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생태환경에 알맞은 대나무 제품을 상품화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나아가 지역 경제를 발전시켰던 죽세 공예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 보는 것은 오늘날 위기에 처한 우리고장의 대나무산업 기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대나무 생산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을 갖고 있는 세대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경험과 기술, 그리고 그 기술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확보해 두는 것은 담양 대나무 문화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담양 대나무 제품 생산자들의 생애 이야기는 오랜 세월 죽제품 생산에 종사했던 담양 주민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수북면 대방리(大舫里)에서 오늘도 외롭게 전통 죽공예의 맥을 잇고 있는 정용택(71세)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차도구의 명인이다.

기자가 정씨를 찾아 마을입구에 들어서자 마을 이름에서 말해주듯 마치 방주(方舟)를 연상케 하는 너른 들판이 마을 앞에 펼쳐져 있고 뒷편으로 병풍산과 삼인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 모정에선 동네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한데 모여 한가로이 초여름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마침 할머니 한분에게 “마을에 죽세공예 하는 집이 몇 집이나 되나요?”하고 물었다. “대바구니 말인감. 아따 누가 요즘 세상에 그 것 만들어 팔겄어. 한때는 우리 마을도 농사지으랴 바구니 절야 날 새는 줄 몰랐지만 다 옛날 얘기제. 대자리, 석작, 광주리 그 많던 것 다 끊기고 이제 딱 한사람 남았네”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은 죽세공예 장인 정용택씨의 보금자리이자 대나무 공방은 생각보다 소박하고 단촐했다. 3~4평 남짓 창고 겸 작업장에서 정씨는 묵묵히 죽제품 제작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지손가락만한 대나무 마디 하나가 정씨의 손끝을 거치자 백스무가닥 실처럼 가늘고 세밀한 올이 되어 차선(찻사발에 가루차를 넣고 물을 부어 휘젓는 솔)이라는 훌륭한 제품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요즘 정씨가 주로 만들고 있는 물건은 차도구 대나무 제품들. 다완, 탕관, 찻잔 등 다기(茶器)와 더불어 다도(茶道)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용구가 바로 대나무 차도구다.

차도구를 모두 한곳에 수납하는 차바구니를 비롯하여 가루차를 내는데 쓰는 차선, 차를 뜨는데 쓰는 차시와 차칙은 물론 물을 떠 다기에 붓는 용구인 표자 등 다양한 차도구들이 정씨의 손을 거쳐 명품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들은 주로 대나무박물관내 특산품 매장이나 읍내 죽제품 상가의 주문을 받아 이루어 지는데 정씨가 만든 죽제품들은 전국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최고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아 차바구니의 경우 수십만원을 홋가 하지만 모두가 수작업으로 이루어 지다보니 시간도 많이 걸릴뿐 아니라 수량에 한계가 있어 주문을 다 소화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정씨는 학창시절인 16~7세때부터 죽세공예품 제작에 뛰어 들었다.
1938년 수북면 궁산리에서 태어나 집앞에 널린 대밭을 놀이터 삼아 유년시절을 보내 유난히 대나무와 친숙했던 그는 외가인 담양읍 만성리에서 어른들이 죽세공예품 만드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 흉내를 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 그길로 곧장 죽세공예의 길로 들어 섰다고 한다.

그런 그가 1960년대 말, 군을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작정 상경했다. 마침 우리보다 차문화가 앞선 일본에서 차도구가 크게 딸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30여명의 직원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나무를 가공한 차도구 제작에 착수했다.

좀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1970년대 일본을 제집 안방 드나들듯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지역 최초로 일본 수출길을 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죽제품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해 명품을 선호하는 일본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호평을 얻어 당시 돈으로 10억여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1980년대에 들어 컴퓨터가 본격 보급되면서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단말기 사업에 투자한게 화근이 돼 부도를 맞고 가족까지도 해체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용히 낙향한지 20여년째에 접어든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 온 느낌이다.

90세 노모를 모시고 오늘도 묵묵히 죽제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정씨의 소망이 있다면 단 한가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지금은 사라지거나 실생활에서 족적을 감춘지 오래인 옛 죽세 공예품들을 재현하고 그 작품들을 모아 개인전시회를 갖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중앙민속박물관이나 대학도서관 등 연구기관을 찾아 실물을 관찰하고 옛 문헌을 열람하면서 그 성과물을 토대로 한점 한점 작품들을 완성해 가고 있다. / 김관석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