕천심원가’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의 연원을 찾아가는 내용을 읊은 것으로 공맹을 역람하고 나서 우리나라 여러 학자의 댁을 구경하는 식으로 그들의 학문적 업적과 도의 높음을 칭송하고 있다. 가령 “…圃牧兩宅이分明히尙存하엿구나靜庵宅을잠관진아여退溪宅을차져가니道學은泰山ㅅ가고德義은河海ㅅ가터我東方大君子라할만하도다”식으로 되어 있다.(일부 고어는 현대어로 바꿈)



문계태의 이 두 작품은 비교적 최근의 가사로 그 형식에 있어서 3?4조 혹은 4?4조의 정형이 많이 파괴되어 산문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밖의 가사 작품



이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로서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94번지에서 필사된 가첩 하나가 발견됐는데 이 가첩은 원래 두 책으로 되어 있던 서로 다른 책을 그간 유전되어 오면서 누군가가 임의로 합책한 것으로 보인다.



앞부분은 동양의 유명한 경서의 서문만을 모아 필사한 것이며, 뒷부분은 국문 가사가 필사되어 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가사작품은 모두 다섯 편인데 게재 순서대로 제목을 나열하면, ‘退溪先生安宅歌’, ‘人日歌’ ‘草堂曲’, ‘英宗大王處士歌’다. 이 중에 ‘퇴계선생안택가’는 ‘안택가’ 혹은 ‘도덕가’라는 이명으로 널리 애창되던 곡인데 작자미상으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작품으로 이는 지지재 가첩에 ‘궐리가’와 내용이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혹자는 이퇴계의 작이라 보기도 하는데 이유는 이 가첩을 필사한 이가 ‘퇴계선생안택가’라 적은 것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일가’와 ‘초당곡’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이미 지지재 이상계의 작으로 알려진 작품으로 내용은 같으나 필사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표기 방법이나 자구가 약간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첩에 필사되어 있는 5편 중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품은 ‘상사곡’과 ‘영종대왕처사가’의 2편으로 두 편 모두 작자 명이 기록되지 않은 지은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사곡’은 서사와 결사를 갖춘 전형적인 달거리 가사인데 형식이 매우 정제되어 있다. 내용은 열두 달의 각 민속명절날 떠나고 없는 ‘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영종대왕처사가’ 역시 지은이를 알 수 없으나 가사의 내용과 필사의 의도로 보아 필사자는 ‘영종(영조)’을 작자로 본 듯하다. 영조는 1664년에 나서 1776년에 서거한 조선의 21대 왕이다. 그는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발간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는 등 문교를 크게 일으킨 임금이다. 그러나 영조가 가사를 지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사의 내용은 필자가 세상 공명을 하직하고 운림처사가 되어 자연 경개를 벗 삼아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즐기는 자연 친화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가첩에 실린 가사로 보아 전창되던 ‘안택가’가 이 지방에서도 애창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지재 이상계의 ‘안일가’와 ‘초당곡’이 당대에 이 지방에서 애창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상사곡’과 ‘처사가’는 비록 그 작자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발견된 지역으로 보아 장흥 지역의 작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장흥군 용산면 월림리 출신 월포 안홍식(月圃 安洪軾)의 가사작품 ‘聖臺歌’와 ‘思親曲’이 유전되고 있다고 하나 그 내용을 접할 길이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흥 지역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가사문학이 융성했던 곳이다. 작가 수, 작품 수에 있어서 단연 으뜸일 뿐만 아니라, 개개의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에서도 우리나라 가사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기봉의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서 정철의 ‘관동별곡’과 조우인 여러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위세직의 ‘금당별곡’, 노명선의 ‘천풍가’, 문계태의 ‘덕강구곡가’ 등의 기행가사와 위백규, 이상계, 이중전의 작품에 영향을 주어 장흥 지방 가사문학 발전의 시원이 됐다.



위세직의 ‘금당별곡’은 기봉의 ‘관서별곡’이나 송강의 ‘관동별곡’과는 달리 남방의 해양도서 지방의 승경을 노래한 가사로서 작자의 자유로운 시상이 마음껏 펼쳐져 있고 평민적이면서도 자연에 순화된 정도와 그 표현 및 구성에 있어서 전대 가사들에 비하여 뛰어난 가치를 지님을 알 수 있다.



