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기획취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4)기획취재/ 가사문학의 본류를 찾아(4)
취재팀  |  -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6.08.07  15:13:2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사진= 송광사 전경)





새벽녘 길을 나섰다. 멀리 강진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순천 송광사를 들려야 하는 여정 때문이다. 고려 후기의 불교개혁을 주도했던 양대 결사, 백련사와 수선사를 찾아 혹여 스며있을지 모를 당시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더욱이 백련사가 소재한 강진 만덕산은 오솔길을 사이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명저를 집필한 다산초당이 함께 자리해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가사의 효시로 불리우는 상춘곡의 저자 불우헌 정극인 선생의 후손이기도 하다. 취재진은 굳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백련사를 찾는 길에 다산초당도 둘러보기로 했다.







4. 고려후기의 불교개혁운동과 호남





무신의 난 이후 불교계는 고려전기의 불교에 대해 반성하면서 자체적으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불교계의 주목할만한 현상은 지방에서 개혁적인 신앙결사의 유행이었다. 이것은 개경중심의 체제유지적인 세속적 불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후기의 불교신앙 결사운동은 조계종의 수선사와 천태종의 백련사가 대표적인 존재였다. 수선사는 순천 송광사를 중심도량으로 한 정혜결사였으며, 백련사는 강진 만덕사를 근본도량으로 한 법화결사였다. 수선사와 백련사는 한반도의 남부지방에서 당시의 타락한 불교를 질타하면서 불자의 본래 면목을 되찾으려는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개혁운동은 개경이 아닌 지방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성격의 신앙결사를 조직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수선사의 개창자는 지눌이었다. 그는 불교 수행의 핵심적인 두 요소인 禪定과 知慧를 함께 닦자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했다. 이것은 종파 사이의 대립과 명리에 집착한 당시 불교계에 대한 일대 혁신적 불교개혁운동이었다. 정혜결사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인데, 돈오는 인간의 본래 면목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돈오라고 하며, 비록 돈오하여도 묵은 습관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라는 종교적 실천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돈오점수에 입각한 정혜쌍수를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하였으며, 다시 화엄사상을 도입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워 華嚴과 禪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지눌은 이러한 기초위에 知解의 장애를 완전히 떨쳐 버리기 위해 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여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세워 선문의 活句를 참구하게 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교선의 절충적 단계를 뛰어넘은 교선일치의 독특한 철학세계를 마련했다.



지눌을 이은 제2세 혜심(慧諶)은 화순출신으로 지눌의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고양하여 선(禪)우위의 새로운 불교로 접어들게 하였으며 또한 유불일치설을 내세워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이루는 사상적 경향을 보였다. 그는 유불의 조화를 추구하되 불교가 주체가 된 불교위주의 해석을 모색하고 있어 조선시대 불교계의 유불일치설과는 다른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제6세 충지(沖止)는 장흥출신인데, 고려 중기 순천 定慧寺 창건자인 혜소국사의 고답적이며 귀족적인 경향의 개인적인 수업형태를 중시한 선풍을 강조한다. 이러한 충지의 불교는 지눌의 불교와 확실히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충지 이후의 수선사의 전개과정은 당시 불교계 상황과 관련시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수선사의 후원세력은 시기에 따라 변하고 있다. 수선사 초기 지눌 시기에는 중앙의 무인정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수선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금성(나주) 安逸戶長 陳直升과 그의 처 珍衣金 부부였다. 그들은 백금 10근을 시주하여 사찰 조성비용을 삼게 하였을 뿐 아니라, 지눌의 저술인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를 출간할 때도 시주를 했다. 남방의 부자들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은 노력을 보태 사찰을 이룩했다. 이와 같이 지눌의 수선사 중창은 송광사 부근의 지방사람들, 특히 향리 등의 적극적 지원 아래 가능했던 것이다.



수선사가 최씨무인정권의 집정자인 최우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 시기는 제2세 혜심 때다. 혜심 때에는 강종(康宗)을 비롯한 왕실, 최우를 비롯한 무인세력, 최홍윤을 비롯한 무인정권에 참여한 문인들이 수선사에 귀의함으로써, 수선사는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크게 융성했다. 특히 최우는 그의 두 아들 만종과 만전을 출가시켜 혜심에게 득도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축성보(祝聖寶), 기일보(忌日寶) 등의 명목으로 전답과 염전 등 막대한 시주를 하여 사원경제를 풍부하게 했다. 혜심은 최씨무인정권의 물질적인 지원에 정신적 후원을 상호 교환한 밀착된 관계였으나, 최우의 강화도 초청에는 끝까지 거절하여 중앙의 집권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수선사와 중앙 정치세력과의 관계는 제2세 慧心 이후 제3세 夢如, 제4세 混元, 제5세 天英 등을 거치면서 더욱 밀착된다. 1250년(고종 37년)에 건립된 ‘진각국사비문’ 음기에 기록된 공경대부, 재추, 상서 등 관료, 왕실과 최충헌家의 부녀 등의 인명으로 미루어 그 밀착도를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1245년(고종 32년)에 최우의 원찰로 강화도에 선원사가 창건되고 혼원, 천영 등 수선사의 사주가 된 인물들이 사찰 법주를 담당하면서 수선사와 최씨무인집정자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됐다.



