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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6)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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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8.23  15: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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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죽림재 전경. 고려멸망기에 문하시중을 지낸 조대운(曺大運)과 직제학을 지낸 그의 아들 유도(由道)가 창평(지금의 고서면 분향리)으로 쫓겨와 머물면서 창녕조씨 집성촌을 형성했다. 이후 湖南眞儒로 불리우며 숭앙받던 대유학자 竹林 曺秀文 선생이 竹林齋를 건립해 대대로 문중 講學장소로 이용했다.)







담양은 전남의 여러 지역 가운데서 특히 낙향을 선언한 선비들이 모여들던 대표적인 고향이다. 역사적으로 선비들이 落南해 담양으로 입향한 것은 멀리 조선 건국부터 시작된다. 고려말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낸 서은 전신민이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며 담양(남면 연천리)에 내려와 ‘독수정(獨守亭)을 짓고 은거했다.



또한 고려말 문하시중이었던 조대운은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가 억울하게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직제학 조유도를 시켜 정몽주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두 번씩이나 올렸다가 담양(고서면 분향리)으로 쫓겨나 焚山의 화를 입었던 인물이다. 창녕 조씨 집안의 대운과 유도의 落南은 폐쇄적 성격이 강했던 담양지역문화에 중앙의 새로운 문화를 옮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에 안주하기 십상이었던 당시 담양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건으로, 이들 두 사람의 입향은 湖南眞儒(호남의 진짜 유학자)라 칭하며 숭앙받던 대유학자 竹林 曺秀文으로 이어지면서 항차 호남사림의 뿌리로 자리매김한다.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落南, 무등산의 기운이 이어진 담양 일원에 누와 정자를 지은 뒤 빼어난 자연경관을 벗 삼아 시문을 짓는 것으로 소일하게 된다.



이들은 修身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도 국가에 중대한 사안이 발생하면 이를 비판하고 소를 올리는 등 그야말로 ‘재야인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은 또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한글로 시를 짓는 등 국문학 활성화에도 기여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사문학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등 18편의 가사가 지어지고 전승돼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落南해 담양지역에서 활동했던 선비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이후 취재가 예정된 ‘담양의 누정과 선비들' 그리고 ‘담양권 가사문학’ 등에서 소상히 다루도록 하고 이번 호는 호남의 사림과 조선조 사화기에 호남사림의 일맥을 이루었던 해남윤씨家의 落南을 통해 士禍 이후 선비들의 落南과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6. 歷史의 요동과 선비의 落南





士林의 정계 진출





조선 건국과정에서 역성혁명에 반대한 신흥 사대부들은 거의 관직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방의 중소 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15세기 말 이후 훈·척신의 특권적 비리행위를 비판하며 중앙정계에 진출, 사림(士林)이라는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층을 등용하면서부터다. 이들은 길재의 손제자인 김종직이 출사한 것을 계기로 다시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그 뒤를 이으면서 중앙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주로 언관직에 임명되어 훈·척신 계열의 비리행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후 1506년 연산군의 폭정을 무너뜨린 중종반정은 존재가 희미했던 호남지방 사림흥기(士林興起)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호남의 사림은 낙향한 재지품관과 이주한 사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김종직과 김굉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종반정 이후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과거를 통해 관로(官路)에 오르기 시작한 사림은 점차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등용되어 중앙정계에 활발히 진출하게 된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비리를 공격하면서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생겼는데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파의 정치적 보복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같은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중종에 의하여 중용된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들은 훈신들의 비리를 계속 비판하는 한편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실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연산군의 폭정과 훈·척신들의 수탈로 피폐해진 향촌을 안정시키기 위해 향약을 보급하고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현량과를 실시하여 지방의 사림을 대거 정권에 참여시켰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화가 기묘사화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14)에 일어났는데 조광조의 혁신정치에 불만을 품은 훈구세력이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계략을 써서 중종을 움직여 조광조 일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士林의 落南