노명선의 ‘천풍가’는 작가가 겨울에 천풍산의 여러 골짜기와 봉우리, 절과 암자 등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내용으로 된 기행가사로서 표현 기법이 뛰어나고, 청빈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고 위백규의 작품에는 그의 효사상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상계의 ‘초당곡’에는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고 ‘인일가’는 유가적 사상과 인륜 도덕을 가사라는 형식으로 술회한 작품이다. ‘권학가’ ‘경독가’ ‘독락가’ ‘담락가’ 등은 현재로서는 이상계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앞으로 고구(考究)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중전의 ‘장한가’는 664구에 달하는 장가로서 전반부는 작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도덕 사상에 근거하여 읊은 것이고, 후반부는 금강 유람을 소망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고 있다. 한 작품안에 두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춘 이 작품은 경세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문계태의 작품은 비교적 최근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가사문학이 쇠퇴하고, 운문시대에서 산문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문체와 내용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리라고 본다.



이밖에도 장흥지방에는 작가미상의 몇몇 작품이 발견되는데 최근 또 한 편의 주목할만한 가사작품이 선을 보였다.





‘임계탄(壬癸歎)’ - 장흥 관산 선비 作



‘임계탄(壬癸歎)’은 현실비판가사로 임자?계축년(영조 8~9, 1732~1733)에 연이어 흉년이 들어 대기근이 발생한 참상 및 관의 부패와 무능을 서술한 내용이다. 제목은 그 배경시대를 취해서 붙인 것이며 창작연대 또한 바로 그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알려진 현실비판가사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작가의 비판의식이 매우 심각하면서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나라히(이) 나란 안의 백성이 나라히요/ 백성이 백성안여 의식(衣食)이 백성이라/ 백성 다 업으니 이 시절 어이 될고?”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애민우국의 정신이 절정에 다다른 상태에서 위기감과 함께 民주체적 의식이 상승하고 있다. 작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작중의 진술로 미루어 장흥 관산에 거주한 선비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장흥에는 장흥읍 평화리 출신 소고당(紹古堂) 고단 여사가 전라북도 전주시에 거주하면서 閨房歌辭에 정진, 장흥 가사문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바쁘신 중에도 장흥의 가사문학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시고 직접 기양사까지 일행을 안내해주신 장흥문화원 윤수옥 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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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별곡(關西別曲)



관서(關西) 땅 이름난 곳 왕명(王命)으로 보내시매

행장(行裝)을 정리하니 칼 하나뿐이로다

연조문(延詔門) 나가서 모화관(慕華館) 고개 넘어드니

가려는 맘 빠른데 고향을 생각할까

벽제(碧蹄)에서 말 갈아 타 임진(臨陣) 나루 배를 건너

천수원(天水院)에 돌아드니 송경(松京)은 옛 땅이라

만월대(滿月臺)도 보기 싫다.

황강(黃岡)은 싸움터라 가시덤불 우거졌네.

산 해가 뉘엿커늘 채찍을 다시 잡아,

구현(九峴)을 넘어드니 생양관(生陽?) 기슭에

버들마저 푸르렀다.

감송정(感松亭) 돌아들어 대동강(大洞江) 바라보니

십리 물결 빛과 만겹의 내 낀 버들

아래 위로 어리었다.

춘풍이 불어와 그림 배를 빗겨 보니

녹의홍상(綠衣紅裳) 빗겨 앉아 가녀린 고운 손이

녹기금(綠綺琴)을 연주하며 흰 이 붉은 입술로

채련곡(采蓮曲)을 부르니 태을진인(太乙眞人)이

연잎 배를 타고서 옥하수(玉河水)로 내리는 듯.

설령 나라 일이 바쁘다 한들 풍경을 어이하리.

연광정(練光亭) 돌아들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니

능라도(綾羅島) 고운 풀과 금수산(錦繡山) 안개꽃은

봄빛을 자랑한다.

천년 평양 땅에 태평 문물(文物)은 어제인 듯 하다 만은

풍월루(風月樓)에 꿈을 깨어 칠성문(七星門)을 돌아드니

작은 말에 홍의(紅衣) 태운 나그네 흥이 어떠한가.

누대(樓臺)도 아주 많고 산수(山水)도 많지만은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앉아 청천강(晴川江) 바라보니

삼차(三叉)의 형세는 장함이 가이 없다.

하물며 결승정(決勝亭) 내려와 철옹성(鐵瓮城) 돌아드니

구름 닿은 성가퀴는 백 리에 벌려 있고

하늘 만든 겹겹 뫼는 사면에 빗겼구나.

