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둥지를 튼 담양댐 근교의 시골집 황토방에는 집 뒤편으로 채 200평이 안되는 텃밭이 딸려있다.
맨 처음 시골에 땅을 마련할 때는 꿈도 좋았다.
집사람과 머리를 마주대고 한쪽에는 고구마, 다른 한쪽에는 고추, 상추, 토마토, 가지, 또 다른 곳에는 오이를 심고 마늘, 대파도 심어 그야말로 무공해 식품을 자급자족해 친지들의 식탁에도 나눠주고 우리 또한 건강식 웰빙 식단을 차려먹는 완벽한 구상을 하였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상추, 고구마를 심어놓은 밭에는 일주일만 돌아보지 않으면 잡풀이 무성해 풀밭인지 채소밭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웠으니 작심삼일은 아니었지만 한 철을 버티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버리고 말았다. 풀과의 전쟁에서 완벽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실제 고추 네 다섯 가지면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를 이웃친지에게 나눠주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모른 백면서생의 무지한 욕심 때문에 텃밭은 잡초밭이 돼버린 것이다.
차라리 코스모스라도 심었더라면 한철 꽃구경이라도 했을텐데 후회막심 하고 있을 때 앞 동네에 사는 낯익은 후덕하게 보이는 아주머니가 찾아와 뒷밭을 벌어 보겠다고 얘길 하셨다.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눈빛이 너무 편안해 보여 두말 않고 마음대로 하시라는 답을 드렸고, 6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이듬해 이른 봄부터 텃밭을 부지런히 왕래하며 고랑도 만들고 씨도 뿌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는 일이 바빠 잠시 뒷밭을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지난 봄 끝 무렵에 우연히 텃밭을 내려다 본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잡초가 우거져 볼 수 없었던 땅이 문전옥답으로 바뀌었고 그것을 본, 놀러온 친지들은 농사꾼이 다 됐다는 계면쩍은 칭찬을 늘어 놓으니 그야말로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잘 다듬어진 밭을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평안하니 이것이 바로 행복이구나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설 무렵, 그날 따라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저녁 시골 황토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토방 마루에 두홉짜리 소주병에 절반 넘게 담겨진 참기름과 깨 한 보새기가 비닐봉지에 넣어져 놓여 있었고 간단한 메모지가 봉지 아래 깔려 있었다
“ 안영하새요 집 뒤에 밧버는 사람이 꾀 조껌하고 찬기름 하고 집에다 갓다 놓코 왔으니 그리 아새요 ”

투박하지만 꼼꼼히 쓰여진 메모지를 보면서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 졌다.
아! 이것이 사람사는 세상이구나, 가슴이 벅차 올랐다.
아주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가슴속으로 전달되는 것이 느껴지면서 세상 구석구석에는 아직 어떤 일의 이치나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다 하려하는 경우있는 사람이 많이 있구나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 조건없이 내 드렸고 오히려 잡초로 뒤덮인 텃밭을 일궈서 머릿속을 환하게 해준 아주머니의 마음은 나에 대한 경우있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배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경우(境遇)있는 만남이 실종되고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예전 우리들 부모님 세대에서는 경우(境遇)있는 행동을 대인관계에 으뜸으로 생각하셨고 나 또한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사회가 많이 시끄럽다고 한다. 서민경제도 어렵고, 각계각층의 구성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런저런 얘기도 들리고 중앙정국은 여.야의 힘겨루기로 바람 잘 날이 없어 국민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뉴스를 보기가 민망하다고 말 하는 분들도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논쟁을 지켜봐야 할것인지 답답하기도 하다.

시골 한 아주머니의 경우(境遇)가 크게 가슴에 와 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통해서 작은 희망을 찾아보는 나의 욕심은 그야말로 희망이 아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