조선전기 대부분의 신진 사류들처럼 호남의 사림들도 정치권력의 명분을 유교논리 안에서 찾았다. 그 중에서도 도학(道學)과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을 덕목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논리로 확립하여 갔다. 이 같은 의리실천의 문제가 가장 높아진 것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사육신의 반대나,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폐비윤씨와 연루된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그리고 1519년 을묘사화(乙卯士禍) 등에서였다. 또한 일련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세력의 논리와 명분은 왕권과 결탁된 훈구세력에 의하여 탄압을 받게 되지만, 1506년 발생한 중종반정은 사림의 명분과 사회적 입지를 새롭게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연산군의 방탕과 폐정에 종지부를 찍은 중종반정은 민본정치의 의리를 실천하지 않을 때에는 왕마저도 그 징계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실증한 것이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이러한 논리는 당시 사림파의 정신적 영수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더욱 고양되었고, 호남의 인맥도 사실은 이러한 분위기와 연계하여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절의(節義)계 인물들의 호남지방 은거현상은 이후 연산군 때의 사화기에도 계속됐고 여기에 더하여 사림파 인물의 영수였던 김굉필(金宏弼)이 순천에 유배되어 와서 문인을 배출했으며 사림계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던 김안국(金安國)의 전라도 관찰사 부임이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 최보(崔溥)의 나주, 해남, 광주에서의 활동 등은 뒤이은 시기의 사림활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기묘사화기를 즈음해서 최산두의 동복 유배, 조광조의 능주 유배와 사사, 신잠의 장흥 유배도 이러한 사림적 분위기 고양에 기여했다.



조선전기 중앙정계에 진출한 호남사림의 선조들은 신왕조의 정치적 파동 때 절의를 지켰던가 혹은 건국 초기에 정쟁에 연루되어 희생을 당한 사대부들로서 정치적 보복을 피하고자 가급적 중앙의 정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이 좋은 호남지역을 최적의 은둔 장소로 선택했다.



이렇듯 호남지역으로 입향하는 풍조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계기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석천 임억령의 스승이자 호남사림의 대표격인 눌재 박상의 선조인 충주 박씨도 이와 같은 경위로 호남에 입향했다.



호남에 입향한 사림의 대부분은 조광조의 정치노선에 동조했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조광조가 사사된 후 중앙정계에 대해 회의와 불신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비판적 분위기는 호남사림의 당대적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호남 문화의 중심지인 광주, 나주 지역에 모여서 지적 활동을 벌여 선진적인 문화창출에는 기여했지만 경국제민(經國濟民)의 현실정치에는 불만이 많았다. 연속되는 사화로 인해 사림이 박해당한 것과 그러면서도 정국은 더욱 혼미하여 경국제민의 본래 취지가 실현될 가망성이 점차 멀게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속에서 사림들은 의리와 명분의 도학자적 선비정신을 끝까지 지키고 심성을 도야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키 위해 누정을 건립하게 된다.



정치상황에서 절망하고 좌절한 지식인들이 고뇌를 달래고 현실에서의 불만과 갈등을 강산에 의탁하여 풀어버리고, 선비로서의 품위와 위세를 지키기 위해 건립된 누정이 무등산 원효계곡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사화의 피해를 벗어남은 물론 부도덕한 권력에 지조를 잃지 않으면서 사림의 정신, 곧 의리와 명분을 지키기 위한 심신수련을 목적으로 추진되어진 ‘사림의 모임’이 계산풍류(溪山風流)로 흘러내리게 된다. (계산풍류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연재)





