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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5)기획연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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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8.16  15: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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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정극인 선생 동상과 상춘곡가사비)



정극인 선생이 상춘곡을 지었던 칠보면 시산리. 지금은 물길이 바뀌고 주변 풍광도 많이 변했지만 정극인 선생이 머물렀던 시절에는 앞으로 강이 흐르고 뒤편 산에는 꽃과 열매가 만발해 풍광이 수려했다고 한다. 정읍시에서 이곳에 상춘곡 가사비를 세운 뒤 최근에는 동상도 건립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정자는 후송정이다.







5. 태산풍류의 계승 / 상춘곡과 고현향약





고려 長歌形式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 歌辭는 고려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승원가(僧元歌), 서왕가(西往歌) 또는 같은 시대 신득청의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 등에서 어느정도 형식의 골격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의 賞春曲에 이르러 그 형식이 완전 정제되어 歌辭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이후 가사는 시조와 함께 조선조 국문시가(國文詩歌)의 2대 지주로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특히 가사문학이 절정기에 달했던 15, 16세기에는 허다한 작가와 작품이 배출되면서 가사는 양과 질 모든 면에서 공히 조선문학의 정상을 이루게 된다.



조선의 가사가 이처럼 성황을 이룬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가사의 형식적 특성인 長形性과 이에따른 양반계층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도구로서의 적합성을 들 수 있다. 가사는 時題나 詩想의 제약을 받지 않는 長形의 형식으로 이에 포함된 詩句는 수십 수백에서 무려 수천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가사는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는데 편리한 장점을 지니게 되었으며 서정적(抒情的)인 내용은 물론 서사적(敍事的)인 내용 즉, 敍景, 紀行, 流配, 詠史, 道德 등과 같은 것도 담아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런 형식적 특성과 함께 이에대한 양반계층의 표현수단으로써 활용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儒學)이 크게 번성했으며 정치이념은 물론 모든 윤리도덕 규범과 철학사상 등 모든 문화현상이 유학에 기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런 계제에 유학과 밀착해 있던 양반계층들이 그들의 문학형식으로 가사를 즐겨 활용함으로써 가사문학이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양반들이 가사를 즐겨 활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가사는 도덕적인 제사장을 펴 백성들을 교화하는데 가장 알맞은 형식이라는 것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삼강오륜과 같은 도덕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장형의 가사가 긴요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장하는 이른바 권선징악의 도덕적 교훈적인 가사가 많이 유행하게 되는데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도덕가(道德歌)‘, 자경별곡(自警別曲) 등의 가사는 모두 이 유형에 속하는 가사들이다.



둘째, 가사는 양반들이 風流를 표현하는데도 알맞은 형식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시 풍류를 표현하는데 주류를 이루었던 매체는 음악, 무용, 詩歌가 대표적이었는데 詩歌에는 한시, 시조와 더불어 가사도 크게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시나 시조가 즉흥적이고 간결 소박한 풍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반해 가사는 忽然하고 閑閑한 멋을 담고 있는 풍류라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가사는 조선조 양반들의 도학사상(道學思想)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道學은 원래 邪氣없는 純然한 심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이 邪氣없는 바른 심성은 오직 自然만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 양반들은 自然美를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자연을 예찬하는 자연풍류의 문학(田園文學)을 탄생시켰다. 여기에다 無爲自然의 老莊思想도 한몫 거들면서 문학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양반들이 風流美의 표현수단으로 가사형식을 즐겨 활용하다보니 조선시대에는 자연을 소재로한 풍류문학이 성황을 이루었으며 ‘상춘곡’, ‘면앙정가’, ‘관동별곡’. ‘성산별곡’과 같은 가사는 모두 이 유형에 속하는 가사들이다.



풍류의 기원은 멀리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들이 자연을 찾아 놀며 詩歌를 짓고 즐겼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실려 전해오는데 우리의 先人들이 자연을 愛好하고 풍류의 멋을 즐긴 것이 하나의 맥락을 이루면서 우리 풍류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전통은 계승되어 自然愛好思想과 더불어 멋진 풍류의 미를 표현한 詩歌가 허다하게 등장하는데 別曲의 화전별곡을 비롯해 강호사시가, 면앙정단가, 고산구곡가, 어부사시가, 오우가 같은 時調, 그리고 상춘곡, 면앙정가, 귀전가, 관서별곡, 서호별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백양루별곡, 강촌별곡 등과 같은 歌辭들로 그 題名이 보여주듯 아름다운 자연을 찬미하며 지은 노래들이다.