사방의 큰 진(陳)과 온 나라의 웅장한 경관이

팔도의 으뜸일세.

이원(梨園)에 꽃이 피고 진달래 못 다 진 때

영중(營中)이 일 없거늘 산수를 볼까 하여

약산(藥山)에 동대(東臺)에 술을 싣고 올라가니

눈 아래 구름 하늘 바라봐도 끝이 없네.

백두산 내린 물이 향로봉을 감돌아

천리를 빗겨 흘러 대(臺) 앞으로 지나가니

섯돌며 구비쳐서 늙은 용이 꼬리치며

해문(海門)으로 드는 듯 빼어난 경치 끝이 없다

풍경인들 아니 보랴.

맵시 있는 아가씨와 어여쁜 여인들이

구름 비단 단장하고 양옆에 늘어앉아

거문고 가야금과 생황과 피리를

불며 화답하는 모습은 주목왕(周穆王)이 요대(瑤臺) 위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서 백운곡(白雲曲)을 부르는 듯,

서산에 해가 지고 동령(東嶺)에 달이 뜨니,

곱고 예쁜 아가씨들 반쯤 교태 머금은 채

잔 받드는 그 모습은 낙포(洛浦)의 선녀가

양대(陽臺)에 내려와서 초왕(楚王)을 놀래키는 듯.

이 광경도 좋지만은 먼 근심인들 잊을소냐

감당(甘棠)의 소백(召伯)과 세류(細柳)의 장군(將軍)이

한 때에 동행하여 강변 따라 내려가니

빛나는 옥절(玉節)과 펄럭이는 용기(龍旗)는

긴 하늘을 빗겨 지나 푸른 산을 떨쳐 간다.

도남(都南)을 넘어 들어 배고개 올라앉아

설한령(雪寒嶺) 뒤에 두고 장백산(長白山) 굽어보니

겹겹 뫼에 첩첩 관문은 갈수록 어렵도다.

백 두겹 관문과 천리의 검각(劒閣)도 이렇기야 하겠는가.

팔만의 비휴(??)는 길을 열며 앞서 가고

삼천의 철기(鐵騎)는 뒤를 감싸 치달으니

오랑캐 마을들이 풍문 듣고 투항하여

백두산 내린 물에 일진(一陣)도 볼 수 없다.

장강(長江)이 천참(天塹)이라도 지리(地利)로 혼자 하며

군사와 말 굳세단들 인화(人和) 없이 할 수 있나.

좋은 시절 일 없음도 성인의 감화로다.

소화(韶華)도 쉬이 가고 산수(山水)도 한가할 때

아니 놀고 어이 하리.

수항정(受降亭)에 배를 꾸며 압록강(鴨綠江)을 내리 저어

강가에 벌인 진(鎭)은 창기 편 듯 하였거늘

오랑캐 땅 산천을 역력히 지내보니

황성(皇城)은 언제 쌓으며 황제묘(皇帝墓)는 뉘 무덤인가.

옛 생각 회포 일어 잔을 다시 부어라.

비파곶(琵琶串) 내리 저어 파저강(坡渚江) 건너가니

층암 절벽(層巖 絶壁)이 보기도 좋구나.

구룡소(九龍沼)에 배를 매고 통군정(統軍亭)에 올라가니

대황(臺隍)은 장려(壯麗)하여 이하(夷夏)의 사이 베고 있네.

제향(帝鄕)은 어디인가 봉황성(鳳凰城)이 가깝도다.

서쪽 갈 이 있으면 좋은 소식 보내고저.

천 잔 술에 크게 취해 소매 떨쳐 춤을 추니

저물 녘 찬 날씨에 피리소리 퍼져간다.

하늘 높고 땅 아득해 흥이 식자 슬픔 오니

이 땅은 어디인가 부모 생각 나그네 눈물

절로 흐름 몰랐구나.

서쪽 변방 모두 보고 깃발 돌려 돌아오니

대장부 흉금(胸襟)이 조금은 나으리라.

가령 화표주(華表柱)의 천년학(千年鶴)이라 한들

나 같은 이 또 보았는가.

어느 때나 빼어난 경치 기록하여 저 하늘에 사뢰리오.

머잖아 위로 하늘 문에 아뢰리라.



(*편집상 原文처리가 어려워 현대어로 풀이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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