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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7)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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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8.30  15: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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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경제력과 아름다운 산수, 이 두가지 요건을 겸비한 곳은 한반도 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원효계곡은 너른 창평들녘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물을 바탕으로 이들 선비들의 문학활동에 충분한 뒷받침이 되었으며 무등산 자락의 수려한 풍광은 자연을 음풍농월하고 시문을 창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사진= 광주호에서 바라본 원효계곡 풍경. 지금은 가운데 보이는 다리를 경계로 담양군과 광주광역시로 나뉘어졌다.)







7. 원효사 계곡과 溪山風流





溪山風流의 산실 원효계곡





창평 들판을 적시며 담양으로 흘러가는 원효계곡 주변에는 조선조 별서정원의 극치라는 소쇄원을 비롯해 독수정,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등 기라성 같은 정자와 정원이 산재해있다. 이 정자들은 16~17세기에 사림문학가들이 경영한 곳으로 흔히 이 일대를 가리켜 가사문화권이라 일컫는다.



가사란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에 걸쳐 발달한 시가형식의 하나로서 현실적이고 설복적인 유교이념이나 신비롭고 교훈적인 불교이념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초기의 가사들은 안빈낙도하는 군자의 미덕을 자연 속에 묻혀 읊기도 하고 군신사이의 충의이념을 남녀사이의 애정에 비유하여 읊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정극인, 정철, 박인로, 송순, 백광홍,양사언 등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가사는 현실적인 사고가 대두하고 평민의 문학적인 참여가 커져가는 시대사조와 결부되어 전 시대의 가사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담양 가사문화권의 주요인물들은 대부분 전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원효계곡 이었을까? 담양, 광주, 창평의 세 고을은 백리형국의 넓은 지역으로 북쪽에는 용추산과 추월산, 동쪽에는 옥천산, 서쪽 병풍산과 불대산, 그리고 남쪽에는 그 이름높은 무등산의 산맥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넓은 평야지역이다. 그 가운데를 담양천과 청계천, 송강과 오례강이 흘러 농경지를 이루어 왔다.



고급문화는 먹고사는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가능한 법. 이처럼 많은 누정들이 들어설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창평 들판의 튼실하고 풍요한 경제력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창평 일대는 천석꾼이 600가구 가량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창평 일대의 들판은 풍요로운 땅이었고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한 부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창평의 한과와 엿으로 남아 있다. 특히 쌀로 만든 창평엿은 입에 달라붙지 않아 전국에서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쌀이 귀하던 때에 쌀로 엿을 만들어 먹었을 정도로 창평은 부자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와함께 조선시대 고부가가치 자원인 대나무 숲도 한몫 거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풍부한 경제력과 아름다운 산수의 두가지 요건을 겸비한 곳은 한반도 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곳은 자연을 음풍농월하고 시문의 창작에만 치우쳤던 곳이라기보다 당대 지식인들의 총체적인 문화활동의 장소로서 계산풍류의 산실이기도 하다.





계산풍류(溪山風流)의 형성





계산풍류란 경치 좋은 계곡에다 누정(樓亭)을 지어놓고 사대부들이 문사철(文史哲)을 담론하면서 즐기던 조선시대의 고급문화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호남에서 서원 창건은 대체적으로 16세기 후반쯤에 이루어지지만, 누각과 정자들은 그 보다 40~50년 앞선 시대에 세워진다. 호남의 고급문화는 서원보다는 누정에서 먼저 출발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호남 계산풍류의 현장은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시작되어 창평, 담양 일대로 이어지는 라인에 자리잡은 수많은 누정들이었다. 면앙정(仰亭), 소쇄원(瀟灑園), 독수정(獨守亭), 식영정(息影亭), 송강정(松江亭), 환벽당(環碧堂), 명옥헌(鳴玉軒), 풍암정(楓岩亭) 등을 포함하여 약 70여 개의 누정들이 창평, 담양 일대에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빈번히 일어났던 사화를 목격한 선비들이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와 자연과 벗하면서 생겨난 누정들이다. 당시에는 150여 개의 누정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 일대는 한국 누정문화의 본고장이자, 한국 문예부흥기의 중심지였다.



호남의 진산 무등산 자락은 무유등등(無有等等)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빛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시대와 역사에 따라 시냇물처럼 맑은 시심을 일구기도 했고 구국의 의혼을 태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창평들판을 적시며 담양고을로 흘러가는 원효계곡은 조선조 16세기 사림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으로 이름높다.