이번호에서는 이들 작품 중 가사의 효시라 일컫는 상춘곡을 통해 당시의 풍류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상춘곡[賞春曲] 설명





조선 성종 때 丁克仁(1401~81)이 지은 가사로 총 39행 79구로 구성되었으며 불우헌집 권2에 실려 있다. 단종이 폐위되자 正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시 칠보면)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교육할 때 지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봄 경치를 완상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작품내용은 서사(序詞)·춘흥(春興)·취락(醉樂)·결사(結詞)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속세를 떠나 벽계수(碧溪水) 앞에 수간모옥(數間茅屋)을 짓고 자연과 벗하는 풍월주인(風月主人)의 삶을 제시한다.



둘째·셋째 단락에서는 봄 경치를 즐기며 자연에 몰입하는 삶이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의 삶과 비견되어 그려진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이렇게 세속의 명리를 멀리하고 청풍명월을 벗하며 사는 삶에 만족한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작품에 그려진 전체적인 내용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던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도 실력을 쌓아 중앙 정계로 진출하려다가 거듭되는 수난을 겪던 조선 전기 사림파의 出處觀을 알 수 있다.



상춘곡 몇 구절을 통해서도 당시 선인들에게서 스며나는 풍류의 멋이 얼마나 도도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이같은 자연찬미의 풍류가 후속 작가들로 하여금 同類의 주제 가사를 많이 낳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윤제가 이 작품을 가사의 효시작으로 본 이후, 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적지 않게 있었다. 그 근거로 상춘곡이 실려 있는 불우헌집이 정극인 사후 30년 뒤에 편찬된 점, 임진왜란 전 표기법이나 어휘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내용이 작자의 생애와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 그리고 효시작으로 보기에 형식이나 표현이 너무 정돈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정극인이 작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일단 정극인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춘곡이 지니고 있는 歌風은 이후 宋純의 면앙정가로 이어져 江湖歌道라는 詩風을 형성했다.





상춘곡 原文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한고.

옛 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까.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 만한 이 하건마는,

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마랄 것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앞에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주인(風月主人)되여셔라.

엊그제 겨을 지나 새 봄이 도라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계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이에 다를소냐.

시비(柴扉)예 거러 보고, 정자(亭子)애 안자 보니,

소요음영(逍遙吟詠)하야, 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

한중진미(閑中眞味)를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답청(踏靑)으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란 내일하새.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해 조수(釣水) 하새.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준중(樽中)이 뷔엿거든 날다려 알외여라.

소동(小童) 아해다려 주가(酒家)에 술을 믈어,

얼운은 막대 집고, 아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의 호자 안자,

명사(明沙) 조한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로다.

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메이 긴 거인고.

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를 부치 들고,

봉두(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려 잇네.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재폈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유여할샤.

공명(功名)도 날 꺼리고, 부귀(富貴)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外)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원문 중 일부는 컴퓨터에 옛글이 없는 관계로 현대어로 변형하였음.)





현대어풀이





속세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 사람의 운치 있는 생활을 따를까 못 따를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나만한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자연과 벗하여 사는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일까?

두어 간 초가집을 맑은 시냇물 앞에 지어 놓고

송죽(松竹)이 우거진 숲 속에 자연의 주인이 되었도다.

엊그제 겨울이 가고, 이제 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 살구꽃은 저녁 놀 속에 피어 있고,

버드나무와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해 냈는가, 붓으로 그려냈는가?

조물주의 신비로운 창조의 솜씨가 사물마다에 야단스레 나타나 있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의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마다 아양부리는 모습이로구나.

자연과 내가 하나이니 흥(興)이야 다르겠는가?

사립문을 나와 걸어도 보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또 천천히 거닐며 시를 읊기도 하며 산 속에서 지내는 나날이 고요하고 적적(寂寂)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가로운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누리는 맛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 뿐이로구나!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을 가자꾸나.

푸른 풀을 밟으며 들을 산책하는 일은 오늘 하고, 냇물에서 목욕하는 일은 내일 하세.

아침에는 산나물을 캐고 저녁에는 낚시질을 하세.

이제 막 익어서 발효한 술을 갈건(葛巾)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를 꺾어 그것으로 잔 수를 세어 가며 먹으리라.

