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3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48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5월 15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소장이 ‘소통과 헌신의 정치리더십, 세종에게 배운다’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백성과의 소통(疏通)이 정치의 근본"

“세종, 그는 바로 조선이다. 세종은 조선의 화신(化身)이다. 조선의 표준을 세운 임금이 바로 세종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거의 모든 것의 골조를 세운 이가 세종이다. 세종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조선 초기의 실상이 제대로 포착될 리 없고, 나아가 조선 500년에 대한 기본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영조니 정조니 하는 이야기는 조선의 에피고넨, 즉 아류에 관한 모색일 뿐이다.”(이한우, <세종-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해냄, 2006, 6쪽)

세종은 조선의 표준을 세운, 조선의 화신이자 조선 그 자체로 평가받는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소장은 ‘국가경영’의 눈으로 세종 리더십에 주목해 왔다. 따라서 그가 강연을 통해 세종 리더십을 재현하는 과정은 한국형 국가경영 리더십의 전통적 표준을 찾아가는, 아니 한국형 리더십의 화신이자 리더십 그 자체를 탐색하는 과정이 아닐까.

“세종은 누구보다 섬김의 대상을 분명하게 설정한 리더였다. 백성을 천민(天民), 즉 하늘이 자신에게 위임한 존재라고 여겼다(代天理物). ‘노비와 양민 구분 없이 그 생명 모두 하늘이 맡긴 존재인데 어찌 감히 그들을 섬기고 보살피는 일에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천명했다. 백성을 섬기고 보살피는 것이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當順天道). 실제로 세종은 하늘이 항상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기에 생업을 가진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살게 하는, 생생지락(生生之樂)의 세상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인식했다. 세상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 군주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반론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하긴 그렇다. 최근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의 와중에서 ‘위험하면 안 사먹으면 될 것 아니냐’ 등과 같은 정치지도자의 민망한 잡설(雜說)을 들어야 했다. 600년 전 봉건시대에 백성을 하늘로 섬겼던 세종의 천민(天民) 사상이 21세기 민주사회에 공동체 구성원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지도자의 천민(賤民) 사상을 보색(補色) 삼아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民貴'와 '民生'을 넘어 '民通'까지

조선시대 초기에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라는 법률이 있었다. 아전, 양민, 천민 등이 자기 고을의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법인데, 허조가 원나라의 전례를 참고한 뒤 태종의 허락을 받아 만들었다. 세종은 왕위에 등극한 뒤 이 법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바꾸거나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허조를 필두로 다수의 관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를 주청했다. 하극상을 방지하는 이 법률이 없어지면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백성의 버릇이 나빠질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세종은 승지에게 다른 나라에 수령을 고소한 사례가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마침 원나라에 ‘사주고소법’(사주는 수령의 중국식 표기)이라는 법률이 있었기에 세종은 확실한 명분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백성의 뜻이 위로 펼쳐지게 해야 한다는 ‘명분론’도 살리고 나라의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는 ‘현실론’도 존중했다. 백성에게 수령을 고소할 수 있는 기회는 허용하되 그 지역의 수령에게 죄는 묻지 않는, ‘절충론’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죄를 묻지 않는다 해도 결과적으로 고소 건수는 인사 고과에 반영됐다.

“세종은 백성을 섬기고 보살피면서 민귀(民貴)와 민생(民生)을 기준으로 삼았다. 맹자를 보면 ‘민귀군경(民貴君輕)’이 있는데,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는 뜻이다. 세종에게 백성은 천민(天民)이었기에 당연히 귀한 존재였고,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자신의 심신을 가볍게 어겼음은 물론이다. 세종의 민생 사상은 빈곤의 해방과 국방의 강화를 통해 백성의 신뢰를 다졌던 ‘족식족병 민신지의(足食足兵 民信之矣)’에 잘 담겨져 있다. 세종 리더십은 민귀와 민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위대성이 발견된다.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펼치게 한 것이 그것인데, 나는 그것을 감히 민통(民通)이라 부르고 싶다. 부민고소금지법을 바꾼 것은 물론이고 훈민정음 창제 또한 백성과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렇다. 국왕과 관료만이 아니라 백성 모두를 똑똑하게 만들자는 것이 세종의 목표였다. 가능하면 백성이 무지해야 지배하기 편하다는 당대의 상식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고 세종을 추진력이 없는 문약(文弱)한 인물로 읽었다면 심각한 오독이 아닐 수 없다. 도리어 세종은 뜻한 바가 있으면 치열하면서도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반드시 관철시켰다.