무등산에서 뻗어내린 다른 계곡과는 달리 원효계곡은 일찍부터 전대의 사찰문화를 누르고 새로운 사림문화를 일으켜 세웠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풍암정,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정자(亭子)와 원림(園林)이 아름다운 자연을 뜨락 삼아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을 '정자문화권' 또는 '가사문학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곳은 자연을 음풍농월하고 시문의 창작에만 치우쳤던 곳이라기보다 당대 지식인들의 총체적인 문화활동의 장소로서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산실이기도 하다. 우리시대에 와서 풍류라 하면 으레 전문 기능인들의 여흥이나 질펀한 흥취를 떠올리게 되었지만 옛 시절의 선비들에게 도학과 문예를 겸비한 도량으로서 자연속에서 자신을 수양하고 완성해 가는 행위의 모든 것을 마땅히 풍류라 불렀다. 계산풍류란 이곳 원효계곡에 머물렀던 은둔지사들의 총체적인 삶을 아우르는 말이다.



무등산 계곡에서 계산풍류가 발원하고 호남의 사림층이 한 무리가 되어 집결하는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영산강 상류지역의 넒은 들판과 이어져 있는 풍요로운 경제력과 정자터로 안성맞춤인 자연적 조건이었다.



생리가 넉넉하고 산 좋고 물 맑은 계곡의 풍치는 자연스럽게 한문을 도야하고 풍류를 즐기려는 장소로 주목되었으며 특히 이곳에서 세거하였던 제주 양씨, 광산 김씨, 지실(영일) 정씨 들의 가계에 전해지는 '참깨로 만 석을 했다.'는 식의 구전은 바로 그들의 경제력이 계산풍류와 정자문화를 가능케 했던 후원자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16세기 조선사회를 휩쓸었던 정치사적 소용돌이가 합류해왔다. 중종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내세우던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된서리를 맞는 기묘사화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전기의 사화와 후기의 당쟁을 빼놓을 수 없다. 사화는 중소지주적 토지소유에 기반을 둔 사림파와 대토지소유층인 훈구척신간의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었고 당쟁은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내부에서 일어났던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었다.



사림파의 뿌리는 고려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출발시키던 때부터 이어진다. 고려말대지주 문벌귀족에 대항하여 조선왕조를 성립시킨 신진 사대부들의 후예들이 다시 왕권 주위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부패해 가기 시작하자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은둔했던 고려말 충신들의 후예들이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정치적 박해를 면치 못하였으나 무오, 갑자, 기묘, 을사년의 사화를 통하여 세력을 형성, 급기야는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조선 유학의 역사에서 기묘사화는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사림파의 종장인 정암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온 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게 된 것이다. 조광조의 죽음은 사림파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서둘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은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둡고 답답했던 인고의 세월 속에서 사림파는 정자와 누정을 짓고 그곳에 모여 학문을 논하거나 시작(詩作)을 주고받으며 불우한 시대를 달랬다.



무등산 원효계곡에 자리잡은 계산풍류는 이같은 정치적 변화에 따른 호남 사림의 나름대로의 대응양상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산중에 은둔하였으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통하여 16세기 사림문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놓았다. 그리고 무등산계곡의 정자는 그들, 사화의 시대를 살다간 지식인들이 새로운 미래를 도모했던 거점이었다.



그 시절 호남 사람의 혼을 빚내며 계산풍류를 일으킨 첫 번째 정자가 소쇄원이었다. 소쇄원의 역사를 기록한 ‘소쇄원사실’은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고봉 기대승 등 호남 사림을 대표하는 거장들과 영남의 퇴계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쟁쟁했던 은둔지사들이 소쇄원 제월당을 통하여 교류했던 흔적을 전한다.



16세기 조선 정치사의 암흑기를 맞았던 사림파들은 자연에 은둔한 삶 속에서도 절치부심, 중앙정계 탈환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전통정원이나 원림의 기능에 주안하여 소쇄원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좀더 확대하여 16세기라는 조선사회의 정치적 격동기를 살아왔던 지식인들의 고뇌와 사상적 체취까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었을때만이 소쇄원이라는 정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소쇄원의 자연 속에 어우러지는 절묘한 조화는 바로 그들 사림파들의 정신세계에 다름아니며 그러한 문화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권력투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벼슬길이 막혀 낙향한 선비들이 자신의 삶터에 그 나름대로의 이상세계를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사랑과 애정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소쇄원의 모습이고 그 주변에 산재한 수많은 정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개별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소쇄원을 중심으로, 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던 한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는 그동안 소쇄원 관련 기사를 수차 게재하면서 소쇄원을 빗대어 ‘조선조의 동교동’으로 표현하길 즐겨했다. 당시의 소쇄원이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한국의 60-70년대에 민주화를 열망하던 민주애국지사들이 모여들어 1인 독재하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던 동교동의 모습으로 비쳐졌음이다.





