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3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44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0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작가 박범신(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 ‘결핍과 충만’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야성 잃은 젊은 세대에게 고함

“오세훈 서울시장과 킬리만자로 꼭대기를 같이 오른 적이 있다. 당시 오 시장이 말하기를, ‘선생님이 병풍이 돼 주세요’라고 했다. ‘무슨 병풍?’ 하고 물었더니,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주시죠’라고 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을 것’이고, ‘가끔 가서 어드바이스만 해주셔도 후배들에게는 큰 격려가 될 것’이라는 등의 설득이 이어졌다. 사실 지금까지는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를 대개 개발주의자들이 맡아 왔다. 그러다 보니 거대도시를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불가사리 같은 도시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런 거대도시의 그늘을 걷어내고 문화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병풍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수락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삶의 본령은 작가다.”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은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직책이 적잖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1946년 태어난 그는 스물일곱이 되던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작가의 외길을 걸어 왔다. 한때 절필을 선언하고 은거에 들어가는 굴곡도 있었지만 결국 문단에 복귀한 그에게 ‘작가’는 유일한 직업일 터였다.

“고시만큼 문턱이 높다는 신춘문예를 통과했지만 1978년까지 배고픈 무명작가로 지내야 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나라에서 작가가 소설로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고통의 정도가 얼마나 컸는가 하면,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9년 <죽음보다 깊은 잠>이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일류 영화배우 못잖은 스타작가로 살게 되었다. <불의 나라>와 <물의 나라>는 합쳐서 100만부 이상이 팔렸고, <풀잎처럼 눕다>도 수십만부가 팔려 나갔다. 그러나 그 시기가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개발독재와 이념대립이 군림하던 1970~80년대 나는 영광의 ‘찬미미사’와 오욕의 ‘인민재판’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100볼트 플러그와 200볼트 콘센트

1993년 문화일보에 <외등>을 연재하고 있던 ‘스타작가’ 박범신은 갑자기 회의에 빠져 들었다. ‘나의 소설은 어느 제단에 바쳐지고 있는가’, ‘나는 소설 쓰는 기술자가 된 것은 아닌가’, ‘많은 여자에게 화려한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한 여자에게 깊은 사랑을 받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등의 근본적 물음들이 지쳐 있던 그의 내면으로 밀물처럼 몰려 왔다.

“두 달만 있으면 연재가 끝날 예정이었지만 나는 단 한 장의 원고지도 메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무조건 ‘연재를 중단하며’라는 제목의 짧은 원고를 들고 신문사로 찾아 갔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원고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나는 작가로서 이제 연대표(年代表)를 아무리 외워 봐도 역사를 알 수 없고, 지구의(地球儀)를 아무리 돌려 봐도 세계를 알 수 없다. 내 상상력의 불이 꺼졌으니 더 이상 작품활동을 못하겠다. 작가는 무당과 같은 존재인데 무당도 기가 떨어지면 산으로 가서 정양하는 것과 같이 나도 이제 내 마음의 산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신문사 편집부에서 원고를 대충 봤는지 기사에 붙인 제목이 ‘박범신 잠정 절필하고 입산’이었다. ‘입산’이란 표현 때문에 졸지에 나는 중이 될 뻔했다.”

‘절필작가’ 박범신은 이후 3년 동안 용인의 텃밭 딸린 한 오두막에 은거했다. 그것은 인기작가로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찌들었던 독기가 빠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텃밭에서 풀을 뽑다가 막 뭔가를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게 소설의 문장들이었다. 자기 안에 뱉어내야 할 언어들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느꼈다.