그러나 원나라 간섭기의 제6세 충지 때는 후원세력이 크게 바뀌었다. 충지와 교류한 인물은 당시의 권문세족으로 등장한 국왕 측근세력이나 재추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 시기는 수선사 불교가 귀족적이며 친원적인 성격으로 변질되는 시기로 앞으로 새롭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한편 요세가 제창한 백련사는 수선사와 일정한 관련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성격의 신앙결사인데, 의천의 천태종과도 성격이 다른 법화신앙을 내세운 불교개혁운동이었다. 요세의 백련사는 지눌의 수선사와 상당히 다른 사상적 입장을 취했다. 지눌이 지혜와 돈오를 강조했다면 요세는 참회와 정토를 강조했다. 양자의 차이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생의 근기에 대한 의식의 차이를 시사하는 것으로 요세는 교화의 대상으로 “죄의 업장이 깊고 두터워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나약한 범부”를 의식하였던 것에 비해 지눌은 “최소한의 지혜력 정도를 가진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뛰어난 끈기를 지닌 사람”을 대상으로 삼았다.



지눌의 수선사에 참여했다가 사상적 차이를 느낀 요세는 1208년(희종 4년) 월출산 약사암에서 조계선에서 천태교관으로 되돌아갈 결정적인 자각을 하게 된다. 그는 탐진현(강진) 토호 최표 최홍 형제, 이인천 등의 요청으로 만덕산으로 옮겨 1211년(희종 7년) 옛 만덕사 터에 사찰을 크게 중창하고 1216년(고종 3년)에 낙성법회를 열었다. 이어 1232년(고종 19년)에 ‘보현도량’을 열어 정토구생을 닦으며 천태의 법화삼매참의에 의한 법화참법을 실천했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에 못지않게 성황을 이루었다. 이로인해 백련사의 보현도량은 강화도의 최씨무인정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1237년 여름, 고종이 요세에게 선사의 칭호와 함께 세찬을 내리기도 했고, 1240년 8월 최이가 보현도량에서 ‘묘법연화경’을 조판할 때 그 발문을 찬함으로써 백련사와 최이 정권의 밀접한 유대를 과시하기도 했다.



백련사 참여대중은 보현도량 개창 이전에는 강진의 지방토호 및 지방 수령이었는데, 보현도량 개창 이후에는 최씨무인집정자와 이들과 밀착된 중앙관직자 및 새로운 지식인층으로 대별된다. 요세에게 출가하여 백련사에 적극적인 뒷받침을 했던 제4세 진정국사 천책(眞淨國師 天?)은 1232년 백련사에 보현도량이 개설될 때 “보현도량기시소”를 지었으며, 4년 뒤인 1236년에는 ‘백련결사문’을 짓기도 했다. 그는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실천문으로 정토관과 참법을 강조한 서민불교를 표방했다. 또한 그가 불교의 입장에서 유?불의 근원을 동일하게 이해했던 점은 주목된다.



그 뒤 백련사의 원혜와 무외정오가 충렬왕의 원찰 개경 묘련사에 진출함으로써 백련사의 사세가 중앙에까지 확대되었지만, 중앙왕실과의 결합으로 묘련사계 천태종은 귀족불교로 변질되어 간다. 묘련사계 천태종이 부원세력인 귀족불교로 변질되어질 무렵 이것을 비판하면서 진정천책의 계승자인 무기운묵(無寄雲?)이 백련사 초기의 열렬한 정토신앙에 바탕을 둔 서민불교적인 새로운 불교결사운동을 일으켰다.



고려후기 최씨무인정권은 대몽항쟁의 차원에서 지식인과 서민대중을 규합하는데 목적을 두고 수선사와 백련사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수선사와 백련사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최씨무인정권에 대해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글/ 한명석 記者 사진/ 서영준 記者 자문/ 최한선 교수







취재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기자코너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담양군 담양읍 미리산길 28 별해리A 상가동 3층  |  대표전화 : 061)383-2772  |  팩스 : 061)383-9945  |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전남 다 174호(2002.10.25)
대표이사·발행인 : 김동섭  |  편집인 부사장 : 김광찬  |  편집국장 : 정용택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용택
Copyright © 2013 담양인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