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 기억으로 소학교 3학년때던가 싶네. 겨우내내 절어 만든 광주리, 석작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행상에 나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해 바닷가 어느 마을에선가 해방을 맞았지”

“몇 살때부터 죽세공품을 만들기 시작했냐”는 기자의 물음에 “80평생을 대나무와 함께했다”는 남상보(77세)씨는 지난 세월이 너무나 생생한 듯 빛바랜 흑백사진 몇장을 꺼내 보이며 지긋이 눈을 감더니 마치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는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듯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말석이며 광주리며 도시락바구니를 절던 부모 곁에서 자연스레 보고 배웠어. 그때가 소학교를 졸업하기 전이니 열 두세살쯤인데, 배웠다기 보다는 당시로선 그게 생활의 일부였으니 손에 익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그때 우리 부친은 마을에서도 솜씨가 좋기로 소문나 주로 일본사람들이 도시락바구니를 주문했는데 만들기가 바쁘게 전량 일본으로 팔려 나가곤 했지. 당시 일본은 전쟁중이라 물자가 딸리기도 했지만 여하튼 담양에서 만든 죽제품은 최고 대접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곤 했어”

남상보씨가 나서 자란 삼다리는 예로부터 죽세공품인 ‘말석’을 만들어 파는 곳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마을주민 전체가 바구니 제작에 매달려도 미쳐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호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변천은 거스를 수 없는 법.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20여 세대가 말석을 만들었지만 IMF를 전후로 주문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유무역화의 여파로 중국, 동남아 등의 값싼 죽세공품이 수입되자 담양산 제품의 수요가 급감했다.

현재 약 50호 정도가 살고 있는데 이제 한두집 정도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을 뿐 이곳도 여느 마을과 다를바 없이 죽세공예의 맥이 끊긴지 오래다.

1970년대에는 담양 죽제품이 외국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삼다리 주민들은 말석을 만들어서 농사일 이외에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에는 대나무밭이 황금밭이라 불리며 대밭이 있는 사람들은 죽세공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대를 파는 것만으로도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어서 대밭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자식들의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또한 대밭이 없는 사람들은 대를 사서 죽세공품을 만들었지만, 자신이 노력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삼다리의 주민들은 온 가족이 말석을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기자가 취재 중 ‘말석’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내자 남씨는 벽장에서 말석을 꺼내 보이며 “예전에는 음식을 담아서 보내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바지석작’이라고 했어. 옛날 혼례식 때에는 신부집에서 장가를 온 신랑에게 큰상을 차려주고, 그 후행(後行) 또는 상객(上客)이 돌아갈 때 각종 음식을 대나무로 엮은 석작에 담아서 신랑집으로 보냈지. 또 신부가 결혼한지 3일만에 시댁으로 신행(新行)을 가는데 이때 신랑집에서도 신부를 데려간 후행들이 돌아갈 때 석작에 음식을 담아 보냈어”

이렇게 이바지 석작으로 쓰이던 말석이 최근에는 명절선물로 판매되는 한과의 포장재로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말석은 소석, 중석, 대석으로 나뉘는데 업체에서 주문을 하면 그 양만큼만 제작을 한다.

이처럼 수요가 뜸한 말석 제작 대신 남씨는 요즘 읍내 특산품 매장의 주문을 받아 도시락바구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도시락바구니는 PVC 플라스틱 제품이나 스테인레스 용기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5~60년대대 산업화 이전에는 가정 필수품으로 수요를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호황을 누리다 한동안 종적을 감추는가 싶더니 최근들어 공예품 내지 관광소품으로 각광받으면서 옛 것을 선호하는 애호가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남씨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었다.

남씨는 기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자신이 평생을 일궈온 삶의 터전인 대밭으로 안내했다.

“이보게 기자양반. 이게 꼭 돈이 돼서 만들고 있는게 아닐세. 80평생을 대나무와 함께하는 동안 5남1녀를 반듯하게 키워내 큰아들을 서울대에 보냈고 자식들 모두 대학 졸업하고 각기 제몫을 하고 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다만 이것을 익히려는 사람도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도 없어 행여 이대로 명맥이 끊기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것이 아쉽고, 이제 우리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은 나마져 이 일을 놓게 되면 이대로 끝나는게 아닌가 싶어 그게 안타까울 뿐이라네”

남씨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랜 가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밭에선 올해도 변함없이 죽순이 돋아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 김관석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