“1980년대 나는 상상력의 우물에 새 물이 고이기도 전에 계속 떠내기만 했고, 그것이 나를 지치고 미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미쳐 있다. 비유하자면, 대한민국은 100볼트 전열기구의 플러그를 220볼트 콘센트에 꽂고 사는 것과 같다. 생각해 보라. 100볼트 냉장고의 플러그가 220볼트에 꽂혀 있으면 코일이 타버린다. 그렇듯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조작되는 자본주의적 욕망, 애당초 우리 것도 아니었던 그것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라는 코일이 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독기가 빠지고 나무와 새가 보이기 시작하자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언어의 샘물이 넘쳐흘렀다. 나는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흰 소가 끄는 수레>는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박범신의 문학이데올로기는 순정주의와 인간주의로 집약된다. 그런 아날로그적 인물인 그에게 생각지 못했던 제안이 들어왔다. 디지털 문명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소설을 연재해 보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5개월 동안 새로운 방식의 소설 쓰기가 진행됐다. 그런 결심을 하게 한 동력은 도대체 뭘까?

“야성과 희망과 도전정신도 모두 잃어버린 젊은 세대를 위해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와 같은 과거 세대는 연애 하나를 해도 정말이지 치열하게 했다. 부모와 친구와 멀어지거나 학교 성적이 떨어지는 등 다른 모든 것이 엉망이 될 정도로. 그러나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너무나 콘트롤을 잘해서 도리어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할 정도다. 그러나 자기를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사랑과 행복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 루카치는 1960년대를 두고서 ‘하늘의 별을 지도 삼아 인생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는 하늘의 별을 보고서 더 이상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달콤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인생의 목표로 착각하고 있는 젊은 세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박범신의 <촐라체>는 그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젊은 세대 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약 10년 전부터 히말라야를 순례하기 시작한 것이 작품의 내밀한 소재로 이어졌다. 로프 하나에 의지해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두 형제의 이야기는 인간의 위대한 도전정신과 의지,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도 타인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휴머니즘에 강력한 옹호로 읽혀진다.

“돌확처럼 솟은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오른발을 넓게 벌려 돌확 모서리를 힘껏 짚었다. 무릎이 시큰했다. 힘의 중심이 유턴하면서 간신히 제동이 걸렸으나 관성 때문에 허리가 한껏 앞으로 꺾였다. 내가 그것과 정면으로 딱 맞닥뜨린 것은 굽은 허리를 막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것은, 촐라체 북벽이었다. 나는 한순간 온몸이 스톱모션으로 굳었다. 피잉, 하는 듯한 낮고 날카로운 금속성, 혹은 가열차게 허공을 가르는 가죽 채찍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채찍을 맞은 내 앞이마가 유리창 갈라지듯 갈라지는 게 환상적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해발 6440미터의 촐라체가 거대한 히말라야 산군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내게 하나의 섬광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돌확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촐라체가 던지는 다섯 가지 메시지

소설 <촐라체>의 첫 장이 열리자마자 등장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킬로미터,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6440미터 봉우리’인 촐라체와 첫 대면을 하던 주인공, 아니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젊은 세대가 자신과의 피어린 사투에서 주저앉지 않고 정체성을 찾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도 담겨 있다.

“이 소설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5가지였다. 첫째,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정체성은 일상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극한 상황에서만 실존적 자아가 보인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지 사는 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폴 발레리의 경구를 가슴에 새길 일이다. 둘째, 삶의 역동성을 믿어야 한다. 결핍과 충만 같이 자기분열의 단층에서 솟구치는 에너지를 읽어내야 한다. 셋째,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일상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 등정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 다시 일어나 복귀할 수 있는 용기는 결코 산악인만의 것이 아니다. 넷째,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시궁창의 더러운 동물에서 우주의 원리를 아는 신까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거니와, 휴머니즘을 잃으면 안 된다. 다섯째, 개방성을 견지하자. 정체성, 역동성, 집중력, 도덕성을 중심에 굳건히 세우되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여의도통신 정지환 기자

박범신 이사장의 이력서

▲ 원광대 국문학과 졸업
▲ 고려대 교육학 석사
▲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름의 잔해’ 당선 데뷔
▲ 문화일보 객원논설위원
▲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부교수
▲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설분과위원장
▲ 한국소설가협회 운영위원
▲ 한국방송공사 이사
상훈: 대한민국문학상, 제3회 원광문학상, 제4회 김동리문학상, 제18회 만해문학상, 제11회 한무숙문학상 외
저서: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이야기> / 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침묵의 집>, <외등>,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촐라체> 외 /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