해남윤씨家의 落南





16세기 사화기에 호남지방에서 많은 문인학자들이 배출되면서 중종 명종 때에 이르러 호남 사림들의 중앙진출이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해남정씨 정호장 집안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던 인물이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해남정씨 그리고 이들 문인들의 혈연관계로 인해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의 문인학자들이 서로 사림의 한 학파를 이룰 정도로 호남사림의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해남윤씨 집안 또한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 4형제 가운데 윤구(衢), 윤행(行), 윤복(復) 3형제가 중종 때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등과자가 이어진다. 또한 해남정씨와 관계를 맺었던 유성춘과 유희춘 형제의 선산 유씨, 임억령과 임백령 형제를 배출한 선산 임씨 등이 중종 명종 때에 중앙에 진출한 대표적 가문들이었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이 사화에 휩쓸리는 정치적 혼란기가 도래하면서 해남정씨를 통해 기반을 잡고 성장했던 인물들 또한 사화의 참화를 비켜갈 수 없었다. 김종직의 문인인 금남 최부는 1498년(연산군4)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던 김일손이 쓴 조의제문(弔義祭文)이 문제가 되어 김일손 등 사림파 거의 전부가 죽거나 귀양가는 무오사화가 일어나는데 이때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당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1504년(연산군 10) 4월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됐다가 참수된다.



최부는 147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 김굉필 등과 교유했다.

최부가 언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처향(妻鄕)인 해남에 거주하면서 사위인 유계린(유희춘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윤효정, 임우리 등을 가르치면서 김종직의 학문이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미암 유희춘의 어머니는 금남 최부의 둘째딸로 해남에서 낳고 결혼한 인물이다. 미암은 최산두와 김안국으로부터 사사 받았는데 김안국은 경기학파로 조광조와 함께 김장생의 문하생이었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는데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잡자 유희춘 등 대간을 파직하고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듬해 9월에는 전라도 양재역에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미암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당하여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석천 임억령은 해남정씨 문명(文明)의 사위가 된 임수(林秀)의 손자로 석천은 사화에 깊이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동생 임백령(林百齡)은 호방하고 기백 있는 인물이어서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총애를 얻어 을사사화의 주동 인물이 된다. 석천은 동생 백령이 불의의 사화를 주동하고 있음을 알고 거사를 중단하길 원하지만 듣지 않자 형제의절을 선언하고 낙향해 버린다.



또한 여흥 민씨의 입향조가 되었던 민중건은 계유정란 때 조부 민신을 비롯한 6부자가 멸문지화를 당했으나 종의 등에 업혀 간신히 진도현감으로 있는 외삼촌댁에 피신하여 있다가 살아남은 인물로 이후 해남정씨에 의탁하여 사위가 된 인물이다.



당시 이러한 사화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피난 내지는 낙향을 하게 되는데 마을의 입향조를 보면 이처럼 사화로 인한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박해를 피해 중앙으로부터 멀리 낙남(落南)해온 가문들로 이들이 호남을 낙남의 대상지로 택한 것은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정화(政禍)가 미치지 않으며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은둔의 적지로 판단하였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어초은 윤효정으로부터 시작된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맥이 아들 윤구로 이어지는 16세기는 흔히 '사림정치'의 시대로 불린다. 이 시대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같은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얼마 전 대박을 터뜨린 '왕의 남자'가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연산군 시대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일어난 파란의 시기이기도 하다. 윤구는 최부의 계열로 이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이중호로 이어진다.



해남윤씨家는 최부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는다.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등은 어초은 윤효정이 최부로부터 수학하였듯이 서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은 후에 호남사림의 대표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해남의 육현(六賢)으로 추앙받게 된다.



해남윤씨家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의 문인인 최부를 그 연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림파적 성향을 띄었다. 이로 인해 여러 인물들이 16세기 이후 당파로 연결되면서 사화로 인한 심한 부침을 겪게 된다.



해남윤씨家에서 이러한 사림정치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인물이 귤정(橘亭) 윤구(尹衢)다. 윤구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3걸로 일컬어지는 걸출한 인물로 동생인 윤행과 윤복도 중종 때 모두 문과에 급제한다. 윤구는 1513년(중종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했으나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어 영암에 유배됐다가 풀려난다.



해남윤씨家는 김종직을 문인으로 하는 사림파의 흐름 속에서 동서분당(동인·서인) 이후에는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윤의중(尹毅中, 윤구의 아들)과 광주이씨家의 이발(李潑)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남북 분당 때 이발 가문과 같이 북인으로 진출하는 가문과 윤선도 같이 남인으로 진출하는 두 개의 당파로 나누어진다. 이후 인조반정과 경신대출척 등을 거치면서 해남윤씨家는 남인계열에 섰다가 이후 정계에서 유리되어 주로 재야사족으로 남게 된다.