부드러운 봄바람이 잠깐 불어 푸른 물이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술잔에 스며들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술동이가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아이를 시켜 술집에 술이 있는가를 물어 받아다,

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동이를 메고,

나직이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 시냇가에 혼자 앉아,

깨끗한 모래사장 맑은 물에 술잔을 씻어 술을 가득 부어 들고,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저 들이 바로 그 선경인가?

소나무 숲 사이 좁은 길에 진달래꽃을 부여잡고,

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내려다보니,

수많은 촌락이 여기저기에 벌여 있네.

안개와 놀과 빛나는 햇살로 채색된 자연의 아름다움은 마치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

엊그제까지 검던 들이 봄빛으로 넘치는구나.

공명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소박하고 청진한 시골 생활에 부귀와 공명 같은 번거로운 생각을 아니 하네.

아무튼 한평생 자연을 벗하여 욕심 내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





태인고현동향약은 조선 성종6년(1475)에 불우헌 정극인 선생이 만든 태인동중향음서(泰仁洞中鄕飮序)의 정신을 계승해 만든 것으로 선조년간 임진란을 전후해 시작하여 1977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전라도 태인현 고현동((현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결성, 시행한 향약(鄕約)으로 총 29책이며 필사본이다.



이들 문헌은 동안(洞案) ·동중좌목(洞中座目) ·고현동좌목(古縣洞座目) ·수정동안(修正洞案) ·동계좌목(洞契座目) ·태산향약안(泰山鄕約案) ·동학당수계안(洞學堂修계案) ·고현동각수계안(古縣洞閣修계案) ·동각계안(洞閣계案) ·고현동약(古縣洞約) 등 명칭은 다소 다르기는 하나 내용이 향약자료로 분류되는 문헌이 24책이며, 나머지 5책은 남학당기(南學堂記) ·완문(完文) ·상선록(賞善錄) ·동학당전답안(洞學堂田沓案) ·동각복구안(洞閣復舊案) 등으로 향약과 관련되는 자료들이다. 책의 형태 ·체제는 각각 다소 다른데, 서(序) ·발(跋) ·좌목(座目) 및 규약(規約)등이 갖추어진 책도 있고 단순히 좌목(座目)만 있는 책도 있다. 동안(洞案)은 불우헌 정극인 선생(1401∼1481)이 사간원 정언(正言)을 사임하고 태인현 고현동으로 이거하여 현지주민의 도의선양(道義宣揚)과 상호친목(相互親睦)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미풍양속을 권장교도(勸奬敎導)하려는 목적으로 향음례(鄕飮禮)를 시행하고 성종6년(1475)에 작성한 태인현동중향음서(泰仁縣洞中鄕飮序)에 의하여 계승된 향약문헌이다.



정극인 선생이 창작한 원본은 실전되었으므로 중종5년(1510)에 전례조좌랑(前禮曹佐郞) 송세림(1479∼?)이 속행하면서 발문을 지어 구좌목(舊座目)의 전존, 규약의 제정 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원본은 전존되지 않고 있다. 이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선조년간(宣祖年間)에 다시 속행되었는데, 이것이 현존한 제1책의 동안(洞案)이며, 이후 1977년까지 이어졌다. 단 정조 ·헌종년간의 문헌은 상당수 결본이다. 이 문헌은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소재 동각(洞閣)에 보관하고 靈光 丁氏 ·礪山 宋氏 ·慶州 鄭氏) ·淸道 金氏 ·道康 金氏 등 최초 회원인 오대문중의 자손들이 돌려가며 유사를 선임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향약은 본디 중국 宋代 呂氏鄕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착한 것을 권하고 악한 것을 징계하며 어렵고 구차한 때에 서로 돕고 구원하기를 목적으로 하여 마련된 향촌(鄕村)의 자치규약(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조선조에서는 태조7년(1398)에 태조가 향헌(鄕憲)41조를 제정하여 고향 함흥에서 관치향약(官治鄕約)을 실시한 것이 향약의 효시이며, 자치향약으로는 이퇴계의 예안향약(禮安鄕約), 이율곡의 파주향약(坡州鄕約)등이 유명하다.



이 향약은 정극인 선생의 향음서(鄕飮序)를 기준으로 하면 성종6년(1475)이 그 시행 시초가 된다. 이 동안(洞案)은 중간에 결본이 있고, 또 구한말 이후의 것(1911∼1977)도 6책이나 포함되어 있으나, 선조년간(宣祖年間)에서부터 연대가 이어지며 현존하는 향약문헌으로는 양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 가장 많고 충실해 향약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손꼽히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서영준 記者 자문/최한선 교수(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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