溪山風流의 인맥





이곳에 행적을 남긴 인사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하다. 김인후. 송순. 양산보. 백광훈. 임억령. 김성원. 기대승. 김덕령 같은 호남 사림의 거장들이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다. 이황. 이이. 조식. 송시열 같은 거유들도 잠시나마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상춘곡의 정극인으로부터 이어진 江湖歌壇의 대부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를 위시해 송강 정철이 별뫼(星山) 일대 산야를 무대삼아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같은 절창의 가사를 토해낸 곳 또한 이곳이다.



박석무(다산문화연구회장)씨의 글 '무등산의 풍류와 의혼(義魂)'에는 이같은 계산풍류의 인맥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계산풍류가 지지당(知止堂) 송흠(1459~1547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송흠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30대에 연산군의 학정을 만나 고향에 내려온 낙향거사로 학포 양팽손, 면앙정 송순이 송흠에게서 학문과 문학을 배우면서 여기에 참여했다.



이후 하서 김인후는 면앙정 송순의 제자로 소쇄원에 주로 머물렀고 대사성을 지낸 송천 양응정은 양팽손의 아들로 계산풍류의 일원이었는데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다.



가장 한국적인 정취가 어려 있는 정원이라고 평가되고 있는 소쇄원을 세운 인물은 양산보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내려와 소쇄원을 세웠다. 양산보는 면앙정 송순과는 인척간의 아우이고,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이다.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미암 유희춘, 청련 이후백과 같은 당대의 일급문사들이 소쇄원을 중심으로 계산풍류에 참가했다.



16세기 호남의 기라성 같은 문사들의 모임인 계산풍류의 중심무대가 소쇄원이었다면, 그 좌장격은 바로 면앙정 송순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고위관직을 역임하면서도 뛰어난 학문과 고결한 인품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호남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는 가사는 그가 면앙정을 보며 남긴 글이다. 송순 밑에서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등이 가르침을 받으며 풍류를 익혔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었다.



송순이 회갑을 맞이해서 면앙정을 증축하고 제자들에게 '면앙정기'를 부탁할 때, 다른 사람을 제쳐두고 고봉(기대승)에게 부탁한 사실이 눈에 띈다. 그때가 1553년이니까 고봉의 나이 불과 26세 때였는데 당시 기라성 같은 선후배 문사들을 제치고 불과 26세의 고봉이 발탁되었다는 사실에서 고봉이 계산풍류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계산풍류의 정신은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휩쓸리지 않고 풍류를 즐기면서 문사철을 연마하는 데 있었다.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리라"는 말도 있듯이 계산풍류의 일원들은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고 국난을 당해서는 의병장으로 나가 싸웠다.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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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 송순의 철학





송순이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철학은 ‘寬容과 大道였다. 한 예로 송순의 적자인 두 아들의 이름이 海寬과 海容이다. 자식의 이름을 지으면서 宋氏 10대손 行列字인 ‘海’의 밑에 취한 글자가 ‘寬과 容’이다. 이 글자를 합하면 ‘寬容’이 된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붙여준 이름의 의미가 관용인 것이다. 어버이가 자식에게 준 가장 큰 교훈과 당부가 寬容이라는 뜻이다. 송순은 사색당파의 싸움이 난무하던 그 때 삶의 철학을 寬容으로 삼고 살았다. 관용은 大道로 이어진다. 송순은 대도의 삶을 신조로 삼고 살았던 인물이다. 송순의 애제자 정철은 공이 타계하자 가장 먼저 영전에 달려와서 스승의 삶이 ‘大道’에 있었음을 祭文으로 지어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송순의 삶은 벗과 제자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오도록 만들었다. 한 예로 1579년 송순이 87세 때 있었던 회방연의 고사를 들 수 있다. 송순이 27세에 金榜에 올랐고 그 후 60년이 되어 이를 기념하는 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임금 宣祖는 축하의 꽃과 御酒를 내리고 하객은 도백 宋麟壽를 비롯해서 백여 명이 넘었다. 밤이 되어 송순이 취하여 처소로 돌아가려고 하자 정철이 제의를 했다. ‘선생을 위하여 직접 가마를 메자’는 것이었다. 정철, 고경명, 임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시에 가마를 붙들고 옹위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대에 없는 일이라고 찬탄했다. 송순의 관용과 대도의 삶은 곧곧한 선비들로 하여금 선생을 위해서 가마를 메는 돌쇠를 자청하게 했다.



송순은 90 생애를 보내면서 학문, 정치, 유학 등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그러나 가장 큰 공은 시가에서 남긴 공이다. 송순은 거의 600여 수에 이르는 한시문과 20여 수의 시조 그리고 불후의 명작 <면앙정가>를 창작하여 오늘에 남겼다. 이러한 송순 시문학의 온실이 바로면앙정이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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