호남가단(湖南歌壇)의 성립





호남 사림들은 중앙 진출 과정 중에서 많은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 '호남가단'이라는 말처럼 시문학과 예술의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사림이 추구한 개혁이 사화라는 파국으로 좌절되면서 현실정치 참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좌절과 퇴각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이념적으로 재충전하는 방식으로 전환됐다.



현실 정치는 지고한 도덕적 이상에 의해 철저하게 재정립되어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타락한 세속을 부인하고 이와 단절된 전원의 세계로 돌아와, 밖에서 펼치지 못한 숭고한 정신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념적 재충전이 풍류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림파들이 고향에서 열심히 '수기'를 하면서 또 하나의 세계를 개척했는데 그 세계가 바로 시문학의 세계다.



조선조 때 남도의 시문학은 그 형세가 다른 어느 곳보다 융성했다. 한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국문시가에서는 호남가단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어초은 윤효정과 윤구가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 향리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수기'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였던 것도 이러한 사림시대의 사화를 통한 정치적 역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불리우는 고산 윤선도의 본향이 해남윤씨 녹우당이라는 것에 견주어 윤효정과 윤구로부터 내려오는 사림정치의 흐름을 이어 학문과 지식을 정치적 바람 속에서 시가라는 아름다운 정서로 표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





1)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훈구대신의 비행을 폭로, 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그 대립이 표면화됐다.

훈구대신 유자광은 자신이 함양에 놀러가서 시를 지은 뒤 현판하게 했던 것을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떼어내고 불태워 버린 일로 원한을 갖고 있다가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 김종직이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1492년에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사림파 김일손, 권오복, 이목, 허반, 권경유 등은 선왕을 무록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 강겸, 이수공, 정승조, 홍한, 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 이종준, 이주,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 보냈다.





2)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로 일어난 사화다. 성종비 윤씨는 판봉상시사 기무와 부인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연산군의 생모인데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됐다가 1480년 사사(賜死)됐다.

1483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했는데, 이때 임사홍이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런 차에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가 폐비의 폐출, 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일이 크게 벌어졌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다.

그는 먼저 정, 엄 두 숙의를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 보냈다가 후에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 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타살했다. 연산군은 폐비윤씨를 복위시켜 성종묘에 배사하려 했는데, 응교 권달수, 이행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 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했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 처벌했다.





3)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가 축출된 사건이다. 반정(1506년 9월)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했으며 두 차례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하고 명망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했다.

중종의 지우를 얻은 신진 사류는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를 실현키 위해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 이론을 가르치고 미신타파와 향약 실시를 강행했으며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반포케 하고 현량과를 설치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토록 했다. 이들은 또 뜻을 달리하는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는 한편 반정 공신들 중 76명에 대해 공신록을 삭제해야 한다는 이른바 위훈삭제 사건을 야기시켰다.

신진사류의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중종의 후궁인 홍경주의 딸을 이용,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走·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심정·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사류의 급진·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낸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고, 김정·기준·한충·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했다.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됐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이라 한다.





4)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 일파 小尹이 윤임 일파 大尹을 몰아내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김안로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 측 세력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와 윤지임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를 둘러싼 외척간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서 경원대군 환(緝)이 각각 탄생하자,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코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와 대립하게 된다.

인종이 즉위한 뒤 정계는 大尹이 득세하였고 사림들도 대윤, 소윤의 양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과정에서 小尹인 공조참판 윤원형이 大尹의 대사헌 송인수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기면서 大尹측에 대한 불만이 증폭됐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즉위하자(명종)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정의 실권은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고 윤원형은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을 사주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했다.

이로써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됐다가 사사(賜死)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됐다는 경기감사 김명윤의 밀고로 주살됐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의 무고로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등 10여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됐다.





(취재에 도움을 주신 해남군청 정윤섭 선생님과 윤고산문화재단 윤형식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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