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죽녹원(竹綠苑)’ 이라는 수필로 최근 ‘현대문예’에 당선된 라규채 사진작가의 글입니다. 그는 담양군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사진작가로 데뷔, 지금은 대나무 사진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중진작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자신의 대나무 사진 작품속에 녹아있는 ‘대나무’ 를 화두로 담양의 관광명소인 ‘죽녹원(竹綠苑)’ 을 글로 예찬한 수필을 <현대문예> 발표하면서 수필가로서도 문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라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한번 죽녹원, 그리고 대나무와 대숲에 대한 특별한 감회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예로부터 호남사람문화의 고장으로 올곧은 선비의 숨결이 묻어나는 곳 담양.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테마로 조성된 죽녹원에 들어서면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청살문이 먼저 반긴다.
쉬엄쉬엄 대숲으로 다가서면 산들바람에 서로의 몸을 비비며 내는 소쇄한 댓잎소리는 일상에 지친 삶의 고단함에 탄산음료와 같은 싱그러운 휠링음악으로 머문다.

굽이굽이 대숲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하늘을 가리던 푸른 대숲 사이로 영롱한 햇살다발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오욕으로 가득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무심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마치 장자의 ‘나비 꿈’처럼 ‘내가 대나무인지 대나무가 나인지’ 모호한 상태에 빠져드는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또 다른 세상을 만나면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는 흘러간 휴대전화 광고 카피처럼 적막한 대나무 숲에선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대나무는 곧게 뻗는 늘푸른 줄기와 모진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짙은 초록빛을 뿜어내는 청아한 잎들로 인해 선비의 올곧은 절개를 상징한다. 그러기에 대나무 사진하면 으레 곧게 뻗은 대나무 줄기나 짙은 초록의 댓잎에다 대숲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 그리고 대숲이 휠 정도로 내려앉은 설죽 장면을 의례 사진가들은 카메라에 담고 있다.

죽녹원은 내 평생 사진작업의 주제인 ‘비움 프로젝트(Emptiness project)’의 세트장이다. 나는 이곳에서 대숲에 바람을 끌어들여 하늘을 가리고 서있는 대숲을 유기적 해체를 통해 우주 속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이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텅 비어있다는 ‘空 시리즈’ 작업을 해오고 있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절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주변 사물들과 무한한 우주의 공간에서 서로 그물처럼 인드라망으로 얽혀 존재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법으로 해석하여 ‘모든 물질의 본질에는 원래 실체가 없으므로 언제나 공(空)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현대 물리학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모든 물질을 물리적으로 쪼개보면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분자는 원자로, 원자는 다시 원자핵과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와 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전기적으로 마이너스와 플러스 성질을 가지고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진동과 파동만이 존재하고 가시적으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들이 눈으로 보는 모든 물질의 본질은 하나의 파동으로서 우주 속의 삼라만상은 모두 텅 비어있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은 무(無)가 아니라 언제나 ‘진정으로 비어있는 것은 묘하게 존재한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의미한다.

나는 죽녹원 대나무의 외형적 상징성인 색(色)을 공(空)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가시적 실체가 없는 바람을 대숲에 끌어들인다. 바람이 일지 않을 때에는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대숲 사이를 이리저리 휘젖고 다니며 춤을 춘다. 내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나무라는 대상을 통해 ‘물질은 비어있는 것이며, 비어있는 것은 곧 물질이다.(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우주의 본질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내가 대숲에서 카메라를 안고 춤을 추며 사진을 통해 대숲의 형태를 해체하는 것은 사실 해체가 아니라 대숲이라는 존재의 변함, 곧 무상함을 포착해 내는 행위이자, 실체 없는 대숲의 무아(無我) 곧 공(空)을 얻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의 작품에는 대나무의 실체는 보이지 않고 항상 유(有)와 무(無)의 경계인 푸른빛만이 존재한다.

언제나 푸른빛을 간직한 죽녹원 대나무 숲은 사철 우리의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기에 안성맞춤이지만 대숲의 진수는 눈 내리는 겨울철이다. 대숲에 솜털처럼 휘날리는 새하얀 눈과 푸른 대나무의 어울림은 환상의 하모니다. 특히 짙푸른 댓잎과 줄기에 소복이 눈이 내려앉은 죽녹원 풍경은 고려시대 문신으로서 문인화의 대가인 이 정의 설죽(雪竹)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