“세종은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던 고약해와 최만리의 강경한 반대를 무릅쓰고 수령 임기제 연장과 훈민정음 반포를 추진했다. 백성들이 편리하고 수월하게 소통하도록 만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없었다면 안 될 일이었다. 당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설사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도 국왕을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더욱이 정책 수립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것의 집행 과정을 직접 챙기고 사후 평가도 실시했다. 예컨대 훈민정음을 반포한 뒤에는 언문청을 만들어 지속적인 연구 작업을 벌였으며, 기술직의 하위관료 임용시험에 훈민정음을 필수과목으로 포함시켰다. 그렇게 집요하면서도 점진적인 방법을 동원해 모든 백성과 관료들이 훈민정음을 배우고 활용케 했다.”

태종은 선위(禪位) 뒤에도 4년 동안 ‘상왕 정치’를 했다. 이 시기에 세종의 장인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심온이 억지 누명을 쓰고 제거됐다. “내가 모든 악업을 지고 갈 테니 부디 성군이 되라.” 태종이 세종에게 남긴 말이다. 세종의 태평성대는 태종의 외척제거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세종 스스로 준비돼 있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허사였을 것이다.

“조말생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가 병조판서를 하면서 800관의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기준으로는 뇌물이 78관을 넘으면 사형이었다. 당연히 조말생의 탄핵을 요구하는 상소문이 잇따라 올라왔다. 그런데 조말생은 똑똑하고 유능한 관료로서 세종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처리를 뒤로 미루며 여론을 무마한 뒤 파직시켰다가 5년이 지난 후에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조말생은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해 세종의 배려에 보답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조말생의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를 하게 되었는데, 부친의 과거 비리가 장애로 작용했다. 조말생은 이번에도 임금이 용서할 것이라 확신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융통성과 원칙 그리고 세심한 배려

세종은 조말생의 능력을 높이 사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의 죄가 없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종이 융통성은 발휘하되 원칙마저 망각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말생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종이 <농사직설>을 참고하되 각 지역의 기후와 실정에 맞게 응용하라고 권장한 것도 이러한 융통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세종은 국가경영을 하면서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당시 국가의 연회는 주로 왕실이나 사신을 위해서만 열렸다. 세종은 여기에 새로운 연회를 추가했다. 과거 시험에 급제한 인재를 위해 ‘은영연’이라는 축하연을 열어주었고, 노인들을 궁궐로 초빙해서 이른바 ‘효도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죄수도 사람으로 대접할 것을 지시했다. 한여름이 되면 냉수를 채운 물동이를 좀더 자주 넣어주도록 했고,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머리를 감도록 해주었다. 궁궐 안에서 일하던 노비를 위해 ‘출산휴가제’도 마련했다. 애를 낳기 전에 한 달 동안 쉬게 해주었고, 출산 후에는 백일의 별도 휴가를 허용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에게도 한달 휴가를 줬다는 사실이다. 세종 4년에 시작된 이 제도는 이후 10년간 지속적으로 보완됐다. 세종이 성군으로 추앙받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의도통신 정지환 기자

정윤재 소장의 이력서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서울대 정치학 석사
▲ 미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
▲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문제연구소 방문교수
▲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편집이사
▲ 현대사상연구회 회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처장, 국제협력처장, 교수
▲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
▲ 한국리더십학회 공공리더십위원장
저서: <유교리더십과 한국정치>, <세종의 국가경영>, <정치리더십과 